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격 당한 ‘친일 청산’…6월 6일은 ‘국치일’

입력 2020.06.04 (18:50) 수정 2020.06.04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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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당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청사

1949년 당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청사

1949년 6월 6일 오전 7시 서울 중구 남대문로 2가.

경찰 50여 명이 지금의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맞은 편에 있던 건물을 안팎으로 포위했다. 작전 지휘를 맡은 당시 중부경찰서장은 권총을 꺼냈다. 한 시간쯤 뒤, 이 건물 사무실로 출근하던 사람들이 줄줄이 중부경찰서로 잡혀갔다. 사무실은 난장판이 됐다. 경찰은 사무실에 있던 서류를 빼앗았고 집기를 부쉈다.

경찰이 습격한 곳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청사. 반민특위는 제헌국회가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특별법을 만들어 구성한 기구다. 이날 연행된 사람은 35명. 특위 위원과 직원 9명, 반민특위를 경호하던 특경대원 24명, 민간인 2명이었다. 경찰은 항의하는 특위 검찰관들을 수색하고 무장 해제시켰다.

공권력이 공권력을 습격한 희대의 사건이었다. 김구 선생이 암살되기 20일 전이었다. 친일파 처단을 위한 반민특위의 조사기능은 출범 여덟 달 만에 마비됐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이날을 '국치일'이라고 부른다.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김원웅 광복회장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김원웅 광복회장

반민특위 습격.. 6월 6일은 '국치일'

김원웅 회장은 오늘(4일)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1949년 6월 6일은 친일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폭란의 날"이라며 "이날부터 우리나라는 '친일파의, 친일파에 의한, 친일파를 위한' 나라가 됐다"고 개탄했다.

친일·반민족 세력이 일제강점기 34년 11개월간 자행한 반민족행위를 찾아내 처벌하는 임무를 맡았던 반민특위. 1948년 10월 12일 구성 당시 친일 조사대상자는 7,000명 정도로 예상됐다. 하지만 여덟 달은 턱없이 짧았다. 반민특위는 10%에도 못 미치는 682건을 조사했다. 그 가운데 221건을 기소했고, 재판 종결은 38건에 그쳤다. 이 습격사건 이후 반민특위 활동기간은 원래 임기보다 10개월 축소된 그해 8월 31일에 종료됐다.

친일파 청산은 물거품이 됐다. 그리고 현대사에서 현재까지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았다.

반민특위에 끌려가는 친일파 (김연수,최린)반민특위에 끌려가는 친일파 (김연수,최린)

 
반민특별재판부 재판 반민특별재판부 재판

광복회, '친일 경찰 폭란' 경찰청장 사과 요구

임우철 광복회 원로회의 의장은 반민특위 습격 사건이 '친일경찰의 폭란'이라며 경찰청장의 공개사과를 요구했다.

당시 경찰은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

반민특위는 친일재벌 박흥식을 시작으로 최린ㆍ이종형ㆍ이승우ㆍ박종양ㆍ김연수ㆍ문명기ㆍ최남선ㆍ이광수ㆍ배정자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줄줄이 체포했다. 여기에 노덕술, 최운하 등 경찰 간부들이 포함됐다. 친일경찰은 반민특위 해체 음모를 꾸몄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이 체포되자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을 관사로 직접 찾아가 석방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김상덕 위원장은 거부했다.

친일파가 주축이 된 경찰은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최운하가 구속되자 서울시경 산하 경찰 150여 명이 집단 사표를 냈다. 하루 전날인 1949년 6월 5일, 중부서장 윤기병, 종로서장 윤명운, 치안국 보안과장 이계무 등은 반민특위 특경대 무장해제와 해산을 위한 작전을 계획했다. 이승만의 '사전 양해'와 '방조'로 이날 습격 사건은 이들의 계획대로 실행됐다. 분노한 국회가 내각 총사퇴, 반민특위 무기와 문서의 원상회복, 내무차관과 치안국장의 파면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반민특위는 만신창이가 됐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경찰에게 총칼을 준 것은 국민을 지키라고 준 것인데, 이날 경찰은 민족반역자의 탐욕을 지킨 폭란의 범죄집단이 됐다"며 "국가권력이 불법 부당하게 자행됐던 잘못에 대해 경찰청장이 국민과 역사, 그리고 독립유공자들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미완의 '친일 청산' 마무리돼야 국민통합 가능

김 회장은 "한국 사회 모순의 핵심은 '친일 미청산'이고, 해방 이후 75년간 우리 사회 갈등의 근본원인이 되는 기저 질환"이라고 말했다. 친일 청산 없이 국민통합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친일·반민족 기득권 세력을 그대로 받들고 국민통합을 하자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모시고 내선일체를 하자는 주장과 다름없다"고 했다.

"친일에 뿌리를 두고 분단에 기생해 존재하는 기득권 세력들은 스스로 '보수'라고 하지만 이들이 지켜온 것이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고 김 회장은 반문했다.

그러면서 "일제를 지키기 위해 동족을 괴롭혔고, 해방 후에는 친일·반민족 권력의 독재를 지키기 위해 민초들을 억압해 온 사람들은 보수가 아니다"고 일갈했다.

반민특위 조사부 책임자들 (동그라미는 반민특위 이원용 조사관 겸 총무과장)반민특위 조사부 책임자들 (동그라미는 반민특위 이원용 조사관 겸 총무과장)

'폭란 71년, 민족정기 짓밟힌 날'…6월 6일 '인간 띠잇기'

광복회는 오랜 침묵을 이제는 거두겠다고 했다. 반민특위 습격사건 71년이 되는 오는 6일 오후 3시에 서울 중부경찰서 앞에서 '인간 띠잇기'행사를 한다. 이 행사를 시작으로 이 날을 '민족정기가 짓밟힌 날'로 정해 기억하겠다고 밝혔다.

제헌의회가 1948년 9월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

"국권피탈에 적극 협력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의원이 된 자,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을 살상·박해한 자는 최고 무기징역 최하 5년 이상의 징역, 직·간접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재산몰수에 처한다"고 돼있다.

하지만 이 법에 따른 공소시효는 친일경찰 습격사건을 계기로 앞당겨져 1949년 8월31일 끝이 났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현재가 과거를 묻어버리면 지하에서 증식한'종양'이 우리의 미래를 암흑으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시민들에게 '친일 청산'에 동행을 청한 광복회는 말했다.
"'친일 청산'을 마무리하는 것이 잠자는 정의를 세우는 길이고, 반민족범죄에 공소시효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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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6-04 18:50:58
    • 수정2020-06-04 18:51:36
    취재K

1949년 당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청사

1949년 6월 6일 오전 7시 서울 중구 남대문로 2가.

경찰 50여 명이 지금의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맞은 편에 있던 건물을 안팎으로 포위했다. 작전 지휘를 맡은 당시 중부경찰서장은 권총을 꺼냈다. 한 시간쯤 뒤, 이 건물 사무실로 출근하던 사람들이 줄줄이 중부경찰서로 잡혀갔다. 사무실은 난장판이 됐다. 경찰은 사무실에 있던 서류를 빼앗았고 집기를 부쉈다.

경찰이 습격한 곳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청사. 반민특위는 제헌국회가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특별법을 만들어 구성한 기구다. 이날 연행된 사람은 35명. 특위 위원과 직원 9명, 반민특위를 경호하던 특경대원 24명, 민간인 2명이었다. 경찰은 항의하는 특위 검찰관들을 수색하고 무장 해제시켰다.

공권력이 공권력을 습격한 희대의 사건이었다. 김구 선생이 암살되기 20일 전이었다. 친일파 처단을 위한 반민특위의 조사기능은 출범 여덟 달 만에 마비됐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이날을 '국치일'이라고 부른다.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김원웅 광복회장
반민특위 습격.. 6월 6일은 '국치일'

김원웅 회장은 오늘(4일)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1949년 6월 6일은 친일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폭란의 날"이라며 "이날부터 우리나라는 '친일파의, 친일파에 의한, 친일파를 위한' 나라가 됐다"고 개탄했다.

친일·반민족 세력이 일제강점기 34년 11개월간 자행한 반민족행위를 찾아내 처벌하는 임무를 맡았던 반민특위. 1948년 10월 12일 구성 당시 친일 조사대상자는 7,000명 정도로 예상됐다. 하지만 여덟 달은 턱없이 짧았다. 반민특위는 10%에도 못 미치는 682건을 조사했다. 그 가운데 221건을 기소했고, 재판 종결은 38건에 그쳤다. 이 습격사건 이후 반민특위 활동기간은 원래 임기보다 10개월 축소된 그해 8월 31일에 종료됐다.

친일파 청산은 물거품이 됐다. 그리고 현대사에서 현재까지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았다.

반민특위에 끌려가는 친일파 (김연수,최린)
 반민특별재판부 재판
광복회, '친일 경찰 폭란' 경찰청장 사과 요구

임우철 광복회 원로회의 의장은 반민특위 습격 사건이 '친일경찰의 폭란'이라며 경찰청장의 공개사과를 요구했다.

당시 경찰은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

반민특위는 친일재벌 박흥식을 시작으로 최린ㆍ이종형ㆍ이승우ㆍ박종양ㆍ김연수ㆍ문명기ㆍ최남선ㆍ이광수ㆍ배정자 등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줄줄이 체포했다. 여기에 노덕술, 최운하 등 경찰 간부들이 포함됐다. 친일경찰은 반민특위 해체 음모를 꾸몄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이 체포되자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을 관사로 직접 찾아가 석방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김상덕 위원장은 거부했다.

친일파가 주축이 된 경찰은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최운하가 구속되자 서울시경 산하 경찰 150여 명이 집단 사표를 냈다. 하루 전날인 1949년 6월 5일, 중부서장 윤기병, 종로서장 윤명운, 치안국 보안과장 이계무 등은 반민특위 특경대 무장해제와 해산을 위한 작전을 계획했다. 이승만의 '사전 양해'와 '방조'로 이날 습격 사건은 이들의 계획대로 실행됐다. 분노한 국회가 내각 총사퇴, 반민특위 무기와 문서의 원상회복, 내무차관과 치안국장의 파면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반민특위는 만신창이가 됐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경찰에게 총칼을 준 것은 국민을 지키라고 준 것인데, 이날 경찰은 민족반역자의 탐욕을 지킨 폭란의 범죄집단이 됐다"며 "국가권력이 불법 부당하게 자행됐던 잘못에 대해 경찰청장이 국민과 역사, 그리고 독립유공자들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미완의 '친일 청산' 마무리돼야 국민통합 가능

김 회장은 "한국 사회 모순의 핵심은 '친일 미청산'이고, 해방 이후 75년간 우리 사회 갈등의 근본원인이 되는 기저 질환"이라고 말했다. 친일 청산 없이 국민통합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친일·반민족 기득권 세력을 그대로 받들고 국민통합을 하자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모시고 내선일체를 하자는 주장과 다름없다"고 했다.

"친일에 뿌리를 두고 분단에 기생해 존재하는 기득권 세력들은 스스로 '보수'라고 하지만 이들이 지켜온 것이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고 김 회장은 반문했다.

그러면서 "일제를 지키기 위해 동족을 괴롭혔고, 해방 후에는 친일·반민족 권력의 독재를 지키기 위해 민초들을 억압해 온 사람들은 보수가 아니다"고 일갈했다.

반민특위 조사부 책임자들 (동그라미는 반민특위 이원용 조사관 겸 총무과장)
'폭란 71년, 민족정기 짓밟힌 날'…6월 6일 '인간 띠잇기'

광복회는 오랜 침묵을 이제는 거두겠다고 했다. 반민특위 습격사건 71년이 되는 오는 6일 오후 3시에 서울 중부경찰서 앞에서 '인간 띠잇기'행사를 한다. 이 행사를 시작으로 이 날을 '민족정기가 짓밟힌 날'로 정해 기억하겠다고 밝혔다.

제헌의회가 1948년 9월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

"국권피탈에 적극 협력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의원이 된 자,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을 살상·박해한 자는 최고 무기징역 최하 5년 이상의 징역, 직·간접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재산몰수에 처한다"고 돼있다.

하지만 이 법에 따른 공소시효는 친일경찰 습격사건을 계기로 앞당겨져 1949년 8월31일 끝이 났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현재가 과거를 묻어버리면 지하에서 증식한'종양'이 우리의 미래를 암흑으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시민들에게 '친일 청산'에 동행을 청한 광복회는 말했다.
"'친일 청산'을 마무리하는 것이 잠자는 정의를 세우는 길이고, 반민족범죄에 공소시효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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