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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 입은 시신에 자상? 최후 항쟁 검시 기록
입력 2020.05.14 (22:07) 수정 2020.05.14 (22:40) 뉴스9(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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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5.18 당시 검시 기록을 분석하는 연속기획 순서입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80년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에 있던 시민군을 진압하면서 막을 내립니다.

오늘은 항쟁 마지막 날 숨진 사망자 17명의 기록을 곽선정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1980년 5월 27일 새벽.

엿새 전 금남로에서 철수했던 계엄군이 전남도청에 다시 진입합니다.

작전명은 '상무충정작전'.

최후까지 도청과 도청 앞 YWCA안에 남아있던 시민군 17명이 군의 총탄 등에 숨졌습니다.

당시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씨의 시신은 그날의 참상을 똑똑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상반신 전체에 3도 화상을 입었고 아랫배엔 흉기로 크게 베였습니다.

가족들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신 상태는 끔찍했습니다.

검찰 조서에는 화상을 입은 후에 자상이 생긴 걸로 추정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화상으로 쓰러진 윤 씨의 시신을 누군가 훼손했을 가능성도 남아있습니다.

[윤정희/윤상원 열사 동생 : "처음에 우리가 시체를 못 찾았어요. 시신을 보니까 머리도 터지고 화상을 입어버렸어요. 그래서 마음 아파요. 두 번 죽였잖아요."]

전남도청에 남았던 평범한 청년들과 학생들은 고도로 훈련받은 공수부대원들 앞에서 잔인하게 짓밟혔습니다.

교련복을 입고 있던 문재학 군은 배와 목에 총을 맞았고, 턱 부분이 골절되는 등 참혹한 모습이었습니다.

김종연 씨는 몸 5곳에서 총알이 관통한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신군부는 전남도청에 숨진 희생자들이 마치 시민군의 총에 사살된 것처럼 총기 종류를 왜곡하려 한 정황도 확인됐습니다.

서호빈 군은 사출구가 작다며 시민군이 들었던 카빈으로 기록했지만, 검찰은 M16으로 봤고, 문용동 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희송/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 : "공수특전사의 역사를 유지할 수 있는 놀라운 전과였다 이런식으로 평가를 했거든요. 군의 작전이 대단히 공격적이고 보복적이지 않았나 생각을 해보는 거죠."]

신군부는 진압작전을 광주의 안정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지만, 고의적이고, 무자비한 진압이었음을 희생자의 주검들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KBS 뉴스 곽선정입니다.
  • 화상 입은 시신에 자상? 최후 항쟁 검시 기록
    • 입력 2020-05-14 22:07:27
    • 수정2020-05-14 22:40:13
    뉴스9(광주)
[앵커]

5.18 당시 검시 기록을 분석하는 연속기획 순서입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80년 5월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에 있던 시민군을 진압하면서 막을 내립니다.

오늘은 항쟁 마지막 날 숨진 사망자 17명의 기록을 곽선정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1980년 5월 27일 새벽.

엿새 전 금남로에서 철수했던 계엄군이 전남도청에 다시 진입합니다.

작전명은 '상무충정작전'.

최후까지 도청과 도청 앞 YWCA안에 남아있던 시민군 17명이 군의 총탄 등에 숨졌습니다.

당시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씨의 시신은 그날의 참상을 똑똑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상반신 전체에 3도 화상을 입었고 아랫배엔 흉기로 크게 베였습니다.

가족들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신 상태는 끔찍했습니다.

검찰 조서에는 화상을 입은 후에 자상이 생긴 걸로 추정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화상으로 쓰러진 윤 씨의 시신을 누군가 훼손했을 가능성도 남아있습니다.

[윤정희/윤상원 열사 동생 : "처음에 우리가 시체를 못 찾았어요. 시신을 보니까 머리도 터지고 화상을 입어버렸어요. 그래서 마음 아파요. 두 번 죽였잖아요."]

전남도청에 남았던 평범한 청년들과 학생들은 고도로 훈련받은 공수부대원들 앞에서 잔인하게 짓밟혔습니다.

교련복을 입고 있던 문재학 군은 배와 목에 총을 맞았고, 턱 부분이 골절되는 등 참혹한 모습이었습니다.

김종연 씨는 몸 5곳에서 총알이 관통한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신군부는 전남도청에 숨진 희생자들이 마치 시민군의 총에 사살된 것처럼 총기 종류를 왜곡하려 한 정황도 확인됐습니다.

서호빈 군은 사출구가 작다며 시민군이 들었던 카빈으로 기록했지만, 검찰은 M16으로 봤고, 문용동 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희송/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 : "공수특전사의 역사를 유지할 수 있는 놀라운 전과였다 이런식으로 평가를 했거든요. 군의 작전이 대단히 공격적이고 보복적이지 않았나 생각을 해보는 거죠."]

신군부는 진압작전을 광주의 안정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지만, 고의적이고, 무자비한 진압이었음을 희생자의 주검들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KBS 뉴스 곽선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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