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7분의 기적’…출근길 마주친 화재, 당신의 선택은?

입력 2020.01.05 (10:00) 수정 2020.01.05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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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분의 기적'… 어떻게 가능했을까

2018년 11월 17일 새벽 5시 45분, 경기도 군포의 인적 드문 골목길. 김재천 씨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길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매일 걷던 이 길이 오늘 뭔가 좀 이상합니다. 자주 지나치던 횟집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고 있습니다. 소화기도 없는 데다 불을 끄려면 잠긴 문도 부숴야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래 사진을 보시죠. 김재천 씨가 불타는 횟집을 발견하고 뛰어온 직후입니다. 김 씨 눈에 들어온 건 횟집 앞 '수조'였습니다. 수조 위 덮개를 들어내고 소라 더미를 모아놓은 그물망을 끄집어냈습니다. 김 씨는 이 망을 집어 들고 맨손으로 유리창을 향해 있는 힘껏 내려쳤습니다.

출근길에 발견한 식당 화재를 진압 중인 김재천 씨출근길에 발견한 식당 화재를 진압 중인 김재천 씨

한 손엔 신고 전화, 한 손엔 소라 더미. 힘차게 내려치기를 수차례. 마침내 단단한 출입문에 균열이 생깁니다. 김 씨는 스티로폼으로 수조에 있던 물을 쉴 새 없이 퍼부으며 자체 화재 진압을 시도합니다. 거센 불길이 신기하게도 수그러들었고 소방차가 도착하기도 전 모두 꺼졌습니다. 불과 7분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김 씨는 이 일로 손의 인대를 다쳤습니다.

'87명 사상' 사우나 화재…"대피할 수 있었지만"

대구 중구에 사는 이재만 씨 이야기도 들어보시죠. 2019년 2월 19일, 아침 7시 10분. 이 씨는 평소와 다름없이 일찍 사우나를 마치고 휴게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났습니다. "무슨 냄새지?" 이때 누군가 문을 열고 다급하게 뛰어들어옵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이 씨 눈에 들어온 건 입구를 가로막는 거대한 불길이었습니다.

함께 있던 다른 사람은 먼저 뛰어 나갔습니다. 이재만 씨도 따라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수면실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깨워야지 나 혼자 갈 수 있나' 그대로 수면실로 뛰어가 외칩니다. "불이야!" 헬스장에서 운동하던 사람들에게도 나오라고 알립니다. 탕 안으로 들어가 다시 한 번 소리칩니다. 마지막, 건습식 사우나를 확인하고 나오려던 찰나. 천장이 무너집니다.

이재만 씨는 그대로 갇혀버렸습니다.

"좀 지나니까 아.. 제천사고가 생각났어요. 가족들과 통화하면서도 진화가 안 돼서 결국 그렇게 참변을 당했는데 내가 그런 상황이 됐다. 내가 죽는 게 이렇게 죽는 거구나"

30분간 공포에 떨었던 이재만 씨. 어느 순간 불길이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두려움을 안고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보니 어느새 소방이 출동해 입구에서 물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출입구가 확보된 이 씨는 그대로 밖으로 뛰어 나갔고 그렇게 탈출했습니다. 연기를 마신 이 씨는 병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사우나에 갇혔다가 뒤늦게 탈출한 이재만 씨사우나에 갇혔다가 뒤늦게 탈출한 이재만 씨

비탈길 내려오던 차량을 온몸으로…"전치 12주"

전라남도 진도군청에서 세무공무원으로 일하는 황창연 씨. 2018년 5월 28일, 오후 6시가 넘어 퇴근하고 5분 거리인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집 근처에 다다르자 무언가 시끌시끌합니다. 아파트 입구에서 서서히 뒤로 후진해 내려오는 SUV 차량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뒷좌석에는 아이들도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아래쪽에 도로가 있어 자칫 인명사고가 날 수도 있었죠.



"차가 밀리고 있는데 내려오면 큰 사고 일어나잖아요. 깜짝 놀랐죠. 머리가 하얘지더라고요."

'차를 세워야겠다' 황창연 씨는 차를 세워두고 곧장 뛰어갔습니다. SUV 차량의 사이드 브레이크를 밟고 기어를 주차모드로 바꾸는 순간, 운전석에 걸치고 있던 몸이 차 밖으로 튕겨 나갔습니다. 몸을 구른 황 씨. 차 문 아래쪽에 등이 찍히며 척추와 갈비뼈 등에 부상을 입고 전치 12주 진단을 받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병원 입원 기간, 장인어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에도 가지 못하는 이중고를 겪었습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세 사례. 모두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 보통 사람의 모습입니다. 흔히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 '측은지심'이 사람들 모두에게 있다고 하죠. 타인의 고통을 모른 채 지나갈 수 없다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자기 몸을 다칠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타인을 도우려고 뛰어드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분들을 '의인'이라 칭하고 그 행위에 감사함을 표합니다.


세 분들은 모두 정부가 선정한 지난해 의사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2019년 한해, 이처럼 이웃을 위해 의로운 행동을 하다 숨진 '의사자'는 8명, 다친 사람 '의상자'는 9명입니다.

뉴스만 틀면 세상은 온통 어두워 마치 살아갈 수 없는 곳 같습니다. 새해를 맞아 이런 의인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건 그래도 '선한 영향력'으로 주변에 적잖은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 그리고 날로 심화하는 개인주의 세태 속에서도 주변 이웃들을 한 번쯤 돌아보며 살자는 의인들의 소박한 바람을 전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2020년은 조금은 더 따뜻한 사회가 되길 바라봅니다.

[연관 기사] CCTV로 보는 2019 의인 “함께 사는 세상, 누구라도 그랬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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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7분의 기적’…출근길 마주친 화재, 당신의 선택은?
    • 입력 2020-01-05 10:00:15
    • 수정2020-01-05 10:03:53
    취재후·사건후
'7분의 기적'… 어떻게 가능했을까

2018년 11월 17일 새벽 5시 45분, 경기도 군포의 인적 드문 골목길. 김재천 씨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길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매일 걷던 이 길이 오늘 뭔가 좀 이상합니다. 자주 지나치던 횟집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고 있습니다. 소화기도 없는 데다 불을 끄려면 잠긴 문도 부숴야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래 사진을 보시죠. 김재천 씨가 불타는 횟집을 발견하고 뛰어온 직후입니다. 김 씨 눈에 들어온 건 횟집 앞 '수조'였습니다. 수조 위 덮개를 들어내고 소라 더미를 모아놓은 그물망을 끄집어냈습니다. 김 씨는 이 망을 집어 들고 맨손으로 유리창을 향해 있는 힘껏 내려쳤습니다.

출근길에 발견한 식당 화재를 진압 중인 김재천 씨
한 손엔 신고 전화, 한 손엔 소라 더미. 힘차게 내려치기를 수차례. 마침내 단단한 출입문에 균열이 생깁니다. 김 씨는 스티로폼으로 수조에 있던 물을 쉴 새 없이 퍼부으며 자체 화재 진압을 시도합니다. 거센 불길이 신기하게도 수그러들었고 소방차가 도착하기도 전 모두 꺼졌습니다. 불과 7분 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김 씨는 이 일로 손의 인대를 다쳤습니다.

'87명 사상' 사우나 화재…"대피할 수 있었지만"

대구 중구에 사는 이재만 씨 이야기도 들어보시죠. 2019년 2월 19일, 아침 7시 10분. 이 씨는 평소와 다름없이 일찍 사우나를 마치고 휴게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났습니다. "무슨 냄새지?" 이때 누군가 문을 열고 다급하게 뛰어들어옵니다. 문이 열리는 순간, 이 씨 눈에 들어온 건 입구를 가로막는 거대한 불길이었습니다.

함께 있던 다른 사람은 먼저 뛰어 나갔습니다. 이재만 씨도 따라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수면실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깨워야지 나 혼자 갈 수 있나' 그대로 수면실로 뛰어가 외칩니다. "불이야!" 헬스장에서 운동하던 사람들에게도 나오라고 알립니다. 탕 안으로 들어가 다시 한 번 소리칩니다. 마지막, 건습식 사우나를 확인하고 나오려던 찰나. 천장이 무너집니다.

이재만 씨는 그대로 갇혀버렸습니다.

"좀 지나니까 아.. 제천사고가 생각났어요. 가족들과 통화하면서도 진화가 안 돼서 결국 그렇게 참변을 당했는데 내가 그런 상황이 됐다. 내가 죽는 게 이렇게 죽는 거구나"

30분간 공포에 떨었던 이재만 씨. 어느 순간 불길이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두려움을 안고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보니 어느새 소방이 출동해 입구에서 물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출입구가 확보된 이 씨는 그대로 밖으로 뛰어 나갔고 그렇게 탈출했습니다. 연기를 마신 이 씨는 병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사우나에 갇혔다가 뒤늦게 탈출한 이재만 씨
비탈길 내려오던 차량을 온몸으로…"전치 12주"

전라남도 진도군청에서 세무공무원으로 일하는 황창연 씨. 2018년 5월 28일, 오후 6시가 넘어 퇴근하고 5분 거리인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집 근처에 다다르자 무언가 시끌시끌합니다. 아파트 입구에서 서서히 뒤로 후진해 내려오는 SUV 차량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뒷좌석에는 아이들도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아래쪽에 도로가 있어 자칫 인명사고가 날 수도 있었죠.



"차가 밀리고 있는데 내려오면 큰 사고 일어나잖아요. 깜짝 놀랐죠. 머리가 하얘지더라고요."

'차를 세워야겠다' 황창연 씨는 차를 세워두고 곧장 뛰어갔습니다. SUV 차량의 사이드 브레이크를 밟고 기어를 주차모드로 바꾸는 순간, 운전석에 걸치고 있던 몸이 차 밖으로 튕겨 나갔습니다. 몸을 구른 황 씨. 차 문 아래쪽에 등이 찍히며 척추와 갈비뼈 등에 부상을 입고 전치 12주 진단을 받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병원 입원 기간, 장인어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에도 가지 못하는 이중고를 겪었습니다.

앞서 소개해드린 세 사례. 모두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 보통 사람의 모습입니다. 흔히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 '측은지심'이 사람들 모두에게 있다고 하죠. 타인의 고통을 모른 채 지나갈 수 없다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자기 몸을 다칠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타인을 도우려고 뛰어드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분들을 '의인'이라 칭하고 그 행위에 감사함을 표합니다.


세 분들은 모두 정부가 선정한 지난해 의사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2019년 한해, 이처럼 이웃을 위해 의로운 행동을 하다 숨진 '의사자'는 8명, 다친 사람 '의상자'는 9명입니다.

뉴스만 틀면 세상은 온통 어두워 마치 살아갈 수 없는 곳 같습니다. 새해를 맞아 이런 의인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건 그래도 '선한 영향력'으로 주변에 적잖은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 그리고 날로 심화하는 개인주의 세태 속에서도 주변 이웃들을 한 번쯤 돌아보며 살자는 의인들의 소박한 바람을 전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2020년은 조금은 더 따뜻한 사회가 되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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