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구조 개선’ 빠진 이재용 사과…발렌베리 모델 가능할까?

입력 2020.05.09 (08:04) 수정 2020.05.09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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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6일 대국민 사과를 하려고 들어서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6일 대국민 사과를 하려고 들어서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발렌베리 가문 식 경영 도입'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대국민 사과에서 자녀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하자 삼성이 발렌베리 가문 모델을 따를 거라는 보도가 동시다발적으로 나왔다. '존재하나 드러내지 않는다'는 가훈 아래 150여 년간 주식을 소유하되 한 사람이 경영권을 독점하지 않은 발렌베리 가(家)가 삼성의 미래가 될 거란 얘기다.

스웨덴의 재벌가(家)인 발렌베리 가문은 1856년 은행업을 시작으로 전 산업에 걸쳐 문어발식으로 영역을 확장한 동시에 경영권을 세습해온 기업집단이다. 스웨덴 주식시장에서 소속 계열사의 시가총액이 차지하는 비중이 40%를 넘고, 글로벌 시장에서 올리는 매출이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넘는다.

지난해 기준 보유기업의 주식가치는 우리 돈으로 57조 원을 넘는다. 가전화사인 일렉트로룩스, 항공업체 사브, 제약회사 아스트라제네카, 통신사 에릭슨 등을 자회사로 보유하고 있고, 미국 나스닥거래소의 지분도 갖고 있다.

성장과정과 국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규모에서 삼성과 공통점이 있지만, 경영권을 물려줄 후계자를 오랜 기간 능력 평가를 통해 엄격히 선발한다는 점은 대조를 이룬다. 경영자로 선정되더라도 최고경영자(CEO)로서 급여 외에 지분을 승계하지 않고, 노동대표 이사제를 시행한다는 점도 '무노조'를 추구해온 삼성과는 다른 점이다. 이 때문에 90년대부터 삼성 등 승계를 위해 법을 넘나든 국내 재벌이 발렌베리가의 사례를 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삼성은 발렌베리식 경영을 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발렌베리처럼 합법적이고 안정적인 지배구조가 없기 때문이다. 삼성의 지배구조는 상호출자·순환출자를 해소한 지금도 편법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이 부회장의 사과문에도 "아이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대목이 있을 뿐, 현재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 언급은 없었다.

이 부회장, 삼성생명 등 금융계열사 통해 삼성전자 지배

일렉트로룩스, SKF, SAS항공, ABB. 발렌베리 가문이 다수 지분을 보유한 회사다. 지주회사인 인베스터AB와 3개의 재단에서 직·간접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누구의 회사일까. 사실상 삼성생명이 지배하는 회사다. 이 부회장 일가가 삼성생명 지분 20%를 갖고 있지만, 삼성생명은 보험상품에 가입한 고객들의 돈을 기반으로 한다.

삼성전자의 지배주주 현황 (자료 :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삼성전자의 지배주주 현황 (자료 :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삼성생명은 현재 삼성전자 주식 59억 6,978만 주 가운데 5억 815만 주, 8.51%를 갖고 있다. 이건희 회장(4.18%)과 이재용 부회장(0.7%),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0.91%) 등 일가의 지분을 다 합한 것보다 많다. 다음으로 삼성물산이 5.01%, 삼성화재보험이 1.49%의 지분을 갖고 있다.

보험사의 자산은 대부분 보험가입자가 낸 보험료다. 금융과 산업을 분리한다는 금산분리 원칙은 금융사 대주주가 고객이 맡긴 돈을 이용해 다른 회사를 지배하거나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엄밀히 말해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주식을 가진 것은 금산분리 원칙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현행 보험업법도 보험사가 계열사 주식을 자산의 3%(또는 자기자본의 60%) 넘게 보유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총자산이 313조 원인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주식을 9조 3,829억 원어치만 보유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8일) 삼성전자 종가(4만 8,800원) 기준으로 삼성생명이 가진 지분 가치는 24조 원을 넘어선다. 다른 보험계열사 삼성화재도 마찬가지로 한도의 2배를 넘는 삼성전자 지분을 갖고 있다.

법이 정한 금액의 3배 가까이 지분을 보유할 수 있는 것은 주식가격을 평가하는 잣대가 달라서다. 보험업법 감독규정은 주식가치를 평가할 때 '취득원가'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러면 삼성전자 주식은 24조 원이 아닌 5천690억 원어치가 된다.

현재 은행이나 증권, 저축은행 등은 자산운용비율을 계산할 때 시가로 평가하는데 보험만 취득원가를 적용하고 있다. 보험사도 자산과 자기자본을 계산할 때는 시가를 반영한 장부가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일본 등 일부 국가에서 보험에 취득원가 기준을 적용하고는 있지만, 이때는 분모가 되는 자산도 취득원가 기준을 적용해 일관성을 갖는다.

이 때문에 박용진 민주당 의원은 지난 2018년 주식을 시장가격으로 평가하고, 자산의 3%를 초과하는 지분을 팔도록 강제하는 보험업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3% 초과분에 대해 바로 의결권을 제한하고 5년 이내에 지분을 처분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지배구조 변화 요구에도 삼성은 수년간 묵묵부답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공정거래위원장을 역임하던 2018년 5월 10일 10대 대기업집단 경영인과 간담회를 열고 정부의 재벌개혁 정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공정거래위원장을 역임하던 2018년 5월 10일 10대 대기업집단 경영인과 간담회를 열고 정부의 재벌개혁 정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관계 당국도 삼성에 보험사를 통한 삼성전자 지배를 해소하라는 메시지를 꾸준히 보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재직하던 2018년 5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삼성의 문제는 삼성생명과 삼성화재가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이라며 "연말까지는 삼성에서 최소한 방향성을 알려주는 메시지는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수십조 원에 이르는 주식을 수개월 만에 처분하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는 보이라는 취지였다. 같은 달 말 삼성생명은 약 1조 원어치의 삼성전자 주식을 매각했다. '삼성이 반응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자사주 소각을 앞두고 금산법(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상 대기업집단 내 금융사의 비금융회사 지분율 제한 10% 선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2년간 삼성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삼성생명은 여전히 삼성전자의 최대주주이고,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문제로 더이상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에서 지분 매각의 의지까지 읽기는 어려워 보인다.

삼성전자 지분 빼내 금융지주사 설립 추진했으나 '실패'

서울 서초동 삼성생명 본사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서울 서초동 삼성생명 본사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물론 삼성생명으로선 난감할 수 있다. 국민연금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큰 기관투자가로서 유가증권시장 시가총액의 30%에 근접하고 있는 삼성전자를 계열사라는 이유로 포트폴리오에 담지 못하면 오히려 보험가입자에게 불리한 것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실제로 삼성전자 주가는 꾸준히 상승했기 때문에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투자로 가입자가 손실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삼성생명이 가입자 입장을 고려해 삼성전자 비중을 높였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가입자의 수익을 총수 일가 몫으로 이전하려던 적은 있다. 2016년 금융지주사 설립을 추진했을 때다. 국정농단 특검 수사결과에 따르면 삼성 미래전략실은 삼성생명이 보유한 현금 3조 원과 삼성전자 등 계열사 지분 6조 원어치를 인적분할해 금융지주회사를 설립하는 방안을 마련해 금융위원회에 제안했다. 이 부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나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삼성생명이 금융지주사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기도 했다.

시장가격의 50분의 1 수준으로 평가된 삼성전자 지분을 일부 넘겨 금융지주를 세우고 단계적으로 매각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유배당 상품에 가입한 보험사 고객에게 돌아가야 할 삼성전자 투자수익을 지주사로 넘기는 꼴이다. 삼성의 계획대로 일이 풀렸다면 이 부회장 일가는 금융지주 지분을 약 40% 넘게 보유할 수 있었다. 현재 보유한 삼성생명 지분의 2배를 넘는 수준이다.

21대 국회에서 '삼성생명법' 다시 탄력받나

발렌베리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기업집단도 은행과 비금융회사를 동시에 보유한 금산복합체다. 하지만 금산분리 원칙이 없는 스웨덴에서도 가문이 보유한 은행인 SEB에서 지주회사에 속한 다른 기업의 지분을 보유하지 않고 있다. 집안 내에서 회사를 경영할 후계자를 정할 때도 지주회사와 은행의 대표를 각각 따로 두고 있다.

이 부회장이 "아이들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한 것이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제왕적 경영자의 퇴장을 의미할 순 있지만, 금융사를 통한 '간접지배' 구조를 개선하지 않고 발렌베리 방식을 따를 수는 없어 보인다.

현재 자산 5조 원이 넘는 대기업집단에서 순환출자로 가공자본을 만들어내는 관행은 거의 사라진 상태다. 삼성도 국정농단의 공범이 된 계기인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순환출자는 모두 정리했다. 하지만 순환출자가 사라졌다고 지배구조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고 보긴 어렵다.

이 부회장이 무노조경영과 세습을 포기한다고 밝힌 다음 한 발짝 나아갔다는 긍정적 평가와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는 부정적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그 사과에서 삼성의 고질적 문제로 꼽히는 지배구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정부는 재벌개혁에 대해 '몰아치듯 하지 않고 점진적이고 긍정적 변화를 끌어내는' 방식을 강조해왔다. 한 기업을 대상으로 법을 바꾸는 식의 변화는 피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삼성이 이대로 지배구조 개선에 나서지 않는다면 '삼성생명법'으로 불리는 보험업법 개정안이 21대 국회에서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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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5-09 08: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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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6일 대국민 사과를 하려고 들어서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발렌베리 가문 식 경영 도입'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대국민 사과에서 자녀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하자 삼성이 발렌베리 가문 모델을 따를 거라는 보도가 동시다발적으로 나왔다. '존재하나 드러내지 않는다'는 가훈 아래 150여 년간 주식을 소유하되 한 사람이 경영권을 독점하지 않은 발렌베리 가(家)가 삼성의 미래가 될 거란 얘기다.

스웨덴의 재벌가(家)인 발렌베리 가문은 1856년 은행업을 시작으로 전 산업에 걸쳐 문어발식으로 영역을 확장한 동시에 경영권을 세습해온 기업집단이다. 스웨덴 주식시장에서 소속 계열사의 시가총액이 차지하는 비중이 40%를 넘고, 글로벌 시장에서 올리는 매출이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넘는다.

지난해 기준 보유기업의 주식가치는 우리 돈으로 57조 원을 넘는다. 가전화사인 일렉트로룩스, 항공업체 사브, 제약회사 아스트라제네카, 통신사 에릭슨 등을 자회사로 보유하고 있고, 미국 나스닥거래소의 지분도 갖고 있다.

성장과정과 국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규모에서 삼성과 공통점이 있지만, 경영권을 물려줄 후계자를 오랜 기간 능력 평가를 통해 엄격히 선발한다는 점은 대조를 이룬다. 경영자로 선정되더라도 최고경영자(CEO)로서 급여 외에 지분을 승계하지 않고, 노동대표 이사제를 시행한다는 점도 '무노조'를 추구해온 삼성과는 다른 점이다. 이 때문에 90년대부터 삼성 등 승계를 위해 법을 넘나든 국내 재벌이 발렌베리가의 사례를 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삼성은 발렌베리식 경영을 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발렌베리처럼 합법적이고 안정적인 지배구조가 없기 때문이다. 삼성의 지배구조는 상호출자·순환출자를 해소한 지금도 편법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이 부회장의 사과문에도 "아이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대목이 있을 뿐, 현재 지배구조를 개선하겠다는 언급은 없었다.

이 부회장, 삼성생명 등 금융계열사 통해 삼성전자 지배

일렉트로룩스, SKF, SAS항공, ABB. 발렌베리 가문이 다수 지분을 보유한 회사다. 지주회사인 인베스터AB와 3개의 재단에서 직·간접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누구의 회사일까. 사실상 삼성생명이 지배하는 회사다. 이 부회장 일가가 삼성생명 지분 20%를 갖고 있지만, 삼성생명은 보험상품에 가입한 고객들의 돈을 기반으로 한다.

삼성전자의 지배주주 현황 (자료 :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삼성생명은 현재 삼성전자 주식 59억 6,978만 주 가운데 5억 815만 주, 8.51%를 갖고 있다. 이건희 회장(4.18%)과 이재용 부회장(0.7%),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0.91%) 등 일가의 지분을 다 합한 것보다 많다. 다음으로 삼성물산이 5.01%, 삼성화재보험이 1.49%의 지분을 갖고 있다.

보험사의 자산은 대부분 보험가입자가 낸 보험료다. 금융과 산업을 분리한다는 금산분리 원칙은 금융사 대주주가 고객이 맡긴 돈을 이용해 다른 회사를 지배하거나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엄밀히 말해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주식을 가진 것은 금산분리 원칙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현행 보험업법도 보험사가 계열사 주식을 자산의 3%(또는 자기자본의 60%) 넘게 보유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 총자산이 313조 원인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주식을 9조 3,829억 원어치만 보유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8일) 삼성전자 종가(4만 8,800원) 기준으로 삼성생명이 가진 지분 가치는 24조 원을 넘어선다. 다른 보험계열사 삼성화재도 마찬가지로 한도의 2배를 넘는 삼성전자 지분을 갖고 있다.

법이 정한 금액의 3배 가까이 지분을 보유할 수 있는 것은 주식가격을 평가하는 잣대가 달라서다. 보험업법 감독규정은 주식가치를 평가할 때 '취득원가'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러면 삼성전자 주식은 24조 원이 아닌 5천690억 원어치가 된다.

현재 은행이나 증권, 저축은행 등은 자산운용비율을 계산할 때 시가로 평가하는데 보험만 취득원가를 적용하고 있다. 보험사도 자산과 자기자본을 계산할 때는 시가를 반영한 장부가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일본 등 일부 국가에서 보험에 취득원가 기준을 적용하고는 있지만, 이때는 분모가 되는 자산도 취득원가 기준을 적용해 일관성을 갖는다.

이 때문에 박용진 민주당 의원은 지난 2018년 주식을 시장가격으로 평가하고, 자산의 3%를 초과하는 지분을 팔도록 강제하는 보험업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3% 초과분에 대해 바로 의결권을 제한하고 5년 이내에 지분을 처분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지배구조 변화 요구에도 삼성은 수년간 묵묵부답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공정거래위원장을 역임하던 2018년 5월 10일 10대 대기업집단 경영인과 간담회를 열고 정부의 재벌개혁 정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관계 당국도 삼성에 보험사를 통한 삼성전자 지배를 해소하라는 메시지를 꾸준히 보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재직하던 2018년 5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삼성의 문제는 삼성생명과 삼성화재가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이라며 "연말까지는 삼성에서 최소한 방향성을 알려주는 메시지는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수십조 원에 이르는 주식을 수개월 만에 처분하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는 보이라는 취지였다. 같은 달 말 삼성생명은 약 1조 원어치의 삼성전자 주식을 매각했다. '삼성이 반응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자사주 소각을 앞두고 금산법(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상 대기업집단 내 금융사의 비금융회사 지분율 제한 10% 선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2년간 삼성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삼성생명은 여전히 삼성전자의 최대주주이고,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문제로 더이상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말에서 지분 매각의 의지까지 읽기는 어려워 보인다.

삼성전자 지분 빼내 금융지주사 설립 추진했으나 '실패'

서울 서초동 삼성생명 본사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물론 삼성생명으로선 난감할 수 있다. 국민연금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큰 기관투자가로서 유가증권시장 시가총액의 30%에 근접하고 있는 삼성전자를 계열사라는 이유로 포트폴리오에 담지 못하면 오히려 보험가입자에게 불리한 것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실제로 삼성전자 주가는 꾸준히 상승했기 때문에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투자로 가입자가 손실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삼성생명이 가입자 입장을 고려해 삼성전자 비중을 높였다고 보긴 어렵다. 오히려 가입자의 수익을 총수 일가 몫으로 이전하려던 적은 있다. 2016년 금융지주사 설립을 추진했을 때다. 국정농단 특검 수사결과에 따르면 삼성 미래전략실은 삼성생명이 보유한 현금 3조 원과 삼성전자 등 계열사 지분 6조 원어치를 인적분할해 금융지주회사를 설립하는 방안을 마련해 금융위원회에 제안했다. 이 부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나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삼성생명이 금융지주사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기도 했다.

시장가격의 50분의 1 수준으로 평가된 삼성전자 지분을 일부 넘겨 금융지주를 세우고 단계적으로 매각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유배당 상품에 가입한 보험사 고객에게 돌아가야 할 삼성전자 투자수익을 지주사로 넘기는 꼴이다. 삼성의 계획대로 일이 풀렸다면 이 부회장 일가는 금융지주 지분을 약 40% 넘게 보유할 수 있었다. 현재 보유한 삼성생명 지분의 2배를 넘는 수준이다.

21대 국회에서 '삼성생명법' 다시 탄력받나

발렌베리 가문이 보유하고 있는 기업집단도 은행과 비금융회사를 동시에 보유한 금산복합체다. 하지만 금산분리 원칙이 없는 스웨덴에서도 가문이 보유한 은행인 SEB에서 지주회사에 속한 다른 기업의 지분을 보유하지 않고 있다. 집안 내에서 회사를 경영할 후계자를 정할 때도 지주회사와 은행의 대표를 각각 따로 두고 있다.

이 부회장이 "아이들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한 것이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제왕적 경영자의 퇴장을 의미할 순 있지만, 금융사를 통한 '간접지배' 구조를 개선하지 않고 발렌베리 방식을 따를 수는 없어 보인다.

현재 자산 5조 원이 넘는 대기업집단에서 순환출자로 가공자본을 만들어내는 관행은 거의 사라진 상태다. 삼성도 국정농단의 공범이 된 계기인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순환출자는 모두 정리했다. 하지만 순환출자가 사라졌다고 지배구조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고 보긴 어렵다.

이 부회장이 무노조경영과 세습을 포기한다고 밝힌 다음 한 발짝 나아갔다는 긍정적 평가와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는 부정적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하지만 그 사과에서 삼성의 고질적 문제로 꼽히는 지배구조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정부는 재벌개혁에 대해 '몰아치듯 하지 않고 점진적이고 긍정적 변화를 끌어내는' 방식을 강조해왔다. 한 기업을 대상으로 법을 바꾸는 식의 변화는 피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삼성이 이대로 지배구조 개선에 나서지 않는다면 '삼성생명법'으로 불리는 보험업법 개정안이 21대 국회에서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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