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40주년 다시 쓰는 검시 기록]⑤ 최후 항쟁 17명, 그들은 어떻게 죽음을 맞았나?

입력 2020.05.1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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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자별로 검시 기록을 분석하고, 유족들과 목격자들의 인터뷰와 진술 내용을 맞추다 보면 어느 사연 하나 쉬이 넘길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숨진 17명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계엄군이 도청 앞에서 시민들에게 집단 발포를 한 뒤 외곽으로 물러난 1980년 5월 21일. 이후 적어도 광주 도심에서는 별다른 불상사가 없었습니다. 이미 많은 시민이 희생돼 슬픔에 젖었지만 어려울 때 함께 나누는 이른바 '광주 공동체 정신'이 싹트는 시기였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하지만 계엄군이 다시 들어올 것이라는 공포는 날이 지날수록 커졌습니다.

5월 23일, 5월 24일, 5월 25일, 5월 26일....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임박했다는 사실은 도청 안에 남은 시민군도, 공포 속에 집에 있던 시민들도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절박한 목소리의 가두방송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도청에 남았던 시민 2백여 명은 죽음을 각오했던 겁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에 다시 진입합니다. 군의 작전명은 '상무충정작전'. 광주시민은 이날을 '최후 항쟁일'이라고 부릅니다.


3도 화상 입은 윤상원 열사..자상의 의미는?

이날 도청에 투입된 병력만 공수부대원 8백70여 명. 진압작전 중에 도청과 도청 앞 YWCA 안에 남아있던 시민군 17명이 군의 총탄 등에 숨졌습니다. 당시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의 시신은 그날의 참상을 똑똑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상반신 전체에 3도 화상을 입었고 아랫배엔 흉기로 크게 베였습니다. 가족들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신 상태는 끔찍했습니다. 검찰 조서에는 화상을 입은 후에 자상이 생긴 걸로 추정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화상으로 쓰러진 윤 씨의 시신을 누군가 훼손했을 가능성도 남아있습니다.


윤상원 열사의 동생 윤정희 씨는 "처음에 우리가 시체를 못 찾았어요. 시신을 보니까 머리도 터지고 화상을 입어버렸어요. 그래서 마음 아파요. 두 번 죽였잖아요."라고 말합니다.

17명 검시 기록...진압작전 '공격적·보복적'

전남도청에 남았던 평범한 청년들과 학생들은 고도로 훈련받은 공수부대원들 앞에서 잔인하게 짓밟혔습니다. 교련복을 입고 있던 문재학 군은 배와 목에 총을 맞았고, 턱 부분이 골절되는 등 참혹한 모습이었습니다. 김종연 씨는 몸 5곳에서 총알이 관통한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신군부는 전남도청에서 숨진 희생자들이 마치 시민군의 총에 사살된 것처럼 총기 종류를 왜곡하려 한 정황도 확인됐습니다.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는 "공수특전사의 역사를 유지할 수 있는 놀라운 전과였다, 이런 식으로 평가를 했거든요. 군의 작전이 대단히 공격적이고 보복적이지 않았나 생각을 해본다."고 말합니다.

신군부는 진압작전을 광주의 안정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지만, 고의적이고, 무자비한 진압이었음을 희생자의 주검들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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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 40주년 다시 쓰는 검시 기록]⑤ 최후 항쟁 17명, 그들은 어떻게 죽음을 맞았나?
    • 입력 2020-05-17 10:00:11
    취재K
사망자별로 검시 기록을 분석하고, 유족들과 목격자들의 인터뷰와 진술 내용을 맞추다 보면 어느 사연 하나 쉬이 넘길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숨진 17명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계엄군이 도청 앞에서 시민들에게 집단 발포를 한 뒤 외곽으로 물러난 1980년 5월 21일. 이후 적어도 광주 도심에서는 별다른 불상사가 없었습니다. 이미 많은 시민이 희생돼 슬픔에 젖었지만 어려울 때 함께 나누는 이른바 '광주 공동체 정신'이 싹트는 시기였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하지만 계엄군이 다시 들어올 것이라는 공포는 날이 지날수록 커졌습니다.

5월 23일, 5월 24일, 5월 25일, 5월 26일....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임박했다는 사실은 도청 안에 남은 시민군도, 공포 속에 집에 있던 시민들도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절박한 목소리의 가두방송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도청에 남았던 시민 2백여 명은 죽음을 각오했던 겁니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에 다시 진입합니다. 군의 작전명은 '상무충정작전'. 광주시민은 이날을 '최후 항쟁일'이라고 부릅니다.


3도 화상 입은 윤상원 열사..자상의 의미는?

이날 도청에 투입된 병력만 공수부대원 8백70여 명. 진압작전 중에 도청과 도청 앞 YWCA 안에 남아있던 시민군 17명이 군의 총탄 등에 숨졌습니다. 당시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의 시신은 그날의 참상을 똑똑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상반신 전체에 3도 화상을 입었고 아랫배엔 흉기로 크게 베였습니다. 가족들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신 상태는 끔찍했습니다. 검찰 조서에는 화상을 입은 후에 자상이 생긴 걸로 추정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화상으로 쓰러진 윤 씨의 시신을 누군가 훼손했을 가능성도 남아있습니다.


윤상원 열사의 동생 윤정희 씨는 "처음에 우리가 시체를 못 찾았어요. 시신을 보니까 머리도 터지고 화상을 입어버렸어요. 그래서 마음 아파요. 두 번 죽였잖아요."라고 말합니다.

17명 검시 기록...진압작전 '공격적·보복적'

전남도청에 남았던 평범한 청년들과 학생들은 고도로 훈련받은 공수부대원들 앞에서 잔인하게 짓밟혔습니다. 교련복을 입고 있던 문재학 군은 배와 목에 총을 맞았고, 턱 부분이 골절되는 등 참혹한 모습이었습니다. 김종연 씨는 몸 5곳에서 총알이 관통한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신군부는 전남도청에서 숨진 희생자들이 마치 시민군의 총에 사살된 것처럼 총기 종류를 왜곡하려 한 정황도 확인됐습니다.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는 "공수특전사의 역사를 유지할 수 있는 놀라운 전과였다, 이런 식으로 평가를 했거든요. 군의 작전이 대단히 공격적이고 보복적이지 않았나 생각을 해본다."고 말합니다.

신군부는 진압작전을 광주의 안정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지만, 고의적이고, 무자비한 진압이었음을 희생자의 주검들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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