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민 라이브] 도올 김용옥 “여순사건, 냉전질서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건으로 다시 인식돼야”

입력 2020.01.20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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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자료의 저작권은 KBS라디오에 있습니다.
전문 게재나 인터뷰 인용 보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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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자 72년 만의 무죄 판결.. 김정아 부장판사 눈물에 크게 감동해
- 여순사건, 냉전질서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건으로 다시 인식돼야
- 아직 제대로 숨 못 쉬고 있는 남은 피해자들 위해 여순사건 특별법 마련해야

■ 프로그램명 : 김용민 라이브
■ 코너명 : 〈쏙 인터뷰〉
■ 방송시간 : 1월 20일 (월) 17:25~17:42 KBS1R FM 97.3 MHz
■ 출연자 : 도올 김용옥 석좌교수 (한신대)



◇김용민: 72년 전 여수순천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의심을 받고 무고하게 희생당한 민간인 희생자가 있었습니다. 희생자의 딸이 재심을 신청했고 오늘 법원은 민간인 희생자들에게 무죄를 선고 했습니다.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되는 순간 희생자의 부인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재판부는 여순사건 판결에 집행이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히며 깊이 사과드린다. 이렇게 입장을 밝혔는데요. 72년 만의 여순사건 무죄선고의 의미. 도올 김용옥 선생 연결해서 이야기 들어보겠습니다. 도올 선생님 나와 계시죠?

◆김용옥: 네.

◇김용민: 네, 선생님. 오랜만에 이렇게 연결하게 됩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김용옥: 네. 최근에는 제가 전남에 가서 도올인재학당이라는 곳을 운영해서 거기서 전라남도에 새로운 조형문화를 일으키고 돌아왔습니다.

◇김용민: 다산선생의 대를 이으시는군요. 여순사건 재심 재판에서 첫 번째 무죄 선고가 나왔습니다. 여순사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순반란사건. 이렇게 불려왔고 또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분들이 종종 있더라고요. 이미 70년도 지난 1948년 전라남도 여수와 순천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인데요. 우리 선생님은 여순민중항쟁이라고 표하시더라고요.

◆김용옥: 네.

◇김용민: 이 사건을 선생님은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김용옥: 제주4.3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는데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더 문제시됐고 해방 후 역사를 통해서 더 우리 삶에 깊게 들어 와있던 이 사건이 여순사건이었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제주사건이 미군정이 제주도민의 자치조직인 인민위원회를 무리하게 탄압하면서 생겨난 불행한 사태인데 이 사태를 진압하는데 제주도에 군인들만 가지고 경찰이나 군인 병력을 가지고 모자라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제일 가까운 여수 신월리에 14연대가 있었는데 이 14연대를 제주토벌에 동원해라. 그래서 토벌 명령이 내려 떨어지니까 그 군인들이 볼 때는 토벌이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반란자로 여겨지는 사람은 즉시 사살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거든요.

◇김용민: 닥치는 대로 죽이기라는 거죠.

◆김용옥: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양심 있는 군인들이 어떻게 군인의 사명은 국토를 지키는 것이지 우리 국가의 인민을 그냥 그렇게 죽이는 일을 우리가 갈 수는 없다. 그래서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반란이라든가 단순한 항명이라든가 이들이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토벌 출동을 거부한다. 그것도 독단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의논해서 병사위원회를 조직해서 문제를 거기에 항거한 거거든요. 우리는 안 가겠다. 못가겠다. 그렇게 한 것을 가지고 우리가 소위 말해서 여순 반란이라고 규정하는데, 사실 이것은 그 군인들의 문제라기보다는 미 군정 하에서 민생이 파탄되었고 거기에 희생된 여수, 순천지역 민중에 분노가 표출된 사건이지 사실은 그 사건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여순민중항쟁이다. 이렇게 해서 제가 그 말을 먼저 쓰니까 그런 말도 쓰는 것을 작년까지만 해도 다들 두려워했어요. 벌벌 떨고. 그래서 제가 ‘우린 너무 몰랐다’ 라는 책을 써서 거기에 이것은 당당한 민중의 항쟁이고 이것은 역사적 새로운 냉전질서에 세계적인 패러다임을 바꾸는 사건으로써 다시 인식되어야 한다. 이것을 말씀드렸던 것이죠.

◇김용민: 여수, 순천에 주민들이 우리가 같은 동포를 죽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제주로 차출되는 것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다. 이렇게 결의를 했고 저항을 한 건데 이것을 그동안 반란이라고 뒤집어 씌워서 비방모략을 해 왔던 것이고 그래서 또 이렇게 희생당한 분들이 감히 자신의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서 호소하는 일조차도 주저했던 지난날들이 있었습니다. ‘우린 너무 몰랐다’ 그 책을 보니까 그 내용도 있었어요. 여수 MBC에서 강연을 마치고 올라가는 길인데 여수 MBC에서 너무 방청객들의 반응이 싸해서 내가 말을 잘못했나? 그런 고민도 하셨다고요.

◆김용옥: 네.

◇김용민: 그러다 여수에서 열차를 타고 올라가시는 길에 주위분들로부터 속마음을 들으셨다고 하셨는데, 그 이야기 좀 해 주세요.

◆김용옥: 그만큼 여순지역에 안 걸린 사람이 없어요, 이 사건에.

◇김용민: 피해를 안 당한 사람들이 없었다?

◆김용옥: 자그마치 피해자들이 정부 공식 발표로 1년 후 발표인데 1만 1031명이 죽었다. 이렇게 나왔거든요.

◇김용민: 1만 1000명이 넘었어요?

◆김용옥: 그런데 사실은 이 여순민주항쟁은 6년 6개월 동안 지속됐고 그동안에 최소한 2만 명은 희생되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남도, 그리고 이게 전라남도만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경상남도 사람들도 여기에 크게 걸려있어요.

◇김용민: 진주 쪽을.

◆김용옥: 네. 그쪽으로 다 이 지리산자락은 다 걸려있거든요. 그래서 이것은 우리나라의 아주 비극적인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 역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런 강고한 우익체제를 구축하게 되는 계기가 된 거죠. 그래서 예비 검속이 이루어지고 연좌제, 보도연맹, 숙군 사업, 반민특위가 무산되고 서북청년단 사람들이 전부 경찰화 하고 이런 우리나라의 이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소위 말해서 빨갱이 때려잡기 식의 문화, 반공우익 체제가 바로 여순민주항쟁을 빌미로 해서 다 강고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죠.

◇김용민: 얼마나 정말 강포하게 탄압을 했는지 70년이 지났는데 피해자, 또 피해자 가족들이 당시 그 피해 사례를 증언하는 것조차 주저했을 정도로 아주 굉장히 눌려왔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선생님께서.

◆김용옥: 그러니까 이러한 사건에 피해라고 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우리가 심리적으로 정말 벌벌 떨게 된 이 사태는 뭐 말할 것도 없지만 그것을 긍정적으로 우리가 표현한다면 동학이 척양척왜를 주장했고, 부국안민을 주장하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저 그냥 왜군의 기관총 아래에서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저항했던 그러한 전통이 여기서 부활된 사건으로 우리가 봐야지 단순히 우리가 당했다. 이렇게만 보면 안 됩니다.

◇김용민: 동학의 맥을 이어가는 여순항쟁이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김용옥: 네.

◇김용민: 그래서 선생님 말씀에 조금만 보론하자면 사실 70년 동안 그렇게 침묵을 강요당해 왔고 그래서 여순항쟁에 대해서 선생님이 설명했을 때 다들 처음에 호응도 못하고 그렇다고 뜨거운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그랬던 것이 너무나 눌려왔기 때문에.

◆김용옥: 나 자신도 이 책을 쓸 적에 이건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우리가 너무 몰랐기 때문에 ‘우린 너무 몰랐다’ 라는 제목 하에서 이 책을 쓴 건데 나 같은 사람도 이 책으로 인해서 고소를 당하고 너무도 아주 내가 정말 정신적으로 고초를 겪었거든요. 그런데 내가 그럴 정도인데 전라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고초를 겪어왔겠느냐. 이것을 내가 정말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고, 그런데 작년이 마침 70주년이었어요. 그래서 여수MBC에 김지홍 PD가 이걸 가지고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여순사건에 대해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고 제가 평소 현대사에 관심이 있으니까, 방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고 그래서 주철희 박사라는 분 그리고 순천대 여순연구소 이런 데에서 나온 모든 자료들이 동원이 돼 제가 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그것만 해도 지금 유튜브에서 7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눈물 흘리면서 봤고 올해에도 구례에서 하는 위령제도 제가 가서 같이 눈물을 흘리고 그랬었습니다.

◇김용민: 선생님, 그런데 아직까지는 우리 사회 일각에서 이것이 공산주의반란 운동이었다. 이렇게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용옥: 그러니까 맨날 이런 것을 무자비한 탄압을 하게 된 것은 트루먼독트린 이례로 냉전질서가 구축되면서 그 집권자들이 미국의 알랑방귀를 뀌기 위해서 무조건 이 브로킹형 논리에서 우리가 생존하려면 아주 완고한 반공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이런 것에서 출발한 거거든요, 이게? 그런데 우리는 전혀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우리가 이해를 못한 거죠. 그래서 사실 앞으로 우리가 추진해야 할 것은 특별법. 반드시 특별법이 제정돼서 제주4.3은 특별법이 통과되었기 때문에 그 공원도 마련되고 모든 사람들이 숨을 쉬고 있는데 우리 전라도, 경상도인. 남도 사람들은 아직도 이거 숨을 못 쉬고 있다는 말이에요, 숨을 못 쉬고. 그래서 특별법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김용민: 장환봉님. 이번에 무죄 선고를 받으신 분인데 이 분에 대해서 재판부가 좌익도 아니고 우익도 아니며, 오로지 국가가 혼란스럽던 시기에도 몸과 마음을 바쳐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고자했던 명예로운 철도 공무원이었다. 이렇게 평가하기도 있는데 장환봉 씨처럼 무고하게 희생당한 민간인들이 상당수 되고 그렇게 희생자들을 다 합쳐보니까 2만 명은 될 것이다. 도올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김용옥: 네.

◇김용민: 특별법이 그분들에 대한 명예회복의 방도로 효과적일지 이 부분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용옥: 장환봉 씨는 그래도 정확한 기록이 남고, 재판 기록이 남았기 때문에 오늘날 제정신청이 가능했던 겁니다. 그런데 기록도 없이 즉결처분되었고, 왜 죽은지도 모르는 그 수없는 사람들이 재심 신청할 기회도 없어요. 기록이 없으니까.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이런 사태에 대해서 장환봉 선생의 따님인 장경자라는 분이 이것은 재심 신청을 할 때부터 저하고도 간접적인 연락이 있었고 오늘 형이 이것에 대한 선고를 받는 이 시점에서 그 자리에 순천지원에 같이 나와 달라. 그런데 내가 가면 너무 내가 포커스를 받으니 그동안 거기에 당사자들을 위한 것으로 하자. 그래서 제가 불락사에 상훈스님이라는 분을 대신 보냈어요. 그런데 상훈스님 그 김정아 부장판사님의 얘기가 감동적인 게 이 판결문을 읽으면서 우시더래요. 그러니까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것을 우리 법원이 이제 와서 70년 후에나 이렇게 한다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통탄할 일인지 모른다. 그러면서 우시더래요. 그러니까 나는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아무리 판사이지만 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으로, 인간된 도리로서 이것은 국가 폭력에 의한 잘못된 일이다. 이러한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그 판사님의 인격이야말로 진보된 민주화된 사회의 틀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는 크게 감동하는 것이죠.

◇김용민: 민간인 학살 관련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많이 만든 구자환 감독 이야기로는 나중에 무릎을 꿇었다고 하더라고요. 김정아 판사가요. 역사와 이렇게 화해하는구나. 라는 생각도 들면서 올해 많은 일들이 많은 기념일들이 있습니다. 4.19혁명 60주년, 5.18운동 40주년, 6.25한국전쟁 70년.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근현대사에서 벌어진 사건들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 선생님, 마지막으로 짧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용옥: 6.25전쟁에 관한 제대로 된 영화 한 편이 없어요. 이건 무슨 이야기냐면 과거라는 건 항상 이런 상황이라는 게 우리한테 계속 반복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러한 문제는 정확하게 우리가 알아야 해요. 기억하고, 평가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또 당한다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래도 대미의식도 상당히 국민적 각성이 높아졌고 트럼프가 아무리 미국의 대통령이라고 해도 그를 인간적인 모든 잘잘못을 민중이 가릴 줄 안단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야말로 앞으로 총선도 다가오는 이 해에 이러한 사건들을 정확히 알자.

◇김용민: 그렇게 요약하겠습니다. 선생님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김용옥: 네.

◇김용민: 도올 김용옥 선생과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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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민 라이브] 도올 김용옥 “여순사건, 냉전질서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건으로 다시 인식돼야”
    • 입력 2020-01-20 20:5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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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순사건, 냉전질서의 패러다임을 바꾼 사건으로 다시 인식돼야
- 아직 제대로 숨 못 쉬고 있는 남은 피해자들 위해 여순사건 특별법 마련해야

■ 프로그램명 : 김용민 라이브
■ 코너명 : 〈쏙 인터뷰〉
■ 방송시간 : 1월 20일 (월) 17:25~17:42 KBS1R FM 97.3 MHz
■ 출연자 : 도올 김용옥 석좌교수 (한신대)



◇김용민: 72년 전 여수순천사건 당시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의심을 받고 무고하게 희생당한 민간인 희생자가 있었습니다. 희생자의 딸이 재심을 신청했고 오늘 법원은 민간인 희생자들에게 무죄를 선고 했습니다.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되는 순간 희생자의 부인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재판부는 여순사건 판결에 집행이 위법한 공권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히며 깊이 사과드린다. 이렇게 입장을 밝혔는데요. 72년 만의 여순사건 무죄선고의 의미. 도올 김용옥 선생 연결해서 이야기 들어보겠습니다. 도올 선생님 나와 계시죠?

◆김용옥: 네.

◇김용민: 네, 선생님. 오랜만에 이렇게 연결하게 됩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김용옥: 네. 최근에는 제가 전남에 가서 도올인재학당이라는 곳을 운영해서 거기서 전라남도에 새로운 조형문화를 일으키고 돌아왔습니다.

◇김용민: 다산선생의 대를 이으시는군요. 여순사건 재심 재판에서 첫 번째 무죄 선고가 나왔습니다. 여순사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순반란사건. 이렇게 불려왔고 또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분들이 종종 있더라고요. 이미 70년도 지난 1948년 전라남도 여수와 순천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인데요. 우리 선생님은 여순민중항쟁이라고 표하시더라고요.

◆김용옥: 네.

◇김용민: 이 사건을 선생님은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김용옥: 제주4.3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는데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더 문제시됐고 해방 후 역사를 통해서 더 우리 삶에 깊게 들어 와있던 이 사건이 여순사건이었거든요. 그런데 이것은 제주사건이 미군정이 제주도민의 자치조직인 인민위원회를 무리하게 탄압하면서 생겨난 불행한 사태인데 이 사태를 진압하는데 제주도에 군인들만 가지고 경찰이나 군인 병력을 가지고 모자라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제일 가까운 여수 신월리에 14연대가 있었는데 이 14연대를 제주토벌에 동원해라. 그래서 토벌 명령이 내려 떨어지니까 그 군인들이 볼 때는 토벌이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반란자로 여겨지는 사람은 즉시 사살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거든요.

◇김용민: 닥치는 대로 죽이기라는 거죠.

◆김용옥: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양심 있는 군인들이 어떻게 군인의 사명은 국토를 지키는 것이지 우리 국가의 인민을 그냥 그렇게 죽이는 일을 우리가 갈 수는 없다. 그래서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반란이라든가 단순한 항명이라든가 이들이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토벌 출동을 거부한다. 그것도 독단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의논해서 병사위원회를 조직해서 문제를 거기에 항거한 거거든요. 우리는 안 가겠다. 못가겠다. 그렇게 한 것을 가지고 우리가 소위 말해서 여순 반란이라고 규정하는데, 사실 이것은 그 군인들의 문제라기보다는 미 군정 하에서 민생이 파탄되었고 거기에 희생된 여수, 순천지역 민중에 분노가 표출된 사건이지 사실은 그 사건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여순민중항쟁이다. 이렇게 해서 제가 그 말을 먼저 쓰니까 그런 말도 쓰는 것을 작년까지만 해도 다들 두려워했어요. 벌벌 떨고. 그래서 제가 ‘우린 너무 몰랐다’ 라는 책을 써서 거기에 이것은 당당한 민중의 항쟁이고 이것은 역사적 새로운 냉전질서에 세계적인 패러다임을 바꾸는 사건으로써 다시 인식되어야 한다. 이것을 말씀드렸던 것이죠.

◇김용민: 여수, 순천에 주민들이 우리가 같은 동포를 죽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제주로 차출되는 것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다. 이렇게 결의를 했고 저항을 한 건데 이것을 그동안 반란이라고 뒤집어 씌워서 비방모략을 해 왔던 것이고 그래서 또 이렇게 희생당한 분들이 감히 자신의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서 호소하는 일조차도 주저했던 지난날들이 있었습니다. ‘우린 너무 몰랐다’ 그 책을 보니까 그 내용도 있었어요. 여수 MBC에서 강연을 마치고 올라가는 길인데 여수 MBC에서 너무 방청객들의 반응이 싸해서 내가 말을 잘못했나? 그런 고민도 하셨다고요.

◆김용옥: 네.

◇김용민: 그러다 여수에서 열차를 타고 올라가시는 길에 주위분들로부터 속마음을 들으셨다고 하셨는데, 그 이야기 좀 해 주세요.

◆김용옥: 그만큼 여순지역에 안 걸린 사람이 없어요, 이 사건에.

◇김용민: 피해를 안 당한 사람들이 없었다?

◆김용옥: 자그마치 피해자들이 정부 공식 발표로 1년 후 발표인데 1만 1031명이 죽었다. 이렇게 나왔거든요.

◇김용민: 1만 1000명이 넘었어요?

◆김용옥: 그런데 사실은 이 여순민주항쟁은 6년 6개월 동안 지속됐고 그동안에 최소한 2만 명은 희생되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러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남도, 그리고 이게 전라남도만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경상남도 사람들도 여기에 크게 걸려있어요.

◇김용민: 진주 쪽을.

◆김용옥: 네. 그쪽으로 다 이 지리산자락은 다 걸려있거든요. 그래서 이것은 우리나라의 아주 비극적인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 역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런 강고한 우익체제를 구축하게 되는 계기가 된 거죠. 그래서 예비 검속이 이루어지고 연좌제, 보도연맹, 숙군 사업, 반민특위가 무산되고 서북청년단 사람들이 전부 경찰화 하고 이런 우리나라의 이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소위 말해서 빨갱이 때려잡기 식의 문화, 반공우익 체제가 바로 여순민주항쟁을 빌미로 해서 다 강고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죠.

◇김용민: 얼마나 정말 강포하게 탄압을 했는지 70년이 지났는데 피해자, 또 피해자 가족들이 당시 그 피해 사례를 증언하는 것조차 주저했을 정도로 아주 굉장히 눌려왔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선생님께서.

◆김용옥: 그러니까 이러한 사건에 피해라고 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우리가 심리적으로 정말 벌벌 떨게 된 이 사태는 뭐 말할 것도 없지만 그것을 긍정적으로 우리가 표현한다면 동학이 척양척왜를 주장했고, 부국안민을 주장하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저 그냥 왜군의 기관총 아래에서 죽어가면서도 끝까지 저항했던 그러한 전통이 여기서 부활된 사건으로 우리가 봐야지 단순히 우리가 당했다. 이렇게만 보면 안 됩니다.

◇김용민: 동학의 맥을 이어가는 여순항쟁이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김용옥: 네.

◇김용민: 그래서 선생님 말씀에 조금만 보론하자면 사실 70년 동안 그렇게 침묵을 강요당해 왔고 그래서 여순항쟁에 대해서 선생님이 설명했을 때 다들 처음에 호응도 못하고 그렇다고 뜨거운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그랬던 것이 너무나 눌려왔기 때문에.

◆김용옥: 나 자신도 이 책을 쓸 적에 이건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우리가 너무 몰랐기 때문에 ‘우린 너무 몰랐다’ 라는 제목 하에서 이 책을 쓴 건데 나 같은 사람도 이 책으로 인해서 고소를 당하고 너무도 아주 내가 정말 정신적으로 고초를 겪었거든요. 그런데 내가 그럴 정도인데 전라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고초를 겪어왔겠느냐. 이것을 내가 정말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고, 그런데 작년이 마침 70주년이었어요. 그래서 여수MBC에 김지홍 PD가 이걸 가지고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여순사건에 대해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고 제가 평소 현대사에 관심이 있으니까, 방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고 그래서 주철희 박사라는 분 그리고 순천대 여순연구소 이런 데에서 나온 모든 자료들이 동원이 돼 제가 이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그것만 해도 지금 유튜브에서 7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눈물 흘리면서 봤고 올해에도 구례에서 하는 위령제도 제가 가서 같이 눈물을 흘리고 그랬었습니다.

◇김용민: 선생님, 그런데 아직까지는 우리 사회 일각에서 이것이 공산주의반란 운동이었다. 이렇게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용옥: 그러니까 맨날 이런 것을 무자비한 탄압을 하게 된 것은 트루먼독트린 이례로 냉전질서가 구축되면서 그 집권자들이 미국의 알랑방귀를 뀌기 위해서 무조건 이 브로킹형 논리에서 우리가 생존하려면 아주 완고한 반공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이런 것에서 출발한 거거든요, 이게? 그런데 우리는 전혀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를 우리가 이해를 못한 거죠. 그래서 사실 앞으로 우리가 추진해야 할 것은 특별법. 반드시 특별법이 제정돼서 제주4.3은 특별법이 통과되었기 때문에 그 공원도 마련되고 모든 사람들이 숨을 쉬고 있는데 우리 전라도, 경상도인. 남도 사람들은 아직도 이거 숨을 못 쉬고 있다는 말이에요, 숨을 못 쉬고. 그래서 특별법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김용민: 장환봉님. 이번에 무죄 선고를 받으신 분인데 이 분에 대해서 재판부가 좌익도 아니고 우익도 아니며, 오로지 국가가 혼란스럽던 시기에도 몸과 마음을 바쳐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고자했던 명예로운 철도 공무원이었다. 이렇게 평가하기도 있는데 장환봉 씨처럼 무고하게 희생당한 민간인들이 상당수 되고 그렇게 희생자들을 다 합쳐보니까 2만 명은 될 것이다. 도올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김용옥: 네.

◇김용민: 특별법이 그분들에 대한 명예회복의 방도로 효과적일지 이 부분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용옥: 장환봉 씨는 그래도 정확한 기록이 남고, 재판 기록이 남았기 때문에 오늘날 제정신청이 가능했던 겁니다. 그런데 기록도 없이 즉결처분되었고, 왜 죽은지도 모르는 그 수없는 사람들이 재심 신청할 기회도 없어요. 기록이 없으니까.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이런 사태에 대해서 장환봉 선생의 따님인 장경자라는 분이 이것은 재심 신청을 할 때부터 저하고도 간접적인 연락이 있었고 오늘 형이 이것에 대한 선고를 받는 이 시점에서 그 자리에 순천지원에 같이 나와 달라. 그런데 내가 가면 너무 내가 포커스를 받으니 그동안 거기에 당사자들을 위한 것으로 하자. 그래서 제가 불락사에 상훈스님이라는 분을 대신 보냈어요. 그런데 상훈스님 그 김정아 부장판사님의 얘기가 감동적인 게 이 판결문을 읽으면서 우시더래요. 그러니까 국가 폭력에 희생당한 것을 우리 법원이 이제 와서 70년 후에나 이렇게 한다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통탄할 일인지 모른다. 그러면서 우시더래요. 그러니까 나는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아무리 판사이지만 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으로, 인간된 도리로서 이것은 국가 폭력에 의한 잘못된 일이다. 이러한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그 판사님의 인격이야말로 진보된 민주화된 사회의 틀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는 크게 감동하는 것이죠.

◇김용민: 민간인 학살 관련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많이 만든 구자환 감독 이야기로는 나중에 무릎을 꿇었다고 하더라고요. 김정아 판사가요. 역사와 이렇게 화해하는구나. 라는 생각도 들면서 올해 많은 일들이 많은 기념일들이 있습니다. 4.19혁명 60주년, 5.18운동 40주년, 6.25한국전쟁 70년.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근현대사에서 벌어진 사건들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 선생님, 마지막으로 짧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용옥: 6.25전쟁에 관한 제대로 된 영화 한 편이 없어요. 이건 무슨 이야기냐면 과거라는 건 항상 이런 상황이라는 게 우리한테 계속 반복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러한 문제는 정확하게 우리가 알아야 해요. 기억하고, 평가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또 당한다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래도 대미의식도 상당히 국민적 각성이 높아졌고 트럼프가 아무리 미국의 대통령이라고 해도 그를 인간적인 모든 잘잘못을 민중이 가릴 줄 안단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야말로 앞으로 총선도 다가오는 이 해에 이러한 사건들을 정확히 알자.

◇김용민: 그렇게 요약하겠습니다. 선생님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김용옥: 네.

◇김용민: 도올 김용옥 선생과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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