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당해도 항의 못하는 ‘5인 미만 사업장’

입력 2020.06.02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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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여파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일자리를 위협받는 노동자가 크게 늘고 있습니다. 특히, 규모가 작은 업체일수록 피해가 극심한 상황입니다. 정부가 고용유지지원금 등 각종 지원책을 내놓고 있는데 노동자들의 일자리는 잘 지켜지고 있을까요?

■ "5인 미만 업체는 해고해도 아무 문제 없어"

1년간 광고디자인 업체에서 일한 A 씨는 5월 7일 구두로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코로나19로 회사 경영이 어렵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회사 사정으로 해고하더라도 최소 30일 전에는 노동자에게 알려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한 달 치 임금에 해당하는 해고수당을 지급해야 합니다. 당일 해고 통보를 받은 A 씨가 해고수당 지급을 요구하자 사장은 줄 수 없다며, 무급휴직 처리하겠다고 맞섰습니다.

회사 사정으로 무급휴직을 지정할 경우에는 임금의 70%에 해당하는 '휴업수당'을 지급해야 합니다. 하지만 5인 미만 업체의 경우에는 예외입니다. 결국, A 씨는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기약 없는 무급휴직, 사실상 실직과 다름없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취재진이 A 씨와 인터뷰하고 있다.취재진이 A 씨와 인터뷰하고 있다.

심지어 육아휴직 중에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은 경우도 있습니다. 몸을 고되게 쓰는 일이라 허리디스크가 생긴 B 씨는 지난 2월부터 1년간 육아 휴직하면서 몸을 추스르기로 회사와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난 5월 1일, B 씨는 갑자기 해고하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일방적인 통보에 항의했지만, 이번에도 업체 사장은 '5인 미만 사업장'의 특수성을 강조했습니다. B 씨는 "사장이 5인 미만 업체는 퇴직금이랑 해고수당만 챙겨주면 아무 문제 없다고 한다"며 "해결할 방법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B 씨 역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이들이 회사의 일방적인 통보에도 무기력하게 쫓겨난 이유는 회사 측 말대로 5인 미만 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현행 근로기준법을 보면 '5인 미만 사업장'은 휴업수당을 지급할 의무도 없고, 일방적으로 해고를 통보하더라도 퇴직금과 해고수당만 지급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근로기준법에서 정하고 있는 적용 범위 때문입니다.

근로기준법 11조, 5명 이상의 사업장에 한해 적용한다고 돼 있다.근로기준법 11조, 5명 이상의 사업장에 한해 적용한다고 돼 있다.

이 때문에 5인 미만 사업장은 근로시간 제한도 없을 뿐 아니라 연차휴가부터 연장·야간·휴일수당을 줘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근로기준법 11조 2항에 나온 '4명 이하 사업장에 대해 일부 규정을 적용할 수 있다'는 조항은 대통령령에 따라 퇴직금과 최저임금, 해고수당 정도가 해당합니다.

노동자들의 생존과 직결된 해고 문제 역시 보호받지 못합니다. '정당한 사유 없이' 갑자기 해고되더라도 노동자가 부당함을 주장하며 구제받을 방법은 없는 겁니다.

■ '사업장 쪼개기'...가짜 5인 미만 사업장 '꼼수'

애초 5인 이상의 사업장에만 근로기준법을 적용한 이유는 영세 사업장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사업장에 부담을 덜어주자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점을 노려 사업장을 나눠 등록하는 등 허위로 5인 미만 상태를 유지하는 꼼수 사업장만 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접수된 제보 내용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접수된 제보 내용

하지만 문제는 노동자 혼자서 한 사업장을 쪼개 등록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회계 장부부터 직원들의 계약 형태 등을 모두 파악해 고발하고, 증명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신분이다 보니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 역시 다른 세상 이야기입니다. 불안한 신분을 유지한 채 이런 부당함을 묵묵히 견디는 게 현실입니다.

코로나19 경제 위기...실직자 40%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근로기준법에서 정하는 최소한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5인 미만 사업장은 대표적인 노동권의 사각지대로 꼽힙니다. 하지만 코로나19같은 재난 상황에서 최전선에서 가장 먼저 피해를 감당하는 것은 모순적이게도 영세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입니다.

올해 1~4월 실직자 통계올해 1~4월 실직자 통계

미래통합당 추경호 의원이 통계청의 고용 관련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올해 1~4월 실직자 수는 모두 207만 6,000명입니다. 이 중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가 85만 5,000명으로 전체 비중의 40%를 넘습니다.

김하경 직장갑질119 변호사는 "근로기준법상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은 안 그래도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코로나19 같은 불안전성이 더 커지는 국가적인 재난 상황에서는 오롯이 노동자들이 그 피해를 부담하고 있다"며 "사업장 규모만으로 근로기준법을 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로 정부가 영세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안전망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코로나19가 휩쓴 지난 4달은 우리 사회 취약 계층의 삶이 얼마나 불안전한지 여과 없이 보여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영세업체노동자뿐 아니라 특수고용과 간접고용, 위탁계약 비정규직 등 사회 안전망이 미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이 일터에서 생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전 국민의 고용보험'이라는 대책을 제시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5인 미만 업체' 노동자들의 안전망에 대한 고민도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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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고 당해도 항의 못하는 ‘5인 미만 사업장’
    • 입력 2020-06-02 11:35:12
    취재K
코로나19 여파로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일자리를 위협받는 노동자가 크게 늘고 있습니다. 특히, 규모가 작은 업체일수록 피해가 극심한 상황입니다. 정부가 고용유지지원금 등 각종 지원책을 내놓고 있는데 노동자들의 일자리는 잘 지켜지고 있을까요?

■ "5인 미만 업체는 해고해도 아무 문제 없어"

1년간 광고디자인 업체에서 일한 A 씨는 5월 7일 구두로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코로나19로 회사 경영이 어렵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회사 사정으로 해고하더라도 최소 30일 전에는 노동자에게 알려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한 달 치 임금에 해당하는 해고수당을 지급해야 합니다. 당일 해고 통보를 받은 A 씨가 해고수당 지급을 요구하자 사장은 줄 수 없다며, 무급휴직 처리하겠다고 맞섰습니다.

회사 사정으로 무급휴직을 지정할 경우에는 임금의 70%에 해당하는 '휴업수당'을 지급해야 합니다. 하지만 5인 미만 업체의 경우에는 예외입니다. 결국, A 씨는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기약 없는 무급휴직, 사실상 실직과 다름없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취재진이 A 씨와 인터뷰하고 있다.
심지어 육아휴직 중에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은 경우도 있습니다. 몸을 고되게 쓰는 일이라 허리디스크가 생긴 B 씨는 지난 2월부터 1년간 육아 휴직하면서 몸을 추스르기로 회사와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난 5월 1일, B 씨는 갑자기 해고하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일방적인 통보에 항의했지만, 이번에도 업체 사장은 '5인 미만 사업장'의 특수성을 강조했습니다. B 씨는 "사장이 5인 미만 업체는 퇴직금이랑 해고수당만 챙겨주면 아무 문제 없다고 한다"며 "해결할 방법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B 씨 역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이들이 회사의 일방적인 통보에도 무기력하게 쫓겨난 이유는 회사 측 말대로 5인 미만 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현행 근로기준법을 보면 '5인 미만 사업장'은 휴업수당을 지급할 의무도 없고, 일방적으로 해고를 통보하더라도 퇴직금과 해고수당만 지급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근로기준법에서 정하고 있는 적용 범위 때문입니다.

근로기준법 11조, 5명 이상의 사업장에 한해 적용한다고 돼 있다.
이 때문에 5인 미만 사업장은 근로시간 제한도 없을 뿐 아니라 연차휴가부터 연장·야간·휴일수당을 줘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근로기준법 11조 2항에 나온 '4명 이하 사업장에 대해 일부 규정을 적용할 수 있다'는 조항은 대통령령에 따라 퇴직금과 최저임금, 해고수당 정도가 해당합니다.

노동자들의 생존과 직결된 해고 문제 역시 보호받지 못합니다. '정당한 사유 없이' 갑자기 해고되더라도 노동자가 부당함을 주장하며 구제받을 방법은 없는 겁니다.

■ '사업장 쪼개기'...가짜 5인 미만 사업장 '꼼수'

애초 5인 이상의 사업장에만 근로기준법을 적용한 이유는 영세 사업장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사업장에 부담을 덜어주자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점을 노려 사업장을 나눠 등록하는 등 허위로 5인 미만 상태를 유지하는 꼼수 사업장만 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접수된 제보 내용
하지만 문제는 노동자 혼자서 한 사업장을 쪼개 등록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회계 장부부터 직원들의 계약 형태 등을 모두 파악해 고발하고, 증명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신분이다 보니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 역시 다른 세상 이야기입니다. 불안한 신분을 유지한 채 이런 부당함을 묵묵히 견디는 게 현실입니다.

코로나19 경제 위기...실직자 40%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근로기준법에서 정하는 최소한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5인 미만 사업장은 대표적인 노동권의 사각지대로 꼽힙니다. 하지만 코로나19같은 재난 상황에서 최전선에서 가장 먼저 피해를 감당하는 것은 모순적이게도 영세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입니다.

올해 1~4월 실직자 통계
미래통합당 추경호 의원이 통계청의 고용 관련 자료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올해 1~4월 실직자 수는 모두 207만 6,000명입니다. 이 중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가 85만 5,000명으로 전체 비중의 40%를 넘습니다.

김하경 직장갑질119 변호사는 "근로기준법상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은 안 그래도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코로나19 같은 불안전성이 더 커지는 국가적인 재난 상황에서는 오롯이 노동자들이 그 피해를 부담하고 있다"며 "사업장 규모만으로 근로기준법을 차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로 정부가 영세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안전망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코로나19가 휩쓴 지난 4달은 우리 사회 취약 계층의 삶이 얼마나 불안전한지 여과 없이 보여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영세업체노동자뿐 아니라 특수고용과 간접고용, 위탁계약 비정규직 등 사회 안전망이 미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이 일터에서 생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전 국민의 고용보험'이라는 대책을 제시한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5인 미만 업체' 노동자들의 안전망에 대한 고민도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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