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남] 주말에 상급자 서랍 부수고…10억원대 횡령 뒤 ‘코인’ 있었다

입력 2020.05.09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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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건들은 대부분 1, 2심에서 해결되지만 특별한 사건이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는 게 현실이죠. 재판부의 고민 끝에 나온 생생한 하급심 최신 판례, 눈길을 끄는 판결들을 소개합니다.

암호화폐에 눈이 멀어 회사 계좌를 관리하게 된 틈을 타 거액의 횡령을 한 후 해외로 도주한 회사원의 처벌 수위는 어떨까요. 뒤늦게 죄를 뉘우친 후 스스로 입국하고, 암호화폐가 폭락하는 바람에 회사에 상당 부분 돈을 돌려주지 못하게 됐다면 또 어떨까요. 이와 관련된 최신 판례입니다.

■동료 직원 오후 반차 낸 사이…회사 OTP 수십 개 들고 퇴근

강남의 기업형 고급 한식당에서 근무하던 직원 A 씨는 수년간 회계 및 세무 업무를 담당해 왔습니다.

그런데 본래 식당의 계좌와 접근매체를 보관하던 재무팀의 다른 직원이 오후 반차를 낸 사이, A 씨는 이 직원을 대신해 잠깐 회사 계좌 관리업무를 대행하게 됐습니다.

견물생심이었을까요. A 씨는 그날 오후 3시쯤 회사 사무실에서 자회사인 'OO등심 00본점' 명의로 개설된 신한은행 계좌에서 6,200만 원을, 또 다른 자회사 명의로 개설된 신한은행 계좌에서 8,700만 원을 이체하는 등 자신의 은행 계좌들로 2회에 걸쳐 1억 4,900만 원을 옮겼습니다.

A 씨는 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날 오후 6시 반쯤 직원들이 퇴근할 무렵,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반차를 냈던 직원의 책상 서랍에서 식당 소유의 지점 계좌들과 연결된 OTP 보안카드 21개 및 주류카드 26장이 들어있는 박스를 통째로 들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A 씨는 다음 날 아침 8시 20분쯤에도 다시 회사를 찾았고, 주말에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은 틈을 이용해 상급자의 책상 서랍 자물쇠를 부수고 식당 본점 계좌와 연결된 OTP 보안카드 1개를 마저 갖고 나왔습니다.

■11억 원 이체 후 필리핀 도주…열흘 만에 귀국

A 씨는 자신의 집에서 돌아가 노트북을 이용해 또 다른 자회사인 'O싸롱 논현점'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훔친 OTP 보안카드를 이용해 계좌에 접속한 다음 자신의 우리은행 계좌로 1억 원을 옮긴 것을 비롯해 총 14회에 걸쳐 이틀간 회삿돈 10억 3,760만 원을 자신의 계좌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A 씨는 곧바로 필리핀으로 출국했습니다.

A씨가 이 같은 일을 저지른 이유는 바로 '코인' 때문이었습니다. A 씨는 자신의 계좌로 이체한 돈 가운데 10억 1,900만 원은 해외 및 국내 거래소를 통해 암호화폐를 매입하거나 가상화폐거래소의 자신 계좌에 옮겨놓는 한편, 나머지는 자신의 개인 채무를 변제하고 해외 도피자금으로 이용했습니다.

식당 측은 해외에 있던 A 씨를 필사적으로 설득해, 다른 직원이 보유했던 가상화폐 계좌를 통해 2019년 1월 23일과 25일 각각 796만 원과 4,874만 원씩을 변제받았습니다.

이후 죄를 후회한 A 씨는 임직원의 설득으로 인천공항으로 귀국했고, 입국하자마자 긴급 체포됐습니다.

검찰은 A 씨를 업무상 횡령 및 절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사기) 등으로 재판에 넘겼습니다. A 씨는 매입했던 가상화폐를 팔아 수사 과정에서 7억 5,156만 원을 추가로 상환하는 등 총 횡령액 11억 8,660만 원 가운데 8억 2,792만 원을 변제했습니다.

■회사와 합의 안 돼…징역 3년 실형 확정

1심인 서울중앙지법 제29형사부(재판장 강성수 류경은 강면구)는 A 씨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죄질이 매우 좋지 않다. 피해금이 약 12억 원으로 그 규모가 상당하고 범행 직후 필리핀으로 도주하기도 했다"며 "이 사건 범행으로 피해자에게 상당한 재산적 피해를 입혔을 뿐만 아니라 피고인과 오랜 기간 함께 근무했던 삼원가든 임직원에게 배신감과 함께 상당한 정신적 충격도 안겼다"고 지적했습니다.

재판부는 또 "피고인은 수사기관에서 식당 측의 비리 등을 폭로해 협상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고, 식당 측도 피고인에 대한 엄한 처벌을 원하고 있어 그 책임에 상응하는 처벌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재판부는 그러나 "피고인은 범행 이후 식당 임원 및 피고인 누나의 설득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10일 만에 스스로 귀국했고, 피해액 8억 3,000만 원 상당의 피해가 회복되도록 성실히 협조했다"면서 "피해금 중 피고인이 사용한 돈은 5,000만 원에 못 미치고, 반환되지 않은 돈 중 2억 원은 가상화폐 투자 후 기술적 이유로 회수가 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며 나머지 1억 원은 가상화폐 투자에 따른 평가손실 부분"이라며 유리한 정상을 참작해 징역 3년을 선고했습니다.

A 씨는 양형이 무겁다며 항소했지만, 서울고등법원 제10형사부(재판장 박형준 임영우 신용호)는 항소를 기각했고 사건은 확정됐습니다. 항소심에 이르기까지 식당 측의 용서를 받거나 쌍방 합의에 이르지 못한 점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민사소송도 진행됐습니다. 식당 측은 받지 못한 금액을 회수하기 위해 대표 명의로 A 씨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3억 5,867만 원을 변제하라며 소송을 냈습니다.

A 씨는 소송에 불출석했고, 1심인 서울중앙지법 37민사부(재판장 박석근 김경윤 김현영)는 지난달 23일 식당 측의 청구를 모두 받아들이는 무변론 판결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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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결남] 주말에 상급자 서랍 부수고…10억원대 횡령 뒤 ‘코인’ 있었다
    • 입력 2020-05-09 09:02:13
    취재K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건들은 대부분 1, 2심에서 해결되지만 특별한 사건이 아니면 잘 알려지지 않는 게 현실이죠. 재판부의 고민 끝에 나온 생생한 하급심 최신 판례, 눈길을 끄는 판결들을 소개합니다.

암호화폐에 눈이 멀어 회사 계좌를 관리하게 된 틈을 타 거액의 횡령을 한 후 해외로 도주한 회사원의 처벌 수위는 어떨까요. 뒤늦게 죄를 뉘우친 후 스스로 입국하고, 암호화폐가 폭락하는 바람에 회사에 상당 부분 돈을 돌려주지 못하게 됐다면 또 어떨까요. 이와 관련된 최신 판례입니다.

■동료 직원 오후 반차 낸 사이…회사 OTP 수십 개 들고 퇴근

강남의 기업형 고급 한식당에서 근무하던 직원 A 씨는 수년간 회계 및 세무 업무를 담당해 왔습니다.

그런데 본래 식당의 계좌와 접근매체를 보관하던 재무팀의 다른 직원이 오후 반차를 낸 사이, A 씨는 이 직원을 대신해 잠깐 회사 계좌 관리업무를 대행하게 됐습니다.

견물생심이었을까요. A 씨는 그날 오후 3시쯤 회사 사무실에서 자회사인 'OO등심 00본점' 명의로 개설된 신한은행 계좌에서 6,200만 원을, 또 다른 자회사 명의로 개설된 신한은행 계좌에서 8,700만 원을 이체하는 등 자신의 은행 계좌들로 2회에 걸쳐 1억 4,900만 원을 옮겼습니다.

A 씨는 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날 오후 6시 반쯤 직원들이 퇴근할 무렵,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반차를 냈던 직원의 책상 서랍에서 식당 소유의 지점 계좌들과 연결된 OTP 보안카드 21개 및 주류카드 26장이 들어있는 박스를 통째로 들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A 씨는 다음 날 아침 8시 20분쯤에도 다시 회사를 찾았고, 주말에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은 틈을 이용해 상급자의 책상 서랍 자물쇠를 부수고 식당 본점 계좌와 연결된 OTP 보안카드 1개를 마저 갖고 나왔습니다.

■11억 원 이체 후 필리핀 도주…열흘 만에 귀국

A 씨는 자신의 집에서 돌아가 노트북을 이용해 또 다른 자회사인 'O싸롱 논현점'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훔친 OTP 보안카드를 이용해 계좌에 접속한 다음 자신의 우리은행 계좌로 1억 원을 옮긴 것을 비롯해 총 14회에 걸쳐 이틀간 회삿돈 10억 3,760만 원을 자신의 계좌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A 씨는 곧바로 필리핀으로 출국했습니다.

A씨가 이 같은 일을 저지른 이유는 바로 '코인' 때문이었습니다. A 씨는 자신의 계좌로 이체한 돈 가운데 10억 1,900만 원은 해외 및 국내 거래소를 통해 암호화폐를 매입하거나 가상화폐거래소의 자신 계좌에 옮겨놓는 한편, 나머지는 자신의 개인 채무를 변제하고 해외 도피자금으로 이용했습니다.

식당 측은 해외에 있던 A 씨를 필사적으로 설득해, 다른 직원이 보유했던 가상화폐 계좌를 통해 2019년 1월 23일과 25일 각각 796만 원과 4,874만 원씩을 변제받았습니다.

이후 죄를 후회한 A 씨는 임직원의 설득으로 인천공항으로 귀국했고, 입국하자마자 긴급 체포됐습니다.

검찰은 A 씨를 업무상 횡령 및 절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사기) 등으로 재판에 넘겼습니다. A 씨는 매입했던 가상화폐를 팔아 수사 과정에서 7억 5,156만 원을 추가로 상환하는 등 총 횡령액 11억 8,660만 원 가운데 8억 2,792만 원을 변제했습니다.

■회사와 합의 안 돼…징역 3년 실형 확정

1심인 서울중앙지법 제29형사부(재판장 강성수 류경은 강면구)는 A 씨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죄질이 매우 좋지 않다. 피해금이 약 12억 원으로 그 규모가 상당하고 범행 직후 필리핀으로 도주하기도 했다"며 "이 사건 범행으로 피해자에게 상당한 재산적 피해를 입혔을 뿐만 아니라 피고인과 오랜 기간 함께 근무했던 삼원가든 임직원에게 배신감과 함께 상당한 정신적 충격도 안겼다"고 지적했습니다.

재판부는 또 "피고인은 수사기관에서 식당 측의 비리 등을 폭로해 협상하겠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고, 식당 측도 피고인에 대한 엄한 처벌을 원하고 있어 그 책임에 상응하는 처벌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재판부는 그러나 "피고인은 범행 이후 식당 임원 및 피고인 누나의 설득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10일 만에 스스로 귀국했고, 피해액 8억 3,000만 원 상당의 피해가 회복되도록 성실히 협조했다"면서 "피해금 중 피고인이 사용한 돈은 5,000만 원에 못 미치고, 반환되지 않은 돈 중 2억 원은 가상화폐 투자 후 기술적 이유로 회수가 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며 나머지 1억 원은 가상화폐 투자에 따른 평가손실 부분"이라며 유리한 정상을 참작해 징역 3년을 선고했습니다.

A 씨는 양형이 무겁다며 항소했지만, 서울고등법원 제10형사부(재판장 박형준 임영우 신용호)는 항소를 기각했고 사건은 확정됐습니다. 항소심에 이르기까지 식당 측의 용서를 받거나 쌍방 합의에 이르지 못한 점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민사소송도 진행됐습니다. 식당 측은 받지 못한 금액을 회수하기 위해 대표 명의로 A 씨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3억 5,867만 원을 변제하라며 소송을 냈습니다.

A 씨는 소송에 불출석했고, 1심인 서울중앙지법 37민사부(재판장 박석근 김경윤 김현영)는 지난달 23일 식당 측의 청구를 모두 받아들이는 무변론 판결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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