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신문기사에 ‘쓰레기·0점’…日 제1야당의 때아닌 ‘헛발질’

입력 2020.02.05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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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마음이 너무 조급했습니다. 농담 삼아 그랬는데 '취재 규제'를 한 게 아닙니다. 불쾌했다면 반성하고 있습니다."

일본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의 아즈미 준(安住淳) 국회대책위원장. 4일 저녁 회견을 자청한 그는 진땀을 뺐습니다. 여러 차례 사과를 반복하면서도 회견 끝 무렵, "우리는 거의 무시당했다"면서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했습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상대로 각종 추문을 매섭게 추궁해야 할 제1야당의 국회 전략 사령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일본 산케이신문은 5일 야당 간부의 신문기사 평가 소동을 기사로 실으면서 “본지 기사는 ‘논외’”라는 소제목을 달았다.일본 산케이신문은 5일 야당 간부의 신문기사 평가 소동을 기사로 실으면서 “본지 기사는 ‘논외’”라는 소제목을 달았다.

신문기사에 '쓰레기, 0점, 출입금지'

같은 날 오전, 입헌민주당 등으로 구성된 회파(會派·한국의 원내 교섭단체 유사)가 사용하는 국회 중의원 대기실 문에 신문기사가 여러 개가 나붙었습니다. 이날 신문사 6곳의 조간 정치면 기사를 분홍색 형광펜으로 각각 평가한 내용이었습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한 입헌민주당과 국민민주당 등과의 통합에 대해 '그래도 결집을 포기하지 말라'는 제목을 단 기사에는 '훌륭하다'라는 평가가, 전날 국회 예산위원회에서 '아베 총리의 답변이 허술했다'고 논평한 기사에는 '하나마루'(花丸)를 그려 넣었습니다. '하나마루'는 이른바 '만점', 우리로 따지면 '참 잘했어요.'라는 뜻입니다. 일본에서 시험지를 채점할 때 뛰어난 점수에 동그라미를 대신해 그리는 기호입니다.

일본 입헌민주당의 아즈미 준 국회대책위원장 (출처=의원 공식 홈페이지)일본 입헌민주당의 아즈미 준 국회대책위원장 (출처=의원 공식 홈페이지)

이와 상반된 평가도 있었습니다. 일본의 집권 자민당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정조회장의 질의 내용을 크게 다룬 기사에는 '쓰레기, 0점, 출입금지'라는 원색적인 촌평을, '정부에 주문, 자민당 존재감'이란 제목의 기사에는 '논외'(論外)라고 적어 넣었습니다. 거친 표현이 논란을 불렀는지 신문 지면은 게시 한 시간도 안 돼 복도에서 사라졌습니다.

국회 출입 기자단은 "야당이 언론을 길들이려는 것이냐", "편집권에 대한 개입 아니냐"며 반발했습니다. 기사를 골라 평가하고, 그걸 복도에 내걸도록 지시한 사람이 바로 아즈미 국회대책위원장이었던 겁니다. 그는 일본 공영방송 NHK 기자 출신입니다.

일본 히로시마(廣島)지검 수사관들이 지난달 15일, 집권 자민당 의원의 사무소를 압수수색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교도=연합뉴스)일본 히로시마(廣島)지검 수사관들이 지난달 15일, 집권 자민당 의원의 사무소를 압수수색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기회를 위기로 바꾼 제1야당

지난달 20일 개막한 일본 정기국회는 아베 총리의 '조기 레임덕' 여부를 가를 분수령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른바 '벚꽃을 보는 모임', '카지노 스캔들' 등 정권의 악재가 곳곳에 널린 상태에서 시작됐기 때문이죠. 야당은 파상공세를 통해 '아베 1강'의 장벽을 허물어 보겠다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정치색이 있는 이슈는 아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도 일본 정부의 안일한 대책을 추궁할 호재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문을 연 국회는 야당의 미흡한 전투력만 드러냈습니다. 각종 의혹을 입증할 '한 방'이 부족했고, "잘 모르겠다.", "공개가 어렵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버티기로 일관한 아베 총리를 흔들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아베 총리가 4일 국회 답변 도중 야당 의원에게 '거짓말쟁이'라며 고함을 치는 모습까지 TV로 생중계됐습니다.

이 때문인지 일본 언론들은 이번 일을 "야당이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화살을 언론 탓으로 돌렸다"고 평했습니다. 마치 골문 앞에서 '노 마크 찬스'를 잡은 축구 선수가 헛발질한 뒤 심판을 탓한 것처럼 말이죠.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의원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의원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결과적으로 아베 총리는 야당의 잇따른 헛발질 덕분에 기사회생하는 모양새입니다. 특별한 호재가 없는데도 지난달 교도통신 여론조사에서 아베 정권 지지율은 전달보다 6.6%포인트 오른 49.3%를 기록했습니다.

통신은 이를 두고 "야당 합당 협의 과정에서 나온 진통이 그 배경"이라고 전했습니다. 옛 민진당에서 분리된 입헌민주당과 국민민주당이 합당 과정에서 밥그릇 싸움에만 골몰하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조사에서 양당 통합에 대해 '기대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69.3%에 달했습니다.

"언론 혼내려면 광고 수입 없애면 돼"

여당인 자민당도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모리야마 히로시(森山裕)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도 어제 기자회견을 열어 "자민당도 아침마다 기사를 보면 한숨이 나올 때가 있다. 하지만 각각의 입장이 담긴 기사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게 기본이다. '언론 탄압'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역공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자민당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2015년 6월, 아베 총리와 가까운 자민당 내 젊은 국회의원 40명이 개최한 모임 '문화예술간담회'에선 이런 말이 쏟아졌습니다. "(비판적 성향의) 오키나와(沖繩)의 2개 신문은 부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언론을 혼내주려면 광고 수입을 없애면 된다. 우리가 '게이단렌'((經團連·일본경제단체연합회)에 요청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이죠.

지난해 말 한국에서도 제1야당이 당과 관련해 편파·왜곡 보도를 한 언론사와 기자를 출입금지하는 '삼진아웃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가 사흘 만에 철회한 일이 있었습니다. 비판적인 기사에 대한 섭섭함, 더딘 여론의 지지로부터 오는 초조함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정도를 걷기보단 비민주적 발상을 먼저 하는 정치계의 퇴행이 한·일의 공통된 현상 같아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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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2-05 15:39:41
    특파원 리포트
"제가 마음이 너무 조급했습니다. 농담 삼아 그랬는데 '취재 규제'를 한 게 아닙니다. 불쾌했다면 반성하고 있습니다."

일본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의 아즈미 준(安住淳) 국회대책위원장. 4일 저녁 회견을 자청한 그는 진땀을 뺐습니다. 여러 차례 사과를 반복하면서도 회견 끝 무렵, "우리는 거의 무시당했다"면서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했습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상대로 각종 추문을 매섭게 추궁해야 할 제1야당의 국회 전략 사령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일본 산케이신문은 5일 야당 간부의 신문기사 평가 소동을 기사로 실으면서 “본지 기사는 ‘논외’”라는 소제목을 달았다.
신문기사에 '쓰레기, 0점, 출입금지'

같은 날 오전, 입헌민주당 등으로 구성된 회파(會派·한국의 원내 교섭단체 유사)가 사용하는 국회 중의원 대기실 문에 신문기사가 여러 개가 나붙었습니다. 이날 신문사 6곳의 조간 정치면 기사를 분홍색 형광펜으로 각각 평가한 내용이었습니다.

합의에 이르지 못한 입헌민주당과 국민민주당 등과의 통합에 대해 '그래도 결집을 포기하지 말라'는 제목을 단 기사에는 '훌륭하다'라는 평가가, 전날 국회 예산위원회에서 '아베 총리의 답변이 허술했다'고 논평한 기사에는 '하나마루'(花丸)를 그려 넣었습니다. '하나마루'는 이른바 '만점', 우리로 따지면 '참 잘했어요.'라는 뜻입니다. 일본에서 시험지를 채점할 때 뛰어난 점수에 동그라미를 대신해 그리는 기호입니다.

일본 입헌민주당의 아즈미 준 국회대책위원장 (출처=의원 공식 홈페이지)
이와 상반된 평가도 있었습니다. 일본의 집권 자민당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정조회장의 질의 내용을 크게 다룬 기사에는 '쓰레기, 0점, 출입금지'라는 원색적인 촌평을, '정부에 주문, 자민당 존재감'이란 제목의 기사에는 '논외'(論外)라고 적어 넣었습니다. 거친 표현이 논란을 불렀는지 신문 지면은 게시 한 시간도 안 돼 복도에서 사라졌습니다.

국회 출입 기자단은 "야당이 언론을 길들이려는 것이냐", "편집권에 대한 개입 아니냐"며 반발했습니다. 기사를 골라 평가하고, 그걸 복도에 내걸도록 지시한 사람이 바로 아즈미 국회대책위원장이었던 겁니다. 그는 일본 공영방송 NHK 기자 출신입니다.

일본 히로시마(廣島)지검 수사관들이 지난달 15일, 집권 자민당 의원의 사무소를 압수수색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기회를 위기로 바꾼 제1야당

지난달 20일 개막한 일본 정기국회는 아베 총리의 '조기 레임덕' 여부를 가를 분수령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른바 '벚꽃을 보는 모임', '카지노 스캔들' 등 정권의 악재가 곳곳에 널린 상태에서 시작됐기 때문이죠. 야당은 파상공세를 통해 '아베 1강'의 장벽을 허물어 보겠다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정치색이 있는 이슈는 아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도 일본 정부의 안일한 대책을 추궁할 호재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문을 연 국회는 야당의 미흡한 전투력만 드러냈습니다. 각종 의혹을 입증할 '한 방'이 부족했고, "잘 모르겠다.", "공개가 어렵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버티기로 일관한 아베 총리를 흔들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아베 총리가 4일 국회 답변 도중 야당 의원에게 '거짓말쟁이'라며 고함을 치는 모습까지 TV로 생중계됐습니다.

이 때문인지 일본 언론들은 이번 일을 "야당이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화살을 언론 탓으로 돌렸다"고 평했습니다. 마치 골문 앞에서 '노 마크 찬스'를 잡은 축구 선수가 헛발질한 뒤 심판을 탓한 것처럼 말이죠.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의원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교도=연합뉴스)
결과적으로 아베 총리는 야당의 잇따른 헛발질 덕분에 기사회생하는 모양새입니다. 특별한 호재가 없는데도 지난달 교도통신 여론조사에서 아베 정권 지지율은 전달보다 6.6%포인트 오른 49.3%를 기록했습니다.

통신은 이를 두고 "야당 합당 협의 과정에서 나온 진통이 그 배경"이라고 전했습니다. 옛 민진당에서 분리된 입헌민주당과 국민민주당이 합당 과정에서 밥그릇 싸움에만 골몰하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조사에서 양당 통합에 대해 '기대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69.3%에 달했습니다.

"언론 혼내려면 광고 수입 없애면 돼"

여당인 자민당도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모리야마 히로시(森山裕)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도 어제 기자회견을 열어 "자민당도 아침마다 기사를 보면 한숨이 나올 때가 있다. 하지만 각각의 입장이 담긴 기사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게 기본이다. '언론 탄압'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역공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자민당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2015년 6월, 아베 총리와 가까운 자민당 내 젊은 국회의원 40명이 개최한 모임 '문화예술간담회'에선 이런 말이 쏟아졌습니다. "(비판적 성향의) 오키나와(沖繩)의 2개 신문은 부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언론을 혼내주려면 광고 수입을 없애면 된다. 우리가 '게이단렌'((經團連·일본경제단체연합회)에 요청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이죠.

지난해 말 한국에서도 제1야당이 당과 관련해 편파·왜곡 보도를 한 언론사와 기자를 출입금지하는 '삼진아웃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가 사흘 만에 철회한 일이 있었습니다. 비판적인 기사에 대한 섭섭함, 더딘 여론의 지지로부터 오는 초조함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정도를 걷기보단 비민주적 발상을 먼저 하는 정치계의 퇴행이 한·일의 공통된 현상 같아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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