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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의롭게 돈 쓰겠다”…새로운 소비의 ‘변’을 듣다
입력 2019.12.24 (16:11) 취재K
태어날 때부터 ‘소비자’로 태어난 사람이 있을까요? 소비하기 위해 살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별로 없을 겁니다. 한 명의 인간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려다 보니,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소비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비 과잉’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주객전도를 경험합니다. 사지 않아도 되는 것, 꼭 필요하지 않은 것도 ‘반드시 필요하고, 꼭 사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갑을 열어 소비하면서 내가 소비의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주인이 아니라 마케팅의 노예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제 이런 소비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소비를 통해서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들. 개개인은 무력할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이 모여서 신념을 드러내면 사회를 더 좋게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소비자들을 만났습니다.


서울에 있는 한 기업의 물품 매장. 휴대전화 케이스에서부터 옷, 가방, 사무용품들까지. 다양한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대부분의 제품들에 꽃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꽃의 종류가 제각기 다른데, 알고 보니 해당 꽃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티브로 한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들 삶의 얘기를 듣고, 그분들의 이미지를 보고 꽃을 한 가지씩 정한 뒤 그 디자인을 상품 위에 입혔습니다. 할머니들 사진과 정해진 꽃을 하나씩 살펴보니 과연 그 할머니들과 절묘하게 들어맞는 이미지의 꽃이 선정됐습니다.

매장을 둘러보며 소품을 사려 하는 한 대학생이 밝힌 ‘소비의 변’을 들어봤습니다. “어차피 뭔가를 산다면 저는 의미 있는 쪽으로 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제가 따로 기부를 하지 않아도 제가 사면 자연스럽게 기부가 되잖아요.” 이 기업은 영업이익의 절반가량을 위안부 할머니들과 형편이 어려운 아동들을 위해 기부해왔습니다. 2012년, 사업 초반에는 이 기업이 잘 될까 우려하는 시선도 많았지만 이제 기업 운영은 안정됐습니다. 기업은 해마다 50%가량의 성장세를 이어왔습니다. 제품들의 상당수는 해마다 완판됐습니다. 업체 관계자는 말했습니다. “우리 브랜드에 충성스러운 팬들이 참 많아요. 사실 우리 기업의 물건은 가치를 파는 건데... 가치를 사려는 사람들이 계속 늘고 있다는 것에 매번 놀라요”


신념에 따라 소비하는 이른바 '정의로운 소비'는 특히 패션업계에서 이미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됐습니다. 오리와 거위털을 이용한 다운소재들에는 RDS (responsible down standard) 로고가 종종 보입니다. 이 인증 마크를 받으려면 살아있는 조류의 깃털을 강제로 채취하면 안 됩니다. 동물들의 먹이와 위생 관리에 힘쓰는 등 사육, 도축, 가공 과정도 윤리적이어야 합니다. 국내 최대 다운 제공 업체의 통계를 보면, 윤리적 다운 소비량은 지난 2016년에 비해 올해 3배가량 늘었습니다. 업계 관계자들은 RDS 로고부터 확인하고 사는 소비자들도 늘었다면서, 이제 RDS는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습니다.

동물 털 없이 합성 소재로 만든 인조 모피도 인기입니다. 인조 모피 판매시장은 해마다 30%가량 성장하고 있습니다. 한 스포츠 의류 업체에서는 올가을 친환경 트렌드에 앞장서기 위해 페트병을 재활용해서 만든 재킷을 선보였는데, 단시간에 완판되기도 했습니다. 올해 8월, 전 세계 150개 유명 브랜드는 패션업계가 환경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이른바 'G7 패션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환경 문제에 민감한 소비자들이 늘면서 업계가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미, 신념을 뜻하는 ‘미닝(Meaning)’과 ‘나오다’라는 뜻의 ‘아웃(out)’이 결합된 미닝아웃이라는 신조어는 이제 소비 트렌드의 중요한 축이 됐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소비를 통해서 밖으로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건데, 이제 이 흐름이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올 한해 영화계를 강타한 ‘영혼 보내기’도 이런 소비자들의 욕구가 그대로 반영돼 있습니다. 영혼 보내기는 본인이 지지하는 영화가 흥행하는 것을 돕기 위해 직접 보러 가지 못하더라도 대신 표를 사주는 행동 등을 가리킵니다. SNS를 통해 자발적으로 영화 홍보도 해주고, 영화관을 빌려 단체 관람을 추진하기도 합니다.

올 한해 영혼 보내기의 대상이 된 영화들은 의미는 있지만 홍보력은 부족한 작은 영화, 소외된 삶에 대한 얘기를 풀어낸 영화, 여성들의 삶을 더 보듬어 주는 영화들입니다. 영혼 보내기를 종종 한다는 분을 만났습니다. 돈이 아깝지 않느냐는 말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되게 미약한 힘이잖아요. 돈 많은 제작자가 나서는 것에 비하면 정말 작죠. 그렇지만 저의 이런 행동을 통해 영화를 찍는 제작진이 또 다른 영화를 찍을 힘을 얻을 수도 있잖아요.”


제가 만난 소비자들이 ‘멋있는 척’ 하기 위해 이런 소비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나의 작은 구매 행위를 통해 더 긍정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의 소비가 내 만족을 넘어서서 사회를 더 아름답게 바꾸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그런 분야에 소비를 하겠다는 겁니다. 젠더, 환경, 노동 등의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런 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곳에 돈을 쓰는 것이 합리라고 생각하는 소비자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내년도 우리 사회를 이끌 주요 소비 트렌드로 ‘정의로운 소비’를 예측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 이유입니다.
  • “나는 정의롭게 돈 쓰겠다”…새로운 소비의 ‘변’을 듣다
    • 입력 2019-12-24 16:11:00
    취재K
태어날 때부터 ‘소비자’로 태어난 사람이 있을까요? 소비하기 위해 살고 있는 사람은 아마도 별로 없을 겁니다. 한 명의 인간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려다 보니,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소비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비 과잉’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주객전도를 경험합니다. 사지 않아도 되는 것, 꼭 필요하지 않은 것도 ‘반드시 필요하고, 꼭 사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갑을 열어 소비하면서 내가 소비의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주인이 아니라 마케팅의 노예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제 이런 소비를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소비를 통해서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들. 개개인은 무력할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이 모여서 신념을 드러내면 사회를 더 좋게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소비자들을 만났습니다.


서울에 있는 한 기업의 물품 매장. 휴대전화 케이스에서부터 옷, 가방, 사무용품들까지. 다양한 제품들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대부분의 제품들에 꽃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꽃의 종류가 제각기 다른데, 알고 보니 해당 꽃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티브로 한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들 삶의 얘기를 듣고, 그분들의 이미지를 보고 꽃을 한 가지씩 정한 뒤 그 디자인을 상품 위에 입혔습니다. 할머니들 사진과 정해진 꽃을 하나씩 살펴보니 과연 그 할머니들과 절묘하게 들어맞는 이미지의 꽃이 선정됐습니다.

매장을 둘러보며 소품을 사려 하는 한 대학생이 밝힌 ‘소비의 변’을 들어봤습니다. “어차피 뭔가를 산다면 저는 의미 있는 쪽으로 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제가 따로 기부를 하지 않아도 제가 사면 자연스럽게 기부가 되잖아요.” 이 기업은 영업이익의 절반가량을 위안부 할머니들과 형편이 어려운 아동들을 위해 기부해왔습니다. 2012년, 사업 초반에는 이 기업이 잘 될까 우려하는 시선도 많았지만 이제 기업 운영은 안정됐습니다. 기업은 해마다 50%가량의 성장세를 이어왔습니다. 제품들의 상당수는 해마다 완판됐습니다. 업체 관계자는 말했습니다. “우리 브랜드에 충성스러운 팬들이 참 많아요. 사실 우리 기업의 물건은 가치를 파는 건데... 가치를 사려는 사람들이 계속 늘고 있다는 것에 매번 놀라요”


신념에 따라 소비하는 이른바 '정의로운 소비'는 특히 패션업계에서 이미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됐습니다. 오리와 거위털을 이용한 다운소재들에는 RDS (responsible down standard) 로고가 종종 보입니다. 이 인증 마크를 받으려면 살아있는 조류의 깃털을 강제로 채취하면 안 됩니다. 동물들의 먹이와 위생 관리에 힘쓰는 등 사육, 도축, 가공 과정도 윤리적이어야 합니다. 국내 최대 다운 제공 업체의 통계를 보면, 윤리적 다운 소비량은 지난 2016년에 비해 올해 3배가량 늘었습니다. 업계 관계자들은 RDS 로고부터 확인하고 사는 소비자들도 늘었다면서, 이제 RDS는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습니다.

동물 털 없이 합성 소재로 만든 인조 모피도 인기입니다. 인조 모피 판매시장은 해마다 30%가량 성장하고 있습니다. 한 스포츠 의류 업체에서는 올가을 친환경 트렌드에 앞장서기 위해 페트병을 재활용해서 만든 재킷을 선보였는데, 단시간에 완판되기도 했습니다. 올해 8월, 전 세계 150개 유명 브랜드는 패션업계가 환경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이른바 'G7 패션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환경 문제에 민감한 소비자들이 늘면서 업계가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미, 신념을 뜻하는 ‘미닝(Meaning)’과 ‘나오다’라는 뜻의 ‘아웃(out)’이 결합된 미닝아웃이라는 신조어는 이제 소비 트렌드의 중요한 축이 됐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소비를 통해서 밖으로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건데, 이제 이 흐름이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올 한해 영화계를 강타한 ‘영혼 보내기’도 이런 소비자들의 욕구가 그대로 반영돼 있습니다. 영혼 보내기는 본인이 지지하는 영화가 흥행하는 것을 돕기 위해 직접 보러 가지 못하더라도 대신 표를 사주는 행동 등을 가리킵니다. SNS를 통해 자발적으로 영화 홍보도 해주고, 영화관을 빌려 단체 관람을 추진하기도 합니다.

올 한해 영혼 보내기의 대상이 된 영화들은 의미는 있지만 홍보력은 부족한 작은 영화, 소외된 삶에 대한 얘기를 풀어낸 영화, 여성들의 삶을 더 보듬어 주는 영화들입니다. 영혼 보내기를 종종 한다는 분을 만났습니다. 돈이 아깝지 않느냐는 말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되게 미약한 힘이잖아요. 돈 많은 제작자가 나서는 것에 비하면 정말 작죠. 그렇지만 저의 이런 행동을 통해 영화를 찍는 제작진이 또 다른 영화를 찍을 힘을 얻을 수도 있잖아요.”


제가 만난 소비자들이 ‘멋있는 척’ 하기 위해 이런 소비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나의 작은 구매 행위를 통해 더 긍정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나의 소비가 내 만족을 넘어서서 사회를 더 아름답게 바꾸는 데 일조할 수 있다면, 그런 분야에 소비를 하겠다는 겁니다. 젠더, 환경, 노동 등의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런 의지를 표현할 수 있는 곳에 돈을 쓰는 것이 합리라고 생각하는 소비자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내년도 우리 사회를 이끌 주요 소비 트렌드로 ‘정의로운 소비’를 예측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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