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심야심] 올해부터 죄지어도 무죄(?)라고?

입력 2020.01.0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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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 '밀린 숙제'가 어디 한두 가지겠습니까마는, 유독 더 급한 숙제도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로부터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법들을 바꾸는 일입니다.

이 경우에는 개정 시한이 있기 때문에, 국회는 헌재가 정한 날짜까지 개정안을 통과시켜야 합니다.

법을 못 바꾸고 개정 시한을 넘기면,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법 조항은 효력을 잃게 돼 이를 근거로 한 형사 처벌과 행정 절차가 마비될 수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31일까지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국회가 바꿔야 하는 법들은 6건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 '데드라인'을 지킨 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를 허용하는 병역법 개정안과 형사 사건 즉시항고 기간을 3일에서 7일로 늘린 형사소송법 개정안, 2건이었습니다.

이마저도 시한을 나흘 앞두고 지난달 27일 본회의에서 '허겁지겁' 통과됐습니다.

국무회의 의결과 공포·시행 시점을 감안하면 사실 국회가 숙제를 제대로 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더 큰 문제는 개정 시한을 넘기고도 묵혀둔 개정안이 아직도 4건이나 있다는 겁니다.

국회의 '직무유기'로 이제부터 마음껏(?) 저지를 수 있는 불법 행위나 예상되는 불편한 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지난해 12월 31일 개정 시한을 넘긴 헌법 불합치 법률들지난해 12월 31일 개정 시한을 넘긴 헌법 불합치 법률들

국회 100m 이내에서 집회 가능해져…손 놓은 국회

국회 100m 이내에서 집회 시위를 금지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11조 1항은 어제(1일)부터 효력을 잃었습니다.

헌재는 지난 2018년 5월 집시법 11조 1항에 대해 "집회 자유에 대한 과도한 침해"라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국회에 대체 입법을 주문했습니다.

하지만 여야 대치 국면이 길어지며 집시법 개정안은 담당 상임위(행정안전위원회)에 묶여 있습니다.

국회 상황을 고려하면 입법 공백 상태는 한동안 계속될 가능성이 큽니다.

여태껏 국회 주변 집회는 국회 정문 앞 100m 거리를 두고 벌어졌습니다.

시위대가 국회로부터 꽤 떨어진 거리이다 보니, 경찰은 그 사이에 경찰 버스와 장애물 등을 배치하는 형식으로 국회 난입에 대비해 왔습니다.

그런데 관련 헌법재판소가 정한 대체입법 시한이 지나면서, 이 빗장은 국회가 새로운 법을 통과시키기 전까지 풀려버린 셈이 되어 버렸습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무조건적으로 100m 이내 시위를 금지하기 보다는 예외 조항을 둬서, 국회 근처 집회와 시위는 허용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상임위에 계류된 개정안도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인정하되, 국회 기능과 업무를 저해시킬 경우에는 주변 집회와 시위를 금지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아직 세부 지침은 정해진 것이 없다"면서도 "국회가 빨리 법 개정을 하는 게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난달 16일 국회 경내로 진입해 시위를 벌인 보수단체 [사진 출처 : 연합뉴스]지난달 16일 국회 경내로 진입해 시위를 벌인 보수단체 [사진 출처 : 연합뉴스]

'DNA 수사' 제동…미제사건 수사 난항 우려

2010년 시행된 DNA 법은 살인과 성폭력 등 재범 위험이 큰 11개군 형 확정자 등의 DNA를 채취해 보관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33년간 베일에 싸여있던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법입니다.

범죄현장에서 채취한 용의자의 DNA가 경찰 데이터베이스(DB)에 등록된 범죄자의 DNA와 일치하는 경우도 연간 수백 건이 넘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DNA법은 2018년 8월 헌재로부터 의견 진술 기회나 불복 절차가 없다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았습니다.

개정 시한을 넘어 해가 바뀌면서 어제(1일)부터 형 확정자의 DNA를 채취할 근거가 사라졌습니다.

DNA 채취가 줄어들면 수사 기관의 미제사건 수사에도 타격이 불가피합니다.

이낙연 총리는 지난달 30일 국무회의에서 "DNA법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범죄 피의자가 동의하지 않는 한 중요한 수사 정보가 되는 DNA도 채취할 수 없다"며 국회에 조속한 법안 처리를 촉구했습니다.

 ‘DNA 수사’로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이춘재 [사진 출처 : 연합뉴스] ‘DNA 수사’로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이춘재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국회에 묶인 세무사법 개정안…'세금 신고 대란' 오나?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지난달 11월 29일 세무사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개정안이 시행되려면 국회 법사위와 본회의를 통과해야 하는데, 법안은 법사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2018년 4월 헌재는 2004년부터 2017년까지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사람에게 세무사 자격을 주지만(2018년 이후 변호사가 된 사람들에게는 세무사 자격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세무사 등록은 못 하게 한 규정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변호사도 세무사와 비슷한 전문성이 있으며,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취지였습니다.

개정안은 2004년부터 2017년까지 변호사가 된 사람에게 세무 업무 등록이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만, 세무 업무 8개 중 2개(회계장부작성, 성실신고확인)는 변호사에게 허용하지 않고 있는데, 대한변호사협회는 그 점을 문제 삼고 있어서 갈등 요소는 남아있습니다.

변호사와 세무사 간의 밥그릇 싸움 같았던 문제인데,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튀게 됐습니다.

세무사 등록 규정이 해가 바뀌며 효력을 잃게 되면서, 새로 등록을 하려는 세무사, 기존 등록 세무사, 세무사 자격이 있는 변호사 등이 어디까지 세무 업무를 할 수 있는지 모호해진 겁니다.

당장 올해 2월 법인세 신고, 5월 소득세 신고를 할 때 혼란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박태형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문위원은 KBS와의 통화에서 "세입 69조 원에 달하는 2020년 법인세·소득세의 세무신고와 세금 납부의 원활한 업무처리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노조 운영비 지원 금지' 노사분쟁 소지 우려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노조법 81조에 대한 개정안도 국회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해당 조항은 사용자가 노조 운영비를 원조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2018년 5월 "운영비 원조 행위가 노조의 자주성을 저해할 위험이 없는 경우에는 이를 금지하더라도 노조의 자주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입법 목적 달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노조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올해 단체교섭에서 노사분쟁 소지가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김가을 노무사는 "헌재의 결정 취지는 노사가 협상을 통해 자율적으로 정한 사항을 과도하게 처벌하면 오히려 노조 활동이 위축된다는 이유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김 노무사는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지원 가능한 운영비의 범위를 놓고 노사가 힘겨루기할 수도 있고, 복수 노조가 있는 사업장의 경우 특정 노조에 운영비를 몰아줘 '어용 노조'가 생기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국회 '직무유기' 계속…회초리 맞아도 싼 국회

문제는 이런 국회의 '직무유기'가 연초에도 계속될 것 같다는 겁니다.

의원직 총사퇴를 선언한 한국당은 필리버스터를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이고, 총선 준비에 들어간 민주당은 민생법안 처리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학창 시절, 숙제를 안 해 가면 회초리를 맞곤 했습니다.

밀린 숙제를 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또 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안 한 국회에 시민들은 회초리를 들고 싶은 심정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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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심야심] 올해부터 죄지어도 무죄(?)라고?
    • 입력 2020-01-03 08:00:28
    여심야심
국회의 '밀린 숙제'가 어디 한두 가지겠습니까마는, 유독 더 급한 숙제도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로부터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법들을 바꾸는 일입니다.

이 경우에는 개정 시한이 있기 때문에, 국회는 헌재가 정한 날짜까지 개정안을 통과시켜야 합니다.

법을 못 바꾸고 개정 시한을 넘기면,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법 조항은 효력을 잃게 돼 이를 근거로 한 형사 처벌과 행정 절차가 마비될 수 있습니다.

지난해 12월 31일까지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국회가 바꿔야 하는 법들은 6건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 '데드라인'을 지킨 건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를 허용하는 병역법 개정안과 형사 사건 즉시항고 기간을 3일에서 7일로 늘린 형사소송법 개정안, 2건이었습니다.

이마저도 시한을 나흘 앞두고 지난달 27일 본회의에서 '허겁지겁' 통과됐습니다.

국무회의 의결과 공포·시행 시점을 감안하면 사실 국회가 숙제를 제대로 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더 큰 문제는 개정 시한을 넘기고도 묵혀둔 개정안이 아직도 4건이나 있다는 겁니다.

국회의 '직무유기'로 이제부터 마음껏(?) 저지를 수 있는 불법 행위나 예상되는 불편한 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지난해 12월 31일 개정 시한을 넘긴 헌법 불합치 법률들
국회 100m 이내에서 집회 가능해져…손 놓은 국회

국회 100m 이내에서 집회 시위를 금지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11조 1항은 어제(1일)부터 효력을 잃었습니다.

헌재는 지난 2018년 5월 집시법 11조 1항에 대해 "집회 자유에 대한 과도한 침해"라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국회에 대체 입법을 주문했습니다.

하지만 여야 대치 국면이 길어지며 집시법 개정안은 담당 상임위(행정안전위원회)에 묶여 있습니다.

국회 상황을 고려하면 입법 공백 상태는 한동안 계속될 가능성이 큽니다.

여태껏 국회 주변 집회는 국회 정문 앞 100m 거리를 두고 벌어졌습니다.

시위대가 국회로부터 꽤 떨어진 거리이다 보니, 경찰은 그 사이에 경찰 버스와 장애물 등을 배치하는 형식으로 국회 난입에 대비해 왔습니다.

그런데 관련 헌법재판소가 정한 대체입법 시한이 지나면서, 이 빗장은 국회가 새로운 법을 통과시키기 전까지 풀려버린 셈이 되어 버렸습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무조건적으로 100m 이내 시위를 금지하기 보다는 예외 조항을 둬서, 국회 근처 집회와 시위는 허용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상임위에 계류된 개정안도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인정하되, 국회 기능과 업무를 저해시킬 경우에는 주변 집회와 시위를 금지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아직 세부 지침은 정해진 것이 없다"면서도 "국회가 빨리 법 개정을 하는 게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난달 16일 국회 경내로 진입해 시위를 벌인 보수단체 [사진 출처 : 연합뉴스]
'DNA 수사' 제동…미제사건 수사 난항 우려

2010년 시행된 DNA 법은 살인과 성폭력 등 재범 위험이 큰 11개군 형 확정자 등의 DNA를 채취해 보관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33년간 베일에 싸여있던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법입니다.

범죄현장에서 채취한 용의자의 DNA가 경찰 데이터베이스(DB)에 등록된 범죄자의 DNA와 일치하는 경우도 연간 수백 건이 넘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DNA법은 2018년 8월 헌재로부터 의견 진술 기회나 불복 절차가 없다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았습니다.

개정 시한을 넘어 해가 바뀌면서 어제(1일)부터 형 확정자의 DNA를 채취할 근거가 사라졌습니다.

DNA 채취가 줄어들면 수사 기관의 미제사건 수사에도 타격이 불가피합니다.

이낙연 총리는 지난달 30일 국무회의에서 "DNA법이 통과되지 않을 경우 범죄 피의자가 동의하지 않는 한 중요한 수사 정보가 되는 DNA도 채취할 수 없다"며 국회에 조속한 법안 처리를 촉구했습니다.

 ‘DNA 수사’로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이춘재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국회에 묶인 세무사법 개정안…'세금 신고 대란' 오나?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지난달 11월 29일 세무사법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개정안이 시행되려면 국회 법사위와 본회의를 통과해야 하는데, 법안은 법사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2018년 4월 헌재는 2004년부터 2017년까지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사람에게 세무사 자격을 주지만(2018년 이후 변호사가 된 사람들에게는 세무사 자격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세무사 등록은 못 하게 한 규정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변호사도 세무사와 비슷한 전문성이 있으며,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취지였습니다.

개정안은 2004년부터 2017년까지 변호사가 된 사람에게 세무 업무 등록이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만, 세무 업무 8개 중 2개(회계장부작성, 성실신고확인)는 변호사에게 허용하지 않고 있는데, 대한변호사협회는 그 점을 문제 삼고 있어서 갈등 요소는 남아있습니다.

변호사와 세무사 간의 밥그릇 싸움 같았던 문제인데,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튀게 됐습니다.

세무사 등록 규정이 해가 바뀌며 효력을 잃게 되면서, 새로 등록을 하려는 세무사, 기존 등록 세무사, 세무사 자격이 있는 변호사 등이 어디까지 세무 업무를 할 수 있는지 모호해진 겁니다.

당장 올해 2월 법인세 신고, 5월 소득세 신고를 할 때 혼란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박태형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문위원은 KBS와의 통화에서 "세입 69조 원에 달하는 2020년 법인세·소득세의 세무신고와 세금 납부의 원활한 업무처리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노조 운영비 지원 금지' 노사분쟁 소지 우려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은 노조법 81조에 대한 개정안도 국회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해당 조항은 사용자가 노조 운영비를 원조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2018년 5월 "운영비 원조 행위가 노조의 자주성을 저해할 위험이 없는 경우에는 이를 금지하더라도 노조의 자주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입법 목적 달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노조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올해 단체교섭에서 노사분쟁 소지가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김가을 노무사는 "헌재의 결정 취지는 노사가 협상을 통해 자율적으로 정한 사항을 과도하게 처벌하면 오히려 노조 활동이 위축된다는 이유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김 노무사는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지원 가능한 운영비의 범위를 놓고 노사가 힘겨루기할 수도 있고, 복수 노조가 있는 사업장의 경우 특정 노조에 운영비를 몰아줘 '어용 노조'가 생기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국회 '직무유기' 계속…회초리 맞아도 싼 국회

문제는 이런 국회의 '직무유기'가 연초에도 계속될 것 같다는 겁니다.

의원직 총사퇴를 선언한 한국당은 필리버스터를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이고, 총선 준비에 들어간 민주당은 민생법안 처리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학창 시절, 숙제를 안 해 가면 회초리를 맞곤 했습니다.

밀린 숙제를 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또 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안 한 국회에 시민들은 회초리를 들고 싶은 심정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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