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40주년 다시 쓰는 검시 기록]④ 카빈 총상 사망자의 진실

입력 2020.05.1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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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총상 사망자에 대한 논란이 하나 있습니다. 계엄군이 사용했던 M16과 시민들이 들었던 카빈총에 의한 총상 구분 때문인데요.

당시 검시 보고는 엄밀하게 말해 '검안'이었습니다. 시신을 의사들이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검안이었습니다. 물론 검안에 참여했던 의사들은 최선을 다해 기록으로 남기려 했던 흔적이 검시 기록 곳곳에서 보입니다. 대학병원 의사들이 졸지에 검안에 참여하게 된 상황이었는데, 특히 총상 사망자 검안은 어려웠다고 합니다. 총상 검시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몸에 난 상처만을 보고 M16에 의한 것인지, 카빈에 의한 것인지 판단하는 건 더더욱 어려웠을 겁니다.

M16과 카빈 총상의 차이…폭도와 양민

그럼에도 총상이 M16과 카빈 중 어떤 총에 의해 사망했는가는 그때도, 지금도 중요합니다. M16에 맞았다면 그 당시 기준으로 '폭도'. 카빈에 맞았다면 시민군의 총에 맞은 '양민'으로 분류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와선 '카빈총에 맞은 5.18 사망자가 30여 명이 된다'며 폭도들에 의한 사망자가 이렇게 많았다는 논리로 이용됩니다.

그래서 취재팀은 카빈총에 의해 숨졌다는 30여 명의 검시기록을 분석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저녁. 광주에서 전남 담양 집으로 돌아가던 고규석 씨 일행은 광주교도소 옆을 지나다 계엄군의 무차별 총격을 받았습니다. 탑승자 4명 중 고규석 씨 등 두 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계엄군에게 붙잡힌 두 명도 폭행당했습니다.


숨진 두 사람의 검시 기록에는 계엄군이 사용한 'M16' 대신 '카빈' 총상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됐습니다. 그런데 당시 교도소에 주둔했던 공수부대의 군 기록에는 고규석 씨 일행의 피격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 일행이 교도소를 습격하려 해 자신들이 사살, 체포했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들은 집으로 돌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군 스스로 주요 전과(戰果)로 기록해놓고, 정작 검시 기록에는 시민군에 의해 숨진 것으로 남은 겁니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에 자기들의 정당성, 합리적인 거 이런 것들을 주장하기 위해서 조작하지 않았나 본다"고 말합니다.

비슷한 사례가 더 있습니다. 5월 20일 밤 계엄군에 의해 광주역 앞에서 희생된 김재화 씨와 김만두 씨. 두 사람 모두 카빈총에 맞아 숨진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하지만 21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후에야 시민들이 무장한 사실에 비춰보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계엄군의 M16 총에 맞아 희생된 것이 분명한데도 시민군에 의해 숨진 것으로 호도되는 5.18 역사.
이 때문에 40년이 지난 지금도 '시민군들이 쏜 총에 시민들이 희생됐다’는 왜곡 주장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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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 40주년 다시 쓰는 검시 기록]④ 카빈 총상 사망자의 진실
    • 입력 2020-05-17 08:01:51
    취재K
5.18 총상 사망자에 대한 논란이 하나 있습니다. 계엄군이 사용했던 M16과 시민들이 들었던 카빈총에 의한 총상 구분 때문인데요.

당시 검시 보고는 엄밀하게 말해 '검안'이었습니다. 시신을 의사들이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검안이었습니다. 물론 검안에 참여했던 의사들은 최선을 다해 기록으로 남기려 했던 흔적이 검시 기록 곳곳에서 보입니다. 대학병원 의사들이 졸지에 검안에 참여하게 된 상황이었는데, 특히 총상 사망자 검안은 어려웠다고 합니다. 총상 검시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몸에 난 상처만을 보고 M16에 의한 것인지, 카빈에 의한 것인지 판단하는 건 더더욱 어려웠을 겁니다.

M16과 카빈 총상의 차이…폭도와 양민

그럼에도 총상이 M16과 카빈 중 어떤 총에 의해 사망했는가는 그때도, 지금도 중요합니다. M16에 맞았다면 그 당시 기준으로 '폭도'. 카빈에 맞았다면 시민군의 총에 맞은 '양민'으로 분류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와선 '카빈총에 맞은 5.18 사망자가 30여 명이 된다'며 폭도들에 의한 사망자가 이렇게 많았다는 논리로 이용됩니다.

그래서 취재팀은 카빈총에 의해 숨졌다는 30여 명의 검시기록을 분석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저녁. 광주에서 전남 담양 집으로 돌아가던 고규석 씨 일행은 광주교도소 옆을 지나다 계엄군의 무차별 총격을 받았습니다. 탑승자 4명 중 고규석 씨 등 두 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계엄군에게 붙잡힌 두 명도 폭행당했습니다.


숨진 두 사람의 검시 기록에는 계엄군이 사용한 'M16' 대신 '카빈' 총상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됐습니다. 그런데 당시 교도소에 주둔했던 공수부대의 군 기록에는 고규석 씨 일행의 피격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 일행이 교도소를 습격하려 해 자신들이 사살, 체포했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들은 집으로 돌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었습니다.


군 스스로 주요 전과(戰果)로 기록해놓고, 정작 검시 기록에는 시민군에 의해 숨진 것으로 남은 겁니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에 자기들의 정당성, 합리적인 거 이런 것들을 주장하기 위해서 조작하지 않았나 본다"고 말합니다.

비슷한 사례가 더 있습니다. 5월 20일 밤 계엄군에 의해 광주역 앞에서 희생된 김재화 씨와 김만두 씨. 두 사람 모두 카빈총에 맞아 숨진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하지만 21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후에야 시민들이 무장한 사실에 비춰보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계엄군의 M16 총에 맞아 희생된 것이 분명한데도 시민군에 의해 숨진 것으로 호도되는 5.18 역사.
이 때문에 40년이 지난 지금도 '시민군들이 쏜 총에 시민들이 희생됐다’는 왜곡 주장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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