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심야심] 꼼수에 꼼수…‘007 작전’ 방불케한 본회의장

입력 2019.12.24 (17:51) 수정 2019.12.24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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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 없던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요즘 국회는, 그렇게 하루하루 새로운 전례를 만들고 있습니다.

'4+1 협의체'의 선거법 수정안이 상정됐던 23일 국회 본회의장도 그랬습니다.

'007작전'을 방불케 했던 그 날, 누구는 '꼼수'라고, 누구는 '전략'이라고 하는 작전, 어떤 게 있었는지 살펴봤습니다.

시작은 필리버스터

무엇이 꼼수이고, 무엇이 전략인지는 따져 묻지 않겠습니다.

전례가 없는, 그래서 이례적이라고 볼 수 있는 '작전'으로 통칭한다면, 시작은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의 선거법 개정안, 올봄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뒤 숙려기간을 가득 채우고, 지난달 27일 본회의에 자동 부의됐습니다.

민주당을 비롯한 '4+1 협의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한국당 당시 나경원 원내대표가 이틀 뒤 무제한 토론, 즉 필리버스터를 신청합니다.

지난달 27일, 자유한국당 전 원내대표 나경원 의원이 당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지난달 27일, 자유한국당 전 원내대표 나경원 의원이 당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국당이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는 선거법이 상정됐을 때 필리버스터를 신청할 것이라는 건 민주당에겐 상수였습니다.

변수는 한국당이 여야 이견이 없던 비쟁점법안에까지 '모두', 그리고 '미리'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상대 당의 허를 찌른 첫 번째 '작전'입니다.

필리버스터는 '임시회 쪼개기'로

민주당은 고민에 빠집니다. 한국당이 199개 안건에 신청한 필리버스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또, 이후에 추가로 들어올 필리버스터 신청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가 23일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가 23일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국회법상 합법적 의사진행 발언인 필리버스터를 끝내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재적 의원 5분의 3 이상의 표를 모아 종결동의안을 통과시키면 되는데, 표를 힘들게 끌어모은다고 해도, 안건 하나당 24시간 뒤에 표결할 수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안건 199개에 필리버스터가 걸렸으니, 199일이 걸린다는 이야깁니다. 불가능합니다.

나머지 하나, 바로 회기를 끝내고 다음 회기에 처리하는 겁니다.

국회법 제106조의2(무제한토론의 실시 등)
⑧ 무제한토론을 실시하는 중에 해당 회기가 끝나는 경우에는 무제한토론의 종결이 선포된 것으로 본다. 이 경우 해당 안건은 바로 다음 회기에서 지체 없이 표결하여야 한다.


23일 본회의장에서 민주당과 한국당이 '회기 결정의 건'으로 다퉜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23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문희상 국회의장에게 항의하고 있다.자유한국당 의원들이 23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문희상 국회의장에게 항의하고 있다.

임시회 회기가 끝남과 동시에 선거법 필리버스터가 자동 종료되고, 바로 다음 임시회 땐 선거법 표결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본회의에선 이번 회기가 25일까지로 의결됐습니다. 다음 임시회는 26일 열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국당의 필리버스터 작전을, 민주당은 임시회 쪼개기로 무력화한 셈입니다.

이번엔 수정안 5백여 개 '무더기' 제출

한국당의 또 다른 고민, 필리버스터를 신청할 수 없는 법도 있다는 겁니다.

지난 10일, 그래서 한국당이 막을 수 없었던 내년도 예산안, 그리고 아직 처리되지 못한 예산부수법안이 그렇습니다.

국회법 제106조의2(무제한토론의 실시 등)
⑩ 예산안등과 제85조의3제4항에 따라 지정된 세입예산안 부수 법률안에 대해서는 제1항부터 제9항까지를 매년 12월 1일까지 적용하고, 같은 항에 따라 실시 중인 무제한토론, 계속 중인 본회의, 제출된 무제한토론의 종결동의에 대한 심의절차 등은 12월 1일 밤 12시에 종료한다.


그래서 고안한 한국당의 지연작전, 바로 22건의 예산부수법안에 무더기 수정안을 제출하는 겁니다.

국회법상, 수정안은 원안보다 먼저 표결하게 돼 있습니다.

필리버스터를 신청할 수 없다면, 수정안을 여러건 제출해 의사 진행을 최대한 늦춰보겠다는 계산입니다.

한국당은 23일, 예산부수법안 22건에 모두 532건의 수정안을 제출했습니다.

자유한국당 심재철 원내대표가 23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자유한국당 심재철 원내대표가 23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예산부수법안 중 하나인 '주세법 개정안'의 수정안 두 개를 살펴봤습니다.

나경원 의원 외 한국당 의원 29명이 발의한 수정안의 수정 이유 및 주요내용, "맥주: 1㎘당 830,300원을 1㎘당 830, 287원으로 조정하는 것이 합리적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김한표 의원 외 한국당 의원 29명이 발의한 수정안에는 "맥주: 1㎘당 830,300원을 1㎘당 830, 289원으로 조정하는 것이 합리적임"이라고 돼 있습니다.

자유한국당이 예산부수법안인 ‘주세법 개정안’에 제출한 수정안 목록 일부,자유한국당이 예산부수법안인 ‘주세법 개정안’에 제출한 수정안 목록 일부,

뭐가 달라졌는지 보이십니까? 다른 수정안도 대부분 이런 형태였습니다.

국회 선진화법의 부작용?…몸으로 못 막으니 머리로

하지만 민주당은 23일 예산부수법안 2개를 통과시켰습니다.

한국당이 법안마다 수정안을 수십 개씩 제출했는데, 어떻게 통과시킨 걸까요?

문희상 국회의장이 23일 국회 본회의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문희상 국회의장이 23일 국회 본회의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같은 의제에 대해 여러 건의 수정안이 제출됐을 땐, 가장 늦게 제출된 수정안부터 먼저 표결한다는 국회법을 활용한 겁니다.

가장 늦게 제출된 민주당의 수정안이 먼저 가결되면, 앞서 한국당이 제출한 수정안 수십 건은 표결 절차에 들어가지 않고, 지연작전도 먹히지 않게 되니까요.

민주당은 이런 방식으로 예산부수법안 2개를 통과시킨 뒤, 의사 일정상 27번이었던 선거법 개정안을 앞으로 당겨 상정시키기 위해 의사일정 변경의 건을 신청해 표결에 부쳤습니다.

한국당은 '꼼수'라며 강하게 항의했고, 지금 이 시각까지 본회의장에선 선거법 필리버스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취재 도중 만난 국회 관계자는 "이번엔 일회용 작전이 통했을지 모르지만, 다음부턴 상대 당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엄청 치열한 눈치싸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에서 '007작전'이 벌어지는 동안, 국회 사무처는 수정안 5백 개를 헤아리느라 지치고, 민생법안 처리를 기다리는 국민들은 속이 타들어 가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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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심야심] 꼼수에 꼼수…‘007 작전’ 방불케한 본회의장
    • 입력 2019-12-24 17:51:28
    • 수정2019-12-24 17:53:01
    여심야심
'전례 없던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요즘 국회는, 그렇게 하루하루 새로운 전례를 만들고 있습니다.

'4+1 협의체'의 선거법 수정안이 상정됐던 23일 국회 본회의장도 그랬습니다.

'007작전'을 방불케 했던 그 날, 누구는 '꼼수'라고, 누구는 '전략'이라고 하는 작전, 어떤 게 있었는지 살펴봤습니다.

시작은 필리버스터

무엇이 꼼수이고, 무엇이 전략인지는 따져 묻지 않겠습니다.

전례가 없는, 그래서 이례적이라고 볼 수 있는 '작전'으로 통칭한다면, 시작은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의 선거법 개정안, 올봄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뒤 숙려기간을 가득 채우고, 지난달 27일 본회의에 자동 부의됐습니다.

민주당을 비롯한 '4+1 협의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자, 한국당 당시 나경원 원내대표가 이틀 뒤 무제한 토론, 즉 필리버스터를 신청합니다.

지난달 27일, 자유한국당 전 원내대표 나경원 의원이 당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한국당이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는 선거법이 상정됐을 때 필리버스터를 신청할 것이라는 건 민주당에겐 상수였습니다.

변수는 한국당이 여야 이견이 없던 비쟁점법안에까지 '모두', 그리고 '미리'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상대 당의 허를 찌른 첫 번째 '작전'입니다.

필리버스터는 '임시회 쪼개기'로

민주당은 고민에 빠집니다. 한국당이 199개 안건에 신청한 필리버스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또, 이후에 추가로 들어올 필리버스터 신청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가 23일 당 원내대책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국회법상 합법적 의사진행 발언인 필리버스터를 끝내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재적 의원 5분의 3 이상의 표를 모아 종결동의안을 통과시키면 되는데, 표를 힘들게 끌어모은다고 해도, 안건 하나당 24시간 뒤에 표결할 수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안건 199개에 필리버스터가 걸렸으니, 199일이 걸린다는 이야깁니다. 불가능합니다.

나머지 하나, 바로 회기를 끝내고 다음 회기에 처리하는 겁니다.

국회법 제106조의2(무제한토론의 실시 등)
⑧ 무제한토론을 실시하는 중에 해당 회기가 끝나는 경우에는 무제한토론의 종결이 선포된 것으로 본다. 이 경우 해당 안건은 바로 다음 회기에서 지체 없이 표결하여야 한다.


23일 본회의장에서 민주당과 한국당이 '회기 결정의 건'으로 다퉜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23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문희상 국회의장에게 항의하고 있다.
임시회 회기가 끝남과 동시에 선거법 필리버스터가 자동 종료되고, 바로 다음 임시회 땐 선거법 표결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본회의에선 이번 회기가 25일까지로 의결됐습니다. 다음 임시회는 26일 열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국당의 필리버스터 작전을, 민주당은 임시회 쪼개기로 무력화한 셈입니다.

이번엔 수정안 5백여 개 '무더기' 제출

한국당의 또 다른 고민, 필리버스터를 신청할 수 없는 법도 있다는 겁니다.

지난 10일, 그래서 한국당이 막을 수 없었던 내년도 예산안, 그리고 아직 처리되지 못한 예산부수법안이 그렇습니다.

국회법 제106조의2(무제한토론의 실시 등)
⑩ 예산안등과 제85조의3제4항에 따라 지정된 세입예산안 부수 법률안에 대해서는 제1항부터 제9항까지를 매년 12월 1일까지 적용하고, 같은 항에 따라 실시 중인 무제한토론, 계속 중인 본회의, 제출된 무제한토론의 종결동의에 대한 심의절차 등은 12월 1일 밤 12시에 종료한다.


그래서 고안한 한국당의 지연작전, 바로 22건의 예산부수법안에 무더기 수정안을 제출하는 겁니다.

국회법상, 수정안은 원안보다 먼저 표결하게 돼 있습니다.

필리버스터를 신청할 수 없다면, 수정안을 여러건 제출해 의사 진행을 최대한 늦춰보겠다는 계산입니다.

한국당은 23일, 예산부수법안 22건에 모두 532건의 수정안을 제출했습니다.

자유한국당 심재철 원내대표가 23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예산부수법안 중 하나인 '주세법 개정안'의 수정안 두 개를 살펴봤습니다.

나경원 의원 외 한국당 의원 29명이 발의한 수정안의 수정 이유 및 주요내용, "맥주: 1㎘당 830,300원을 1㎘당 830, 287원으로 조정하는 것이 합리적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김한표 의원 외 한국당 의원 29명이 발의한 수정안에는 "맥주: 1㎘당 830,300원을 1㎘당 830, 289원으로 조정하는 것이 합리적임"이라고 돼 있습니다.

자유한국당이 예산부수법안인 ‘주세법 개정안’에 제출한 수정안 목록 일부,
뭐가 달라졌는지 보이십니까? 다른 수정안도 대부분 이런 형태였습니다.

국회 선진화법의 부작용?…몸으로 못 막으니 머리로

하지만 민주당은 23일 예산부수법안 2개를 통과시켰습니다.

한국당이 법안마다 수정안을 수십 개씩 제출했는데, 어떻게 통과시킨 걸까요?

문희상 국회의장이 23일 국회 본회의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같은 의제에 대해 여러 건의 수정안이 제출됐을 땐, 가장 늦게 제출된 수정안부터 먼저 표결한다는 국회법을 활용한 겁니다.

가장 늦게 제출된 민주당의 수정안이 먼저 가결되면, 앞서 한국당이 제출한 수정안 수십 건은 표결 절차에 들어가지 않고, 지연작전도 먹히지 않게 되니까요.

민주당은 이런 방식으로 예산부수법안 2개를 통과시킨 뒤, 의사 일정상 27번이었던 선거법 개정안을 앞으로 당겨 상정시키기 위해 의사일정 변경의 건을 신청해 표결에 부쳤습니다.

한국당은 '꼼수'라며 강하게 항의했고, 지금 이 시각까지 본회의장에선 선거법 필리버스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취재 도중 만난 국회 관계자는 "이번엔 일회용 작전이 통했을지 모르지만, 다음부턴 상대 당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엄청 치열한 눈치싸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에서 '007작전'이 벌어지는 동안, 국회 사무처는 수정안 5백 개를 헤아리느라 지치고, 민생법안 처리를 기다리는 국민들은 속이 타들어 가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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