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폭격’ 이야포의 비극…“6·25 민간인 학살 규명해야”
입력 2020.06.25 (22:44)
수정 2020.06.25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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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여수에는 이야포라는 작은 섬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이곳에서 미군이 피난선에 폭격을 가해 민간인이 떼죽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올해 말 꾸려질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상 규명이 필요해보입니다.
양창희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6.25가 일어났을 때 16살 소년이었던 이춘혁 씨.
부모와 5남매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온 뒤 군의 지시에 따라 배를 타고 여수로 향했습니다.
갑작스런 공중 폭격을 맞딱뜨린 건 1950년 8월 3일 오전 여수 안도 이야포 해변에서였습니다.
[이춘혁/86/여수 이야포 사건 유족 : "선발대를 제가 봤습니다. 보니까 눈이, 서로 봤다고 이렇게. 조종사가 이렇게 내다보더라고. 배에다가. 비행기가 돌더니, 두 번째 (비행기가) 배에다가 기관총 사격했어요."]
네 차례의 폭격에 숨진 아버지와 어머니, 두 동생을 뒤로 하고 겨우 섬을 빠져나온 그때를 이 씨는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춘혁/86/여수 이야포 사건 유족 : "이쪽에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길래 뒤로 돌아가 봤어요. 역시 또 여기도 사람이 많이 죽어 있더라고. 시신들 다 배에다 싣고, 기름 뿌리고, 불 질렀다고 하더라고."]
이 씨 가족처럼 이야포 해변에서 폭격으로 희생된 피난민들은 150여 명으로 추정됩니다.
며칠 뒤 근처 두룩여 해상 등에서도 조기 등을 잡던 어부들이 폭격을 당했는데, 10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야포와 두룩여 사건의 피해 사실을 공식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지도 않은 남해안의 작은 섬이 폭격당한 이유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김병호/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 :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이 있죠. 왜 미군기는 폭격을 가했는가, 왜 경찰들은 정지 명령을 내려서 피난선을 이야포에 정박을 시켰나."]
여수 이야포 등의 학살 사건은 피해 규모가 크고, 6.25 당시의 다른 민간인 학살과도 연관성이 많은 만큼 추가 진상 규명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박성미/여수시의원 : "평화공원에서부터 조례,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생존자에 대한 작은 지원이 이분들의 명예 회복에 조금이라도 디딤돌이..."]
이 밖에 순천·광양·곡성 등 전남 10여 곳에서도 미군의 폭격으로 민간인 다수가 숨졌지만, 기록이 부족해 진실화해위원회의 인정을 받지 못한 상황.
오는 12월 꾸려질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6.25 당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파헤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KBS 뉴스 양창희입니다.
여수에는 이야포라는 작은 섬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이곳에서 미군이 피난선에 폭격을 가해 민간인이 떼죽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올해 말 꾸려질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상 규명이 필요해보입니다.
양창희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6.25가 일어났을 때 16살 소년이었던 이춘혁 씨.
부모와 5남매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온 뒤 군의 지시에 따라 배를 타고 여수로 향했습니다.
갑작스런 공중 폭격을 맞딱뜨린 건 1950년 8월 3일 오전 여수 안도 이야포 해변에서였습니다.
[이춘혁/86/여수 이야포 사건 유족 : "선발대를 제가 봤습니다. 보니까 눈이, 서로 봤다고 이렇게. 조종사가 이렇게 내다보더라고. 배에다가. 비행기가 돌더니, 두 번째 (비행기가) 배에다가 기관총 사격했어요."]
네 차례의 폭격에 숨진 아버지와 어머니, 두 동생을 뒤로 하고 겨우 섬을 빠져나온 그때를 이 씨는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춘혁/86/여수 이야포 사건 유족 : "이쪽에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길래 뒤로 돌아가 봤어요. 역시 또 여기도 사람이 많이 죽어 있더라고. 시신들 다 배에다 싣고, 기름 뿌리고, 불 질렀다고 하더라고."]
이 씨 가족처럼 이야포 해변에서 폭격으로 희생된 피난민들은 150여 명으로 추정됩니다.
며칠 뒤 근처 두룩여 해상 등에서도 조기 등을 잡던 어부들이 폭격을 당했는데, 10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야포와 두룩여 사건의 피해 사실을 공식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지도 않은 남해안의 작은 섬이 폭격당한 이유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김병호/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 :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이 있죠. 왜 미군기는 폭격을 가했는가, 왜 경찰들은 정지 명령을 내려서 피난선을 이야포에 정박을 시켰나."]
여수 이야포 등의 학살 사건은 피해 규모가 크고, 6.25 당시의 다른 민간인 학살과도 연관성이 많은 만큼 추가 진상 규명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박성미/여수시의원 : "평화공원에서부터 조례,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생존자에 대한 작은 지원이 이분들의 명예 회복에 조금이라도 디딤돌이..."]
이 밖에 순천·광양·곡성 등 전남 10여 곳에서도 미군의 폭격으로 민간인 다수가 숨졌지만, 기록이 부족해 진실화해위원회의 인정을 받지 못한 상황.
오는 12월 꾸려질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6.25 당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파헤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KBS 뉴스 양창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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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2020-06-25 23: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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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에는 이야포라는 작은 섬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이곳에서 미군이 피난선에 폭격을 가해 민간인이 떼죽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올해 말 꾸려질 2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상 규명이 필요해보입니다.
양창희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6.25가 일어났을 때 16살 소년이었던 이춘혁 씨.
부모와 5남매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온 뒤 군의 지시에 따라 배를 타고 여수로 향했습니다.
갑작스런 공중 폭격을 맞딱뜨린 건 1950년 8월 3일 오전 여수 안도 이야포 해변에서였습니다.
[이춘혁/86/여수 이야포 사건 유족 : "선발대를 제가 봤습니다. 보니까 눈이, 서로 봤다고 이렇게. 조종사가 이렇게 내다보더라고. 배에다가. 비행기가 돌더니, 두 번째 (비행기가) 배에다가 기관총 사격했어요."]
네 차례의 폭격에 숨진 아버지와 어머니, 두 동생을 뒤로 하고 겨우 섬을 빠져나온 그때를 이 씨는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춘혁/86/여수 이야포 사건 유족 : "이쪽에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길래 뒤로 돌아가 봤어요. 역시 또 여기도 사람이 많이 죽어 있더라고. 시신들 다 배에다 싣고, 기름 뿌리고, 불 질렀다고 하더라고."]
이 씨 가족처럼 이야포 해변에서 폭격으로 희생된 피난민들은 150여 명으로 추정됩니다.
며칠 뒤 근처 두룩여 해상 등에서도 조기 등을 잡던 어부들이 폭격을 당했는데, 10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야포와 두룩여 사건의 피해 사실을 공식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지도 않은 남해안의 작은 섬이 폭격당한 이유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김병호/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사 : "여러 가지 궁금한 것이 있죠. 왜 미군기는 폭격을 가했는가, 왜 경찰들은 정지 명령을 내려서 피난선을 이야포에 정박을 시켰나."]
여수 이야포 등의 학살 사건은 피해 규모가 크고, 6.25 당시의 다른 민간인 학살과도 연관성이 많은 만큼 추가 진상 규명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박성미/여수시의원 : "평화공원에서부터 조례,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생존자에 대한 작은 지원이 이분들의 명예 회복에 조금이라도 디딤돌이..."]
이 밖에 순천·광양·곡성 등 전남 10여 곳에서도 미군의 폭격으로 민간인 다수가 숨졌지만, 기록이 부족해 진실화해위원회의 인정을 받지 못한 상황.
오는 12월 꾸려질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6.25 당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파헤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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