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로 미래로] 동유럽으로 간 北 ‘전쟁 고아’

입력 2020.03.14 (08:20) 수정 2020.03.14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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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70년 전 시작된 한국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부모 형제를 모두 잃은 전쟁고아가 아닐까 합니다.

북한은 1950년대 전쟁고아들을 동유럽 국가들로 보내 위탁교육을 맡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북한 전쟁고아들의 흔적을 좇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7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전쟁고아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채유나 리포터와 함께 만나 보시죠.

[리포트]

1952년 12월 불가리아의 작은 도시 프로보마이.

환영 인파 사이로 기차가 도착합니다.

호기심 가득한 어린이들이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손들어 화답합니다.

전쟁 직후 북한이 동구권에 보낸 전쟁 고아들입니다.

[베셀린 콜레브/동창생 : "그때 우리는 모두 어렸어요. 같이 축구도 하고 동산 같은 곳에서 배구도 하며 놀았죠. 다들 친형제처럼 지냈어요."]

북한과 불가리아의 아이들은생김새도, 문화도 달랐지만 어울리는데 스스럼이 없었습니다.

[마리아 야말리에바/동창생 : "주말에는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어요. 그때 아이들이 제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더라고요. 정말 좋았죠."]

이들의 유럽 생활은 북한이 본국 송환 명령을 내릴 때까지 길게는 10년 동안 계속됐습니다.

불가리아의 동창생들은 70년이 흐른 지금까지 북한에서 왔던 친구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디앙카 이바노바/선생님 : "제 부모님도 다 돌아가셨고 주변 친구들도 세상을 먼저 떠났어요. 저는 이 사진을 보며 그들을 추억하고 있어요. 사진 속 이 친구들도 지금은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겠죠. 이 친구가 나를 가장 많이 따랐던 ‘차기순’이었어요."]

북한의 전쟁고아들은 왜 동유럽으로 보내졌을까요? 그리고 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야 했을까요?

1950년대 북한과 동유럽을 오가야 했던전쟁고아들의 행적을 담은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 이제 개봉을 눈앞에 두고 마무리 작업이 한창인데요.

우리와 무관한 듯 다소 낯선 이야기인 만큼 제작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하네요.

서울의 한 작업실.

이 영화는 당초 이번 달 개봉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때문에 6월로 미뤄졌습니다.

이참에 대중의 관심을 좀 더 모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끝에 ‘두 개의 고향’이었던 영화 제목도 바꿨습니다.

[김덕영/영화 ‘김일성의 아이들’ 감독 : "제목을 바꾸다 보니까 아무래도 타이틀도 바꿔야 되고 영화 부분 부분도 손을 봐야 하니까 요즘 여기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 전쟁고아 문제는2018년 공개된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로 익히 알려져 있는데요,

김 감독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체코 등 넓은 범위에서 숨겨진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영화 제작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북한이 위탁 교육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고, 시간도 많이 흘러 취재는 쉽지 않았습니다.

[김덕영/영화 ‘김일성의 아이들’ 감독 : "그렇다면 이건 움직여야 된다. 현장에 가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몸으로 부대끼면서 사람들을 통해서 자료를 찾아야 되고 생존자들을 발굴해야 된다는 판단이 선거죠. 근데 그 판단이 옳았던 것 같아요."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지난해 12월 폴란드 대사관에서 주최한 특별 시사회에서 1차로 공개됐습니다.

[관객 : "저희 외가가 선명회로 전쟁고아를 맡았던 집이라 너무나 가슴에 와닿았고 저도 하나의 기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객 : "역사적 자료들을 찾아주셔서 모아서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인간적인 가치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최근 이 영화는 프랑스 니스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국제사회의 관심이 전쟁고아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이라는 걸 보여주는데요,

지금, 우리에게, 50년대 북한의 전쟁고아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까요?

동유럽 국가들로 보내졌던 북한 전쟁고아들은 만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국제사회를 향한 문을 걸어 잠근 지금과 달리, 당시 북한은 선진 사회주의 국가들을 적극적으로 배우고자 했습니다.

[김덕영/영화 ‘김일성의 아이들’ 감독 : "어쨌든 같이 사회주의권 내에 연대를 하면서 잘 살아보자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거예요. 전쟁고아 프로젝트가. 사회주의 코즈모폴리턴이라는 그 기치 하에 사회적 연대 하에 프로젝트가 진행됐는데..."]

하지만 10년도 안돼 북한은 전쟁고아들을 모두 송환합니다.

유럽 사회에 대한 경험이 북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봤던 겁니다.

전쟁고아들은 이념 대립과 전쟁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습니다.

[김덕영/영화 ‘김일성의 아이들’ 감독 : "자기가 태어났던 생물학적 고향이 북한이었다면 동유럽 5개 나라는 또 하나 자기가 살면서 얻게 된 행운 같은 고향인 거죠. 근데 아이들이 결국은 갑작스럽게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아이들이 받은 충격은 굉장히 어마어마했을 거예요."]

김 감독의 다음 작품은 해외로 입양된 남쪽 전쟁고아에 대한 영화가 될 것이라는데요,

50년대 전쟁고아는 2020년의 남한과 북한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연결고리라는 생각에서입니다.

[김덕영 /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 감독 : "북한 전쟁고아가 우리 삶과 우리 역사와 무슨 관련 있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 거예요. 제가 15년 동안 걸렸던 이 작업이 한국 사회에 북한을 좀 더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게 제 바람이에요."]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올해로 70년. 하지만 남과 북 곳곳에 남은 상처는 여전할지 모릅니다.

시간에 맡겨 기억 너머로 보내기보다 찾아내 되살리고, 기록으로 남겨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니냐고, 김 감독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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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일로 미래로] 동유럽으로 간 北 ‘전쟁 고아’
    • 입력 2020-03-14 08:56:22
    • 수정2020-03-14 09: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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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70년 전 시작된 한국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부모 형제를 모두 잃은 전쟁고아가 아닐까 합니다.

북한은 1950년대 전쟁고아들을 동유럽 국가들로 보내 위탁교육을 맡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북한 전쟁고아들의 흔적을 좇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7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전쟁고아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채유나 리포터와 함께 만나 보시죠.

[리포트]

1952년 12월 불가리아의 작은 도시 프로보마이.

환영 인파 사이로 기차가 도착합니다.

호기심 가득한 어린이들이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손들어 화답합니다.

전쟁 직후 북한이 동구권에 보낸 전쟁 고아들입니다.

[베셀린 콜레브/동창생 : "그때 우리는 모두 어렸어요. 같이 축구도 하고 동산 같은 곳에서 배구도 하며 놀았죠. 다들 친형제처럼 지냈어요."]

북한과 불가리아의 아이들은생김새도, 문화도 달랐지만 어울리는데 스스럼이 없었습니다.

[마리아 야말리에바/동창생 : "주말에는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어요. 그때 아이들이 제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더라고요. 정말 좋았죠."]

이들의 유럽 생활은 북한이 본국 송환 명령을 내릴 때까지 길게는 10년 동안 계속됐습니다.

불가리아의 동창생들은 70년이 흐른 지금까지 북한에서 왔던 친구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디앙카 이바노바/선생님 : "제 부모님도 다 돌아가셨고 주변 친구들도 세상을 먼저 떠났어요. 저는 이 사진을 보며 그들을 추억하고 있어요. 사진 속 이 친구들도 지금은 모두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겠죠. 이 친구가 나를 가장 많이 따랐던 ‘차기순’이었어요."]

북한의 전쟁고아들은 왜 동유럽으로 보내졌을까요? 그리고 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야 했을까요?

1950년대 북한과 동유럽을 오가야 했던전쟁고아들의 행적을 담은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 이제 개봉을 눈앞에 두고 마무리 작업이 한창인데요.

우리와 무관한 듯 다소 낯선 이야기인 만큼 제작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하네요.

서울의 한 작업실.

이 영화는 당초 이번 달 개봉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때문에 6월로 미뤄졌습니다.

이참에 대중의 관심을 좀 더 모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끝에 ‘두 개의 고향’이었던 영화 제목도 바꿨습니다.

[김덕영/영화 ‘김일성의 아이들’ 감독 : "제목을 바꾸다 보니까 아무래도 타이틀도 바꿔야 되고 영화 부분 부분도 손을 봐야 하니까 요즘 여기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 전쟁고아 문제는2018년 공개된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로 익히 알려져 있는데요,

김 감독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체코 등 넓은 범위에서 숨겨진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영화 제작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북한이 위탁 교육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고, 시간도 많이 흘러 취재는 쉽지 않았습니다.

[김덕영/영화 ‘김일성의 아이들’ 감독 : "그렇다면 이건 움직여야 된다. 현장에 가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몸으로 부대끼면서 사람들을 통해서 자료를 찾아야 되고 생존자들을 발굴해야 된다는 판단이 선거죠. 근데 그 판단이 옳았던 것 같아요."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지난해 12월 폴란드 대사관에서 주최한 특별 시사회에서 1차로 공개됐습니다.

[관객 : "저희 외가가 선명회로 전쟁고아를 맡았던 집이라 너무나 가슴에 와닿았고 저도 하나의 기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객 : "역사적 자료들을 찾아주셔서 모아서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인간적인 가치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최근 이 영화는 프랑스 니스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국제사회의 관심이 전쟁고아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이라는 걸 보여주는데요,

지금, 우리에게, 50년대 북한의 전쟁고아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까요?

동유럽 국가들로 보내졌던 북한 전쟁고아들은 만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국제사회를 향한 문을 걸어 잠근 지금과 달리, 당시 북한은 선진 사회주의 국가들을 적극적으로 배우고자 했습니다.

[김덕영/영화 ‘김일성의 아이들’ 감독 : "어쨌든 같이 사회주의권 내에 연대를 하면서 잘 살아보자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거예요. 전쟁고아 프로젝트가. 사회주의 코즈모폴리턴이라는 그 기치 하에 사회적 연대 하에 프로젝트가 진행됐는데..."]

하지만 10년도 안돼 북한은 전쟁고아들을 모두 송환합니다.

유럽 사회에 대한 경험이 북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봤던 겁니다.

전쟁고아들은 이념 대립과 전쟁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습니다.

[김덕영/영화 ‘김일성의 아이들’ 감독 : "자기가 태어났던 생물학적 고향이 북한이었다면 동유럽 5개 나라는 또 하나 자기가 살면서 얻게 된 행운 같은 고향인 거죠. 근데 아이들이 결국은 갑작스럽게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아이들이 받은 충격은 굉장히 어마어마했을 거예요."]

김 감독의 다음 작품은 해외로 입양된 남쪽 전쟁고아에 대한 영화가 될 것이라는데요,

50년대 전쟁고아는 2020년의 남한과 북한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연결고리라는 생각에서입니다.

[김덕영 /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 감독 : "북한 전쟁고아가 우리 삶과 우리 역사와 무슨 관련 있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 거예요. 제가 15년 동안 걸렸던 이 작업이 한국 사회에 북한을 좀 더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게 제 바람이에요."]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올해로 70년. 하지만 남과 북 곳곳에 남은 상처는 여전할지 모릅니다.

시간에 맡겨 기억 너머로 보내기보다 찾아내 되살리고, 기록으로 남겨 상처를 보듬고 치유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니냐고, 김 감독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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