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잘 있거라 전우들아”…통도사에 새긴 6·25 전쟁 부상병 낙서

입력 2020.06.25 (21:13) 수정 2020.06.25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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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양산 통도사는 국내 3대 사찰 가운데 한 곳입니다. 지금은 여느 사찰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장소지만, 70년 전에는 조금 다른 역할을 했습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 통도사 법당 곳곳에는 부상병들이 가득했습니다.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리고, 치료시설도 마땅히 없던 터라 사찰이 '야전병원' 역할을 한 겁니다.


■ "잘 있거라 전우들아"…통도사에 새긴 6·25 전쟁 부상병 낙서

보물 제1827호로 지정된 법당, 통도사 대광명전에는 그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법당 안 나무기둥과 내·외벽 곳곳에는 전쟁에 나섰던 부상병들이 연필이나 날카로운 도구 등으로 새긴 낙서들이 가득합니다.


치열한 전투 상황을 보여주듯 탱크와 철모 그림에서부터, 부상병 자신이나 가족, 연인으로 추정되는 이름들도 있습니다. 전우애를 담은 한 편의 시도 눈에 띕니다. 모두 70년 전,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에 새긴 것으로 보입니다.


이병길 향토사학자는 "법당에 '정전이 웬 말'이라는 글귀가 있다"며 "1951년 7월 정전 반대궐기대회가 있었는데, 전쟁 상황이 아니면 '정전'이란 단어를 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 "육군병원 분원 설치…부상병 3천여 명 치료"

통도사가 6·25 전쟁 때 야전병원으로 사용됐다는 기록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해 9월, 사찰 시설물을 점검하던 중에 불당 문건이 발견됐습니다. 통도사에서 수련하던 구화 스님이 쓴 '조성연기문'으로 통도사 용화전의 미륵존불을 모신 이유를 적은 기록인데, 여기에 관련 내용이 포함된 겁니다.


6·25 전쟁 뒤, 3천여 명의 부상병들이 통도사에 들어와 치료를 받았고 전쟁 막바지인 1952년 4월쯤 모두 나갔다는 내용부터, 수술실과 치료실 등으로 쓰였던 법당과 암자들에 군인들이 주둔했다는 내용도 기록됐습니다.

스님들과 마을 주민의 입으로 전해졌던 기억이 '기록'으로 남게 된 겁니다. 올해 89살로 통도사 주변에서 사는 마을 주민 안정철 어르신은 취재진에게 "그 시절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이라며, "통도사에서 흰 천을 덮은 들 것들과 소총을 어깨에 멘 군인들을 수시로 목격했다"고 말했습니다.

■ 격동기 중요 자료지만, 국가 차원의 관심은 부족해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격동기 중요자료. 하지만 국가 차원의 연구와 관심은 부족하기만 합니다.

통도사는 지난해 '조성연기문' 발견 당시, 국방부와 국가기록원 등에 구체적 사실 확인을 위해 조사와 보존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지만, 아직 제대로 된 답변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이병길 향토 사학자는 "발견이 됐다고 해도 보존이 되지 않는다면 잊히는 문화유산이 될 수밖에 없다"며 "국가 차원에서 나서지 않는다면 역사적 기록이 소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넋을 위로하려면"


"하루빨리 이 사실이 공식 인정돼야,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요."

통도사 지범스님의 말씀입니다. 스님은 당시 치료받은 부상병 3천여 명 가운데 지금은 숨진 이름 모를 장병들을 위해 위령제를 치를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낙서와 조성연기문 등을 근거로 '통도사에 육군병원 분원이 설치됐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60만 명이 넘는 국군이 다치고 목숨을 잃은 현대사의 비극 '6.25 전쟁', 작은 역사적 기록이라도 소중히 아끼고 보존해야, 이 땅에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 아닐까요.

6.25 전쟁 70주년을 맞는 오늘, 역사적 기록에 무관심한 관계부처의 태도가 더욱 아쉽게 느껴집니다.

[연관 기사] “잘 있거라 전우들아”…통도사에 새긴 한국전쟁 부상병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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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잘 있거라 전우들아”…통도사에 새긴 6·25 전쟁 부상병 낙서
    • 입력 2020-06-25 21:13:19
    • 수정2020-06-25 22:09:01
    취재후·사건후
경남 양산 통도사는 국내 3대 사찰 가운데 한 곳입니다. 지금은 여느 사찰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장소지만, 70년 전에는 조금 다른 역할을 했습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 통도사 법당 곳곳에는 부상병들이 가득했습니다.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리고, 치료시설도 마땅히 없던 터라 사찰이 '야전병원' 역할을 한 겁니다.


■ "잘 있거라 전우들아"…통도사에 새긴 6·25 전쟁 부상병 낙서

보물 제1827호로 지정된 법당, 통도사 대광명전에는 그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법당 안 나무기둥과 내·외벽 곳곳에는 전쟁에 나섰던 부상병들이 연필이나 날카로운 도구 등으로 새긴 낙서들이 가득합니다.


치열한 전투 상황을 보여주듯 탱크와 철모 그림에서부터, 부상병 자신이나 가족, 연인으로 추정되는 이름들도 있습니다. 전우애를 담은 한 편의 시도 눈에 띕니다. 모두 70년 전,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에 새긴 것으로 보입니다.


이병길 향토사학자는 "법당에 '정전이 웬 말'이라는 글귀가 있다"며 "1951년 7월 정전 반대궐기대회가 있었는데, 전쟁 상황이 아니면 '정전'이란 단어를 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 "육군병원 분원 설치…부상병 3천여 명 치료"

통도사가 6·25 전쟁 때 야전병원으로 사용됐다는 기록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해 9월, 사찰 시설물을 점검하던 중에 불당 문건이 발견됐습니다. 통도사에서 수련하던 구화 스님이 쓴 '조성연기문'으로 통도사 용화전의 미륵존불을 모신 이유를 적은 기록인데, 여기에 관련 내용이 포함된 겁니다.


6·25 전쟁 뒤, 3천여 명의 부상병들이 통도사에 들어와 치료를 받았고 전쟁 막바지인 1952년 4월쯤 모두 나갔다는 내용부터, 수술실과 치료실 등으로 쓰였던 법당과 암자들에 군인들이 주둔했다는 내용도 기록됐습니다.

스님들과 마을 주민의 입으로 전해졌던 기억이 '기록'으로 남게 된 겁니다. 올해 89살로 통도사 주변에서 사는 마을 주민 안정철 어르신은 취재진에게 "그 시절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이라며, "통도사에서 흰 천을 덮은 들 것들과 소총을 어깨에 멘 군인들을 수시로 목격했다"고 말했습니다.

■ 격동기 중요 자료지만, 국가 차원의 관심은 부족해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격동기 중요자료. 하지만 국가 차원의 연구와 관심은 부족하기만 합니다.

통도사는 지난해 '조성연기문' 발견 당시, 국방부와 국가기록원 등에 구체적 사실 확인을 위해 조사와 보존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지만, 아직 제대로 된 답변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이병길 향토 사학자는 "발견이 됐다고 해도 보존이 되지 않는다면 잊히는 문화유산이 될 수밖에 없다"며 "국가 차원에서 나서지 않는다면 역사적 기록이 소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넋을 위로하려면"


"하루빨리 이 사실이 공식 인정돼야,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요."

통도사 지범스님의 말씀입니다. 스님은 당시 치료받은 부상병 3천여 명 가운데 지금은 숨진 이름 모를 장병들을 위해 위령제를 치를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낙서와 조성연기문 등을 근거로 '통도사에 육군병원 분원이 설치됐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60만 명이 넘는 국군이 다치고 목숨을 잃은 현대사의 비극 '6.25 전쟁', 작은 역사적 기록이라도 소중히 아끼고 보존해야, 이 땅에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 아닐까요.

6.25 전쟁 70주년을 맞는 오늘, 역사적 기록에 무관심한 관계부처의 태도가 더욱 아쉽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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