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동료 간호사들의 흐느낌에…” 모유 수유 끊고 달려간 병원

입력 2020.04.14 (11:18) 수정 2020.04.1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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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솜이는 2020년 1월 1일에 태어났습니다. 최근 백일잔치도 했어요. 코로나19가 미국을 덮치지 않았다면, 산후 휴가로 5~6개월을 쓰면서 아이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겁니다."

뉴욕 중심부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트레이시 권 씨는 얼마 전까지 산후 휴가 중이었습니다. 코로나19가 뉴욕에 급속히 확산하기 전까진 여느 평범한 초보 엄마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권 씨가 엄마에서 다시 간호사로 복귀한 결정적인 계기는 동료들과의 전화였습니다. 동료 간호사들은 수화기 너머 흐느꼈습니다. 뉴욕의 병원은 이미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고, 의료진은 감염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사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권 씨는 결국 산후 휴가를 중단하고 동료들과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함께 싸우기로 했습니다. 밤새 병원 근무를 마치고 복귀한 권 씨는 KBS 취재진과 화상 인터뷰에서 병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긴박한 상황을 담담한 어조로 전했습니다.


마운트 시나이 웨스트 병원 중환자실(ICU). 복귀한 권 씨가 배치받은 일터입니다. 병원 로비는 코로나19 환자를 치료하는 임시 수용소로 바뀌었습니다.

■ 가족 없이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들..."무섭고, 혼란스러운 시간"

뉴욕주는 13일(현지시간) 기준으로 사망자가 1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우리나라 코로나19 확진자 전체 숫자와 견줄 정도입니다.

감염 우려로 방문이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기 때문에 코로나19 중환자들은 가족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임종을 맞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중환자실 환자들은 대부분 진정제를 먹었거나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어서 반응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항상 저를 소개하고 환자들의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우리가 어떤 치료를 하고 있는지도 얘기해 줍니다. 환자들에겐 정말 무섭고, 혼란스러운 시간이 될 테니까요. 감정적으로, 신체적으로 너무나 많은 죽음을 보는 건 의료진에게 정말 힘든 일입니다."

■ 의료진 40%가 감염...간호사 절반이 타 병원 의료진

"중환자실은 항상 긴장 상태입니다. 항상 비상벨이 울리고, 의료진은 쉴 틈도 없이 일합니다. 병실에서 환자를 보는 시간이 많을수록 감염 노출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한번 들어가면 여러 가지 치료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권 씨를 포함해 의료진을 더 긴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보호 장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연방정부와 주 정부별로 개인 보호 장비(PPE)를 충분히 보급하고 있다고 발표하지만, 실제 현장 분위기는 다르다고 합니다. 조금씩 사정은 나아지고 있지만, 타이완, 한국, 중국과 비교할 때 미국 병원의 의료진 보호 장비는 여전히 열악하다는 게 권 씨의 전언입니다.

일주일 전, 맨해튼에서 일하고 있는 권 씨는 브룩클린에 위치한 병원에 야간 지원을 나갔습니다. 지원을 나간 병원의 간호사 40%가 코로나19에 감염됐기 때문입니다. 절반 정도의 간호사가 다른 병원에서 지원 나온 기막힌 상황이었습니다.

"그 병원의 의료진은 다들 바이러스에 노출될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고 무기력했습니다. 다들 알고 있는 거죠. 자신들이 이미 노출이 됐고, 결국엔 아플 거라는 걸…. 그냥 심하게 아프지 않아서 중환자실에 들어갈 일만 없기를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 거리로 나선 의료진 "보호 장비(PPE) 지급하라"


미국에서는 최일선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소방수, 경찰)과 의료진들을 영웅시하는 분위깁니다. 이들이 활약하는 장면에 뭉클한 음악을 덧입힌 현지 방송들의 영상은 한 편의 영화 트레일러를 보는 느낌이 들 정돕니다.

하지만 정작 충분한 보호 장비 지급 없이 의료진이 사투에 내몰리는 현실은 모순적입니다. 미국 내 간호사 연대, 의사 협회 차원에서 보호 장비 지원을 요청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희생을 하려는 게 아니라 해결하고, 변화를 일으키려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리고, 현실을 부인하는 정치인들과 병원 경영자들에게 맞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최일선 의료진 연대에서 권 씨는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입니다. 단순히 보호 장비 지급만을 요구하는 시위는 아닙니다. 미국의 의료 체계의 허점을 알리고, 제도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섭니다. 코로나19 사태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다고 권 씨는 말합니다.

■ "미국 의료 시스템은 완전히 민영화...코로나19 최대 피해는 저소득층"

지난달 중순쯤, 캘리포니아주에 살던 열일곱 살 소년이 사망했습니다. 이름은 윌리엄 황,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황 씨는 3월 18일, 코로나19 증세로 응급 치료 시설에 갔지만, 보험이 없었습니다. 보험이 없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병원을 전전하던 중 심정지가 일어났고, 결국 이송 직후 사망했습니다. 황 씨처럼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미국인은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인 3천만 명이 넘습니다.

한국과 달리 의료보험 시장이 민영화된 미국은 직장에 따라 의료보험의 질이 결정되고, 보험 가격에 따라 의료 서비스의 질도 달라집니다. 흔한 감기로 병원 한 번 방문해도 100달러를 훌쩍 넘기는 건 기본입니다.

그래서 코로나19 확산 초기, 감염됐더라도 코로나19 진단과 치료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병원을 찾지 못한 사람들도 상당수가 됐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 정치권에서는 한발 늦은 코로나19 진단 검사와 추적 시스템이 이 사태를 불러왔다는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면에는 의료 시스템 민영화라는 구조적 문제점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코로나19는 미국 사회에 적지 않은 과제를 남겼습니다.

세계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던 미국이었지만, 지난 3주 동안(4월 9일 기준) 1,68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코로나19 환자 57만여 명(4월 14일 기준), 사망자 2만여 명으로 집계 숫자로는 세계 최고라는 불명예도 얻었습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들게 하는 바이러스 앞에서 드러난 허상입니다.

권 씨는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의 미국은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이 사태가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면 안 되겠구나 하는 경각심이 미국인들에게 생겼습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근본적으로 보건 의료 시스템과 경제 구조에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자본의 이익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 ‘ 코로나19 확산 우려’ 최신 기사 보기
http://news.kbs.co.kr/news/list.do?icd=19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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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동료 간호사들의 흐느낌에…” 모유 수유 끊고 달려간 병원
    • 입력 2020-04-14 11:18:19
    • 수정2020-04-14 11:19:29
    특파원 리포트
"다솜이는 2020년 1월 1일에 태어났습니다. 최근 백일잔치도 했어요. 코로나19가 미국을 덮치지 않았다면, 산후 휴가로 5~6개월을 쓰면서 아이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겁니다."

뉴욕 중심부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트레이시 권 씨는 얼마 전까지 산후 휴가 중이었습니다. 코로나19가 뉴욕에 급속히 확산하기 전까진 여느 평범한 초보 엄마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권 씨가 엄마에서 다시 간호사로 복귀한 결정적인 계기는 동료들과의 전화였습니다. 동료 간호사들은 수화기 너머 흐느꼈습니다. 뉴욕의 병원은 이미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고, 의료진은 감염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사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권 씨는 결국 산후 휴가를 중단하고 동료들과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함께 싸우기로 했습니다. 밤새 병원 근무를 마치고 복귀한 권 씨는 KBS 취재진과 화상 인터뷰에서 병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긴박한 상황을 담담한 어조로 전했습니다.


마운트 시나이 웨스트 병원 중환자실(ICU). 복귀한 권 씨가 배치받은 일터입니다. 병원 로비는 코로나19 환자를 치료하는 임시 수용소로 바뀌었습니다.

■ 가족 없이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들..."무섭고, 혼란스러운 시간"

뉴욕주는 13일(현지시간) 기준으로 사망자가 1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우리나라 코로나19 확진자 전체 숫자와 견줄 정도입니다.

감염 우려로 방문이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기 때문에 코로나19 중환자들은 가족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임종을 맞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중환자실 환자들은 대부분 진정제를 먹었거나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어서 반응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항상 저를 소개하고 환자들의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우리가 어떤 치료를 하고 있는지도 얘기해 줍니다. 환자들에겐 정말 무섭고, 혼란스러운 시간이 될 테니까요. 감정적으로, 신체적으로 너무나 많은 죽음을 보는 건 의료진에게 정말 힘든 일입니다."

■ 의료진 40%가 감염...간호사 절반이 타 병원 의료진

"중환자실은 항상 긴장 상태입니다. 항상 비상벨이 울리고, 의료진은 쉴 틈도 없이 일합니다. 병실에서 환자를 보는 시간이 많을수록 감염 노출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한번 들어가면 여러 가지 치료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권 씨를 포함해 의료진을 더 긴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보호 장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연방정부와 주 정부별로 개인 보호 장비(PPE)를 충분히 보급하고 있다고 발표하지만, 실제 현장 분위기는 다르다고 합니다. 조금씩 사정은 나아지고 있지만, 타이완, 한국, 중국과 비교할 때 미국 병원의 의료진 보호 장비는 여전히 열악하다는 게 권 씨의 전언입니다.

일주일 전, 맨해튼에서 일하고 있는 권 씨는 브룩클린에 위치한 병원에 야간 지원을 나갔습니다. 지원을 나간 병원의 간호사 40%가 코로나19에 감염됐기 때문입니다. 절반 정도의 간호사가 다른 병원에서 지원 나온 기막힌 상황이었습니다.

"그 병원의 의료진은 다들 바이러스에 노출될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고 무기력했습니다. 다들 알고 있는 거죠. 자신들이 이미 노출이 됐고, 결국엔 아플 거라는 걸…. 그냥 심하게 아프지 않아서 중환자실에 들어갈 일만 없기를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 거리로 나선 의료진 "보호 장비(PPE) 지급하라"


미국에서는 최일선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소방수, 경찰)과 의료진들을 영웅시하는 분위깁니다. 이들이 활약하는 장면에 뭉클한 음악을 덧입힌 현지 방송들의 영상은 한 편의 영화 트레일러를 보는 느낌이 들 정돕니다.

하지만 정작 충분한 보호 장비 지급 없이 의료진이 사투에 내몰리는 현실은 모순적입니다. 미국 내 간호사 연대, 의사 협회 차원에서 보호 장비 지원을 요청하는 시위를 벌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우리는 희생을 하려는 게 아니라 해결하고, 변화를 일으키려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리고, 현실을 부인하는 정치인들과 병원 경영자들에게 맞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최일선 의료진 연대에서 권 씨는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입니다. 단순히 보호 장비 지급만을 요구하는 시위는 아닙니다. 미국의 의료 체계의 허점을 알리고, 제도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섭니다. 코로나19 사태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다고 권 씨는 말합니다.

■ "미국 의료 시스템은 완전히 민영화...코로나19 최대 피해는 저소득층"

지난달 중순쯤, 캘리포니아주에 살던 열일곱 살 소년이 사망했습니다. 이름은 윌리엄 황, 한국계 미국인입니다.

황 씨는 3월 18일, 코로나19 증세로 응급 치료 시설에 갔지만, 보험이 없었습니다. 보험이 없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병원을 전전하던 중 심정지가 일어났고, 결국 이송 직후 사망했습니다. 황 씨처럼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미국인은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인 3천만 명이 넘습니다.

한국과 달리 의료보험 시장이 민영화된 미국은 직장에 따라 의료보험의 질이 결정되고, 보험 가격에 따라 의료 서비스의 질도 달라집니다. 흔한 감기로 병원 한 번 방문해도 100달러를 훌쩍 넘기는 건 기본입니다.

그래서 코로나19 확산 초기, 감염됐더라도 코로나19 진단과 치료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병원을 찾지 못한 사람들도 상당수가 됐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미 정치권에서는 한발 늦은 코로나19 진단 검사와 추적 시스템이 이 사태를 불러왔다는 책임론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면에는 의료 시스템 민영화라는 구조적 문제점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코로나19는 미국 사회에 적지 않은 과제를 남겼습니다.

세계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던 미국이었지만, 지난 3주 동안(4월 9일 기준) 1,680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코로나19 환자 57만여 명(4월 14일 기준), 사망자 2만여 명으로 집계 숫자로는 세계 최고라는 불명예도 얻었습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들게 하는 바이러스 앞에서 드러난 허상입니다.

권 씨는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의 미국은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이 사태가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면 안 되겠구나 하는 경각심이 미국인들에게 생겼습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근본적으로 보건 의료 시스템과 경제 구조에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자본의 이익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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