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훈의 시사본부] “나라위해 목숨 잃었는데 내 몸은 70년 째 차가운 전쟁터에…영혼이 있다면 얼마나 한이 맺히겠나”

입력 2020.06.26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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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 위해 희생한 사람은 국가가 끝까지 책임져야... 전후 복구하느라 모른 척 해와
- 용사님들이 나라 위해서 목숨 바쳤다면, 나는 유해를 찾는데 목숨 바치겠다 각오
- 누가 전쟁터 나가고 싶었겠나... 그렇게 목숨 잃었는데 70년 동안 아무도 찾아주질 않아
- 새소리, 바람소리 벗 삼아 70년 지내는데, 영혼이 있다면 얼마나 한이 맺히겠나
- 포천 요골서 로켓포 끌어안고 그대로 숨져있는 모습의 유해 나와... 눈물 많이 흘려
- 지금은 시골에서 20년간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 하고 있어, 그것이 마지막 임무
- 이름 없는 무명용사가 세상에 어디있나? 다 이름 있어... DNA 감식으로 이름 찾아줘야
- 유해발굴은 제보와 유가족의 DNA 등록이 중요... 1577-5625 전화하면 안내 가능

■ 프로그램명 : 오태훈의 시사본부
■ 코너명 : 시사본부 초대석
■ 방송시간 : 6월 26일(금요일) 12:20~14:00 KBS 1라디오
■ 출연자 : 이용석 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발굴과장



▷ 오태훈 : 어제 6.25 전쟁주년 추념식 혹시 보셨습니까? 북한에서 발굴되어서 미국 하와이에서 보관중이던 유해 가운데 국군 전사자로 판정된 유해 147구가 그제 우리나라로 돌아왔고요. 이중에 7명은 신원이 확인됐습니다. 그리고 바로 어제 열린 6.25전쟁 70주년 기념행사장에서 이분들의 70년 만의 복귀 신고가 이루어졌습니다. 대통령이 직접 유해를 맞이했고 참전 기장을 수요하기도 했습니다. KBS1라디오 오태훈의 시사본부 금요초대석 70년 만에 복귀 신고가 될 수 있게끔 해주신 분입니다. 유해 발굴의 산증인, 이용석 전 유해발굴단 발굴과장과 함께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이용석 :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태훈 : 저희가 감사드립니다. 어려운 걸음 해주셨습니다. 먼저 어제 그 복귀 신고 보셨어요?

▶ 이용석 : 보고 한편으로는 감동이 있고 한편으로는 아직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는 생각에 정말 국민들이 다함께 참여해서 단 한 구의 유해를 찾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런 각오를 해봤습니다.

▷ 오태훈 : 그 장면 보시면서 좀 소감이 남다르셨을 것 같아요. 많은 생각도 나셨을 것 같고.

▶ 이용석 : 아무래도 제가 99년 9월에 처음으로 계획했던 업무니까 정말 울컥 할 때도 있고 1명, 1명 호명할 때마다. 또 한편으로는 저게 그 유해뿐만 아니라 지금 휴전선 이남에 있는 우리 유해도 수없이 많은데 너무 시간이 흘러가고 정말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 한편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 오태훈 : 그러니까 이용석 과장께서 99년부터 이 일을 하셨다고 하셨잖아요.

▶ 이용석 : 99년 9월에 대한민국 장교로서 처음으로 유해발굴이라는 임무를 부여 받아서 계획을 해서 그렇게 한 20여 년간 했습니다.

▷ 오태훈 : 그 임무가 왜 99년도에 와서야.

▶ 이용석 : 그러니까 그것이 저도 참 마음이 아팠던 것이 고급과정 교육까지 다 받았지만 어디에서도 전사자가 남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막상 임무를 부여받고 현장에 가보니까 이건 흙에 덮이지도 않고 낙엽이 그 위에 그대로 쌓인 채로 발굴되는 그 모습을 제 눈으로 생생히 보면서 이야, 나라도 내 자식 군대 보내기가 참 겁나겠다, 이렇다면. 민주주의 특히 선진국이라는 어떤 척도라는 것은 나라를 위해 희생된 자는 끝까지 국가가 책임을 지어준다고.

▷ 오태훈 : 국가가 책임져야죠.

▶ 이용석 : 그렇습니다. 미국과 같은 그런 모델이 우리에게도 빨리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감정을 갖게 된 것이 이 사업이 시작했는데 우리는 너무 늦었죠. 모르고서 안 한 것이 아니고 사실 알면서도 우리가 알다시피 전후 복구 과정에 많은 시간과 어떤 경제력이 소모되다 보니까 이런 데에 알면서도 좋게 이야기하면 정말 세월을 보고 모르는 척 지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 오태훈 : 모르는 척 지내왔던 것이. 그러니까 손을 대야 하는데 반드시 해야 할 일인데도 불구하고 시간은 많이 흘러버렸고 그 일을 누군가가 먼저 해야 하는데 그 일을 하신 거 아니에요.

▶ 이용석 : 전혀 우리가 조직적인 국가 단위 또는 아니면 국방부 단위의 이런 조직적인 지금과 같은 체계를 가지고 한 적은 정말 없습니다. 없고 이것은 제가 처음으로 계획해서 실시가 되게 된 것이고. 물론 저도 명령을 받았으니까 했죠, 군인이니까. 그러나 그전까지는 정말 우리 사회는 그것이 없이 다만 참전용사들이 내 전우를 찾기 위해서 안타까운 마음에 또는 유가족들이 내 아버지나 형님이 어디서 전사했다고 그러니까 그것을 개별적으로 찾아가서 발굴해오는 그런 사례들은 있었습니다.

▷ 오태훈 : 99년부터 시작했는데 2018년까지 20년간 이 일에 매진할 거라고 그 당시에 생각하셨어요?

▶ 이용석 :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조금 뭐랄까. 가진 게 부족해서 이런 유해발굴. 그때 유해라는 단어 자체도 모를 시기였습니다.

▷ 오태훈 : 그러니까 왠지 좀 내가 한직으로 가는 거 아니냐 이런 생각도 하셨나봐요, 처음에는.

▶ 이용석 : 그렇습니다. 하고 나서부터는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내가 이걸 위해서 태어났구나. 정말 용사님들은 나라를 위해서 죽음으로 목숨을 바쳤다고 하면 나는 단 한 구 유해를 찾는 데 내 목숨을 바쳐야겠다 이런 각오를 갖게 되었습니다.

▷ 오태훈 : 20년 하셨으면 그리고 나라에서 이 임무를 부여했고 조직적으로 운영이 됐으면 이제는 다 찾았을지 않을까 싶은데 아닌가봐요.

▶ 이용석 : 그렇지 않습니다. 기록이라는 것이 우리가 전사가 있지만 전사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전사는 살아있는 산 용사님이 남긴 기록이고 우리가 차지해야 할 곳은 전사한 분의 기록인데 우리가 통산 13만 4천여 명을 찾지 못했다고 해서 이름이 명단이 현충원에 가면 위패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13만 4천은 지금 내 기록이 없는 겁니다. 어디서 전사했다고 하는. 그중에 기록에 남은 매화장 기록소라고 하는데 매화장 보고소가 7,800여 분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는 어디서 전사했다는 기록이 없어요. 그냥 서울 뭐 강릉, 춘천 이런 식으로 전사자 카드에 전사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보니까 찾기가 곤란합니다.

▷ 오태훈 : 어려움도 참 많았을 것 같습니다.

▶ 이용석 : 처음에는 저도 뭐 전사 담당 교관도 해본 적도 없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정말 야전에서 대대장 마치고 참모 마치고 내려갔는데 유해를 찾으라고 하는데 정말 그 당시 우리 그 사람도 답답했던지 저보고 제가 이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까 알면 내가 했지. 모르니까 너보고 하라는 거 아니야. 이런 일화가 있어요. 그런데 막상 부여 받은 군인은 수단과 방법을 정말 가리지 않고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면 해야 합니다. 전사를 밤낮으로 연구하고 현장을 쫓아다니고 지역 주민을 만나고 또 참전용사 협회 협조해서 살아계신 분들을 또 만나서 인터뷰를 해보고 해서 현장에 가보니까 이건 뭐 정말 지금이야 20여 년이 흘러서 많은 유해가 안 보였지만 그 당시에는 전쟁터라서 올라가보면 어떤 경우에는 일개 유학산 우측에 73고지 같은 경우에는 올라가더니 1개 소대가 그냥 다 전사했는데 너무 고지가 경사지니까 낙엽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게 그냥 그대로 전사하신 모습 그대로 1개 소대 인원수가 잠들어계시는 겁니다.

▷ 오태훈 : 40여 년이 지난 그 시점까지도.

▶ 이용석 : 그 당시 50년이 지난 거죠. 그냥 앙상한 처음으로 그렇게 완벽하게 머리부터 발 끝까지의 인체의 뼈대라는 것을. 그래서 많이 울게 되었죠.

▷ 오태훈 : 그분들이 얼마나 그곳에 계시면서 힘드셨을까요?

▶ 이용석 : 그래서 통상 어떤 누구는 귀신이 나타났다. 누구는 꿈에 보인다 하는 그런 내용들이 저 나름대로는 저는 믿고 있거든요. 현대문명에서 그걸 믿을 수는 없어요.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왜냐? 저도 직접 체험을 한 장본인이니까. 그 20대 약관 젊은이들이 책가방을 내던지고 전쟁터에 가서 그 용사님은 싸우고 싶었겠어요? 전사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찾아주지 않았어요. 정말 새소리, 바람소리, 구름, 비를 벗삼아서 50년을 기다리고 있는데 영혼이 있다면 얼마나 참 한이 맺히고 또 내 부모, 형제, 친구를 보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당연히 지금도 그건 사실 믿는 겁니다. 누가 야, 우리 동네에 귀신산이 있다. 뭐가 나타난다 그러면 저는 남들은 그런 게 어디 있어 하지만 저는 믿고 찾으러 갔습니다.

▷ 오태훈 : 그런데 궁금한 게 99년부터 이 일을 하셨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유해 발굴단이 창설된 건 2007년으로 제가 알고 있거든요.

▶ 이용석 : 그렇습니다. 그때는 처음에는 저 혼자 유해발굴 통제장교로서 임무를 기가 막힌 사실이죠. 혼자 시작을 했고 이제 그러다가 육군본부에 6.25 전쟁 50주년 기념 사업단이라고 해서 50년이 지난 그 시점에 기념행사 하기 위한 단이 편성이 됐고 그러다가 이제 50주년이 지나면서 이 사업은 계속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육군본부에 유해발굴과로 하나의 이건 편재에 없는 임시 편재였습니다. 과로 존재하나 이래서는 안 된다. 왜냐. 그 당시 전국 전쟁터에서 유해가 발굴되고 신원이 확인되고 이슈가 되다 보니까 이건 3년 만에. 원래 3년만 하도록 되어 있었어요.

▷ 오태훈 : 한시적으로.

▶ 이용석 : 안 된다. 이걸 이대로 놔두고 또다시 우리가 묻어버린다고 하면 이것은 역사 앞에 우리는 더 이상 나설 그런 능력이 없다. 이렇게 해서 그게 받아들여져서 우리도 정식 부대를 편재하자. 이렇게 해서 국방부의 유해발굴감식단이 만들어지게 되었던 겁니다.

▷ 오태훈 : 청취자께서 많은 의견 보내주고 계시는데요. 김이안 님 “어젯밤 기념식 저도 봤습니다. 나열된 유해를 보면서 한국전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고 눈물도 흘렸습니다. 나라를 위해 죽어간 용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나라 만들어야 할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3571번님께서는 “소중한 일을 하셨습니다. 갑자기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김고은 님 “말씀 듣다보니 목이 매입니다. 지금도 다부동 전투가 있었던 칠곡 다부동에 가면 아직도 먹먹합니다.”라고 의견들 보내주고 계시는데요. 그 현장에서 발견을 했어요. 시신을 수습했어요. 누구인지 확인하는 건 어떻게 하십니까?

▶ 이용석 : 처음에 할 때는 우리가 50년이 지났는데 유해가 발굴되리라고 생각도 안 했기 때문에 발굴될 현장에서 수습을 해서 그 지역에 있는 충원탑이 통상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그 충원탑에다가 합동으로 합장하는 걸로 계획을 했다가.

▷ 오태훈 : 그냥 무명용사로 충원탑 세우고 거기에.

▶ 이용석 : 그 뒤에 합장을 하려다가 야, 이건 아니다 해서 또 고려됐던 것이 그러면 화장을 해서 여기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 지하납골당에 모시자. 이렇게 해서 또 계획이 수정이 됐는데 막상 발견하고 보니까 정말 최초에 고 최승갑 일병님이 최초로 2000년 4월 13일경에 다부동 369고지라는 곳에서 발견이 됐는데.

▷ 오태훈 : 최 일병님이.

▶ 이용석 : 네. 유가족을 조사해보니까 결혼을 하셔서 미망인인 엄 여사와 또 유복녀인 최 여사가 생존해 있어서 그분들을 현장에 모셨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이제 여러 가지 여론에서 이건 아니다. 이거 그냥 발굴해서 될 사항이 아니라 우리도 정말 미국. 저는 미국의 부대가 지금은 DPA라고 해서 포로실종자 확인, 그 당시에는 유해발굴센터 정도 규모였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도 빨리 규모를 갖추고 DNA 감식을 해라. 해서 DNA 감식 비용도 첫 해에는 없었습니다. 그 이후에 2001년부터 반영이 됐습니다.

▷ 오태훈 : 그러네요.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요구했던 것. 거기에서 사인한 네 번째가 유해발굴 해서 보내달라는 거였고 북한이 이걸 또 이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북쪽에도 지금 아직 이런 유해가 많이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 이용석 : 북쪽에 이제 우리가 일반적으로 DMZ부터 우리가 올라갔던 압록강, 두만강 최종 진출했던 그곳까지 우리가 보통 한 3만에서 4만이 남았다고 보는데 그중에서 한 반이 2만 명 정도는 DMZ 지역에 지금 화살머리 고지 지역에서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데 DMZ 비무장지대에 있는 것으로 저희들이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 오태훈 : 우리가 계속 해야 되겠네요.

▶ 이용석 : 그렇습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이건 말이 필요 없이 그냥 해야 하는 겁니다. 뭐 이런저런 게 필요 없습니다.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지금 다른 후세들도 나도 당연히 내 몸을 바칠 수 있다고 하는.

▷ 오태훈 : 나라를 위해서 군대를 가고 나라를 위해서 자기가 일을 할 수 있는 그것을 이런 일들이 있어야만 가능한 거 아니겠습니까?

▶ 이용석 :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게 국가 인지도의 척도가 되는 겁니다.

▷ 오태훈 : 가장 기억에 남는 발굴 작업이 있다면 어떤 걸 말씀하시겠습니까?

▶ 이용석 : 이제 경기도 포천 요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50년 6월 25일 전쟁이 났던 당일에 공허 없이 36분경입니다. 그걸 왜 정확히 아냐 하면 그 당시 그곳에서 중대장 했던 분이 생존해 있어서 현장에 와서 증언을 해줬는데 2.36인치 로켓포라는 게 있습니다. 장갑차도 잡는. 그런데 그것을 안고 이제 43번 국도가 지나가는데 그 도로를 바라보고 앉고 꽉 잡고 그대로 숨져가신 모습이 머리부터 저쪽 발가락 끝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정말 뭐라고 이렇게 표현하기 힘든 그런 모습인데 그곳에 바로 서거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그 당시에 거기를 오셨죠.

▷ 오태훈 : 이정한 님 “참전용사들 덕분에 우리가 잘 살고 있는데 너무 안타깝습니다. 저희 막내 외삼촌도 전사를 하셨는데 어머니가 오래도록 가슴 아파 하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라는 의견도 보내주고 계시는데 그러니까 우리 참전용사들의 시신을 보면 그 시신의 형태 다 그 역사라든가 이분들의 삶이 다 담겨 있다면서요? 보인다면서요?

▶ 이용석 : 정말 이건 그래서 안보교육, 충성심을 별도로 교육할 필요도 없다. 또 문제 있는 군인 병사들이든 일반인이든 발굴 현장에 올려보내서 발굴을 한번 해보면 안다고 저는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가 첫 번째 발굴했던 다부동328고지 328m밖에 안 되는데 그건 길목입니다. 아주 중요한 고지인데 16번의 백병전이 벌어진 곳이었는데 산 정상이 크지도 않은 곳인데 완전 포로 1m가 뒤집혔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발굴이 거기에서 이루어지는데 이거 삽으로 그냥 긁기만 하면 조각이 나서 하나도 제대로 된 유해가 없었습니다. 머리도 전부 다 부서져서 점으로 나오고 팔다리 온통 모든 곳이 다 흐트러져서 여기저기 따로 따로 나오는 겁니다. 그게 시점만 바꾸면 나고 내 전우고 지금의 내 부모, 형님, 동생이라고 생각을 하니 그냥 막 펑펑 울고 정말 그날은 저희가 잘 먹지도 못하는 소주도 몇 병을 마셨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 오태훈 : 많이 마음에 남으셨을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20년을 하셨어요.

▶ 이용석 : 하다 보니까 욕심이랄까. 대한민국 최초에 제가 계획을 했고 또 어쨌든 남보다 이걸 하기 위해서 정말 밤낮으로 전사도 연구했고 또 그 수많은 거의 몇만 명에 이르는 참전용사, 젊은 청춘들이 정말 전쟁터에 있는 각 지역 단위 웬만한 나이 드신 분들은 제가 20년간 거의 다 찾아뵀습니다. 그런데 이걸 한순간에 다 계획에 반영해서 어쨌든 현재 상존하고 있는 북한이 있는데 국군이 나라를 안 지키고 발굴을 할 수는 없는 겁니다. 1차적인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는 저는 여기에 내가 죽어서 저승에 가서라도 나는 유해발굴사업에 일조를 해야 되겠다. 이런 다짐을. 이게 내가 해야 할 인간으로서 도리다 이렇게 생각을 다짐하게 됐습니다.

▷ 오태훈 : 2018년까지.

▶ 이용석 : 2월까지 하고 이제 나왔습니다.

▷ 오태훈 :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세요, 그러면.

▶ 이용석 : 지금은 이제 시골에 내려가서 아주 깊은 산골에서 농사지으면서 제가 20년 동안 경험했던 것들을 기록에 남기는 그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남겨서 언젠가는 제가 사후라도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임진왜란을 정약용 선생이 진기록을 통해서 우리가 생생히 알 수 있듯이 그런 기록을 남기는 것이 또 저의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을 해서 그런 기록을 남기는 일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 오태훈 : 지금 제가 쓰신 책 죽은 자들의 증언이라는 이 책을 갖고 있는데 사진도 꽤 많이 이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나무뿌리와 하나가 된 유해. 철모를 벗지 못한 유해. 군복을 입은 채로 발견된 유해들의 사진들도 실려 있습니다. 지금은 그러면 이 유해 발굴 작업은 제대로 되고 있다고 보세요?

▶ 이용석 : 네. 발굴단이 만들어지면서 정말 제대로 된 조직과 예산 이것이 다 갖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DNA 감식할 수 있는 이런 능력과 보유자들이 저희들은 갖춰져 있기 때문에 연차적으로 문제는 어디에 유해가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한 많이 찾았으면 상대적으로 유가족들이 나서서 DNA 감식을 해줘야 이렇게 맞춰지게 되는데 너무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50년, 70년이 흐르다 보니까 이제 2세대와 3세대, 4세대에 진입했습니다. 이러니 부모, 형제 다 떠났는데 누가 이렇게 선듯 그런 찾겠다고 하는 마음가짐이 일어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과감하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무명용사가 없습니다. 이름이 없는 용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호명용사라고 저희들은 부릅니다.

▷ 오태훈 : 호명용사시다.

▶ 이용석 : 호국용사. 호국용사라고 정정합니다. 호국용사라고 부르는데. 이름을 찾아드려줘야 하는데 이름이 있는데 이름이 없이 무명용사 말이 되겠습니까? 이름을 찾아드려야 되고 유가족들도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국민들께서는 8촌까지 DNA 감식 가능하니까.

▷ 오태훈 : 8촌까지 가능합니까?

▶ 이용석 : 네. 웬만하면 다 가계도를 따지면 해당이 될 수 있습니다. 정말 적극적으로 나서서 가까운 관공서에 군부대 이런 데 가면 다 무료로 선물도 주고 여러 가지 여비도 주고 다 합니다. 그러니 꼭 DNA 감식에 참석하면 좋겠고 또 많은 분들이 시골에서 오래 살았던 분들은 참전용사보다 더 잘합니다, 발굴 지역을. 왜냐. 참전용사는 정신 없이 그냥.

▷ 오태훈 : 어딘지도 모르고 전장이니까 뛰어가신 분들이고.

▶ 이용석 : 교육도 받지 못하고 명령으로 갔다가 아침 새벽에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대충 어디에서 전사했습니까? 철원. 철원이 어디. 철원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군인데. 그래서 지역 주민들은 올라가서 그 옛날에 탄피를 캐서 우리 보릿고개 시절에 그걸로 생계 끼니를 잇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거를 본인들이 다 압니다. 그런 거 벌 주는 건 없습니다, 전부 다.

▷ 오태훈 : 제보해주시면.

▶ 이용석 : 제보해주시면 저희들이 계획에 반영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 오태훈 : 알겠습니다. 8341님 “저희 큰아버지도 학도병으로 전사하셨습니다. 어젯밤 방송 보며 많이 울었습니다.” 4315님 “저희 작은할아버지께서도 실종 전사 처리됐습니다. 제가 DNA 채취를 해도 확인 가능할까요?” 확인 가능합니다. 8촌까지 가능하다고 하니까 유가족 DNA 등록이 중요하고요. 전화번호 알려드리겠습니다. 1577-5625. 1577-5625 유해감식발굴단이니까 이쪽으로 문의해주시면 가까운 곳으로 DNA 등록하실 수 있는 것들 안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벌써 다 지나갔어요. 원래 준비된 시간이 더 있었는데 정말 감사드리고요. 오늘 이렇게 나와주셔서 중요한 이야기 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시사본부 금요초대석 유해발굴의 산증인 이용석 전 유해발굴단 발굴과장님과 함께 말씀 나눴습니다. 저희가 노래 하나 듣자고 먼저 말씀해주셨거든요. 어떤 노래 들으면 될까요? 지금 노래가 나가고 있는데.

▶ 이용석 : 저는 38선의 봄을 듣고 싶고 정말 국민들이 이런 잊지 말자. 그냥 이 시간이 지나가면 썰물처럼 빠지는 그런 기억을 가진 민족은 기록이 없으면 그 나라 민족은 죽은 목숨이나 같습니다. 잊지 말고 정말 다 같이 DNA 감식에 참여해주시고 또 비록 가물가물한 기억이라고 할지라도 제보해주시면 저희는 유해발굴 하는데 대한민국 국군 유해발굴 감식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 오태훈 : 알겠습니다. 오늘 나와주셔서 고맙고 그동안 함께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용석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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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태훈의 시사본부] “나라위해 목숨 잃었는데 내 몸은 70년 째 차가운 전쟁터에…영혼이 있다면 얼마나 한이 맺히겠나”
    • 입력 2020-06-26 15:54:55
    최영일의 시사본부
- 나라 위해 희생한 사람은 국가가 끝까지 책임져야... 전후 복구하느라 모른 척 해와
- 용사님들이 나라 위해서 목숨 바쳤다면, 나는 유해를 찾는데 목숨 바치겠다 각오
- 누가 전쟁터 나가고 싶었겠나... 그렇게 목숨 잃었는데 70년 동안 아무도 찾아주질 않아
- 새소리, 바람소리 벗 삼아 70년 지내는데, 영혼이 있다면 얼마나 한이 맺히겠나
- 포천 요골서 로켓포 끌어안고 그대로 숨져있는 모습의 유해 나와... 눈물 많이 흘려
- 지금은 시골에서 20년간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 하고 있어, 그것이 마지막 임무
- 이름 없는 무명용사가 세상에 어디있나? 다 이름 있어... DNA 감식으로 이름 찾아줘야
- 유해발굴은 제보와 유가족의 DNA 등록이 중요... 1577-5625 전화하면 안내 가능

■ 프로그램명 : 오태훈의 시사본부
■ 코너명 : 시사본부 초대석
■ 방송시간 : 6월 26일(금요일) 12:20~14:00 KBS 1라디오
■ 출연자 : 이용석 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발굴과장



▷ 오태훈 : 어제 6.25 전쟁주년 추념식 혹시 보셨습니까? 북한에서 발굴되어서 미국 하와이에서 보관중이던 유해 가운데 국군 전사자로 판정된 유해 147구가 그제 우리나라로 돌아왔고요. 이중에 7명은 신원이 확인됐습니다. 그리고 바로 어제 열린 6.25전쟁 70주년 기념행사장에서 이분들의 70년 만의 복귀 신고가 이루어졌습니다. 대통령이 직접 유해를 맞이했고 참전 기장을 수요하기도 했습니다. KBS1라디오 오태훈의 시사본부 금요초대석 70년 만에 복귀 신고가 될 수 있게끔 해주신 분입니다. 유해 발굴의 산증인, 이용석 전 유해발굴단 발굴과장과 함께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이용석 :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태훈 : 저희가 감사드립니다. 어려운 걸음 해주셨습니다. 먼저 어제 그 복귀 신고 보셨어요?

▶ 이용석 : 보고 한편으로는 감동이 있고 한편으로는 아직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는 생각에 정말 국민들이 다함께 참여해서 단 한 구의 유해를 찾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런 각오를 해봤습니다.

▷ 오태훈 : 그 장면 보시면서 좀 소감이 남다르셨을 것 같아요. 많은 생각도 나셨을 것 같고.

▶ 이용석 : 아무래도 제가 99년 9월에 처음으로 계획했던 업무니까 정말 울컥 할 때도 있고 1명, 1명 호명할 때마다. 또 한편으로는 저게 그 유해뿐만 아니라 지금 휴전선 이남에 있는 우리 유해도 수없이 많은데 너무 시간이 흘러가고 정말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 한편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 오태훈 : 그러니까 이용석 과장께서 99년부터 이 일을 하셨다고 하셨잖아요.

▶ 이용석 : 99년 9월에 대한민국 장교로서 처음으로 유해발굴이라는 임무를 부여 받아서 계획을 해서 그렇게 한 20여 년간 했습니다.

▷ 오태훈 : 그 임무가 왜 99년도에 와서야.

▶ 이용석 : 그러니까 그것이 저도 참 마음이 아팠던 것이 고급과정 교육까지 다 받았지만 어디에서도 전사자가 남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막상 임무를 부여받고 현장에 가보니까 이건 흙에 덮이지도 않고 낙엽이 그 위에 그대로 쌓인 채로 발굴되는 그 모습을 제 눈으로 생생히 보면서 이야, 나라도 내 자식 군대 보내기가 참 겁나겠다, 이렇다면. 민주주의 특히 선진국이라는 어떤 척도라는 것은 나라를 위해 희생된 자는 끝까지 국가가 책임을 지어준다고.

▷ 오태훈 : 국가가 책임져야죠.

▶ 이용석 : 그렇습니다. 미국과 같은 그런 모델이 우리에게도 빨리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감정을 갖게 된 것이 이 사업이 시작했는데 우리는 너무 늦었죠. 모르고서 안 한 것이 아니고 사실 알면서도 우리가 알다시피 전후 복구 과정에 많은 시간과 어떤 경제력이 소모되다 보니까 이런 데에 알면서도 좋게 이야기하면 정말 세월을 보고 모르는 척 지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 오태훈 : 모르는 척 지내왔던 것이. 그러니까 손을 대야 하는데 반드시 해야 할 일인데도 불구하고 시간은 많이 흘러버렸고 그 일을 누군가가 먼저 해야 하는데 그 일을 하신 거 아니에요.

▶ 이용석 : 전혀 우리가 조직적인 국가 단위 또는 아니면 국방부 단위의 이런 조직적인 지금과 같은 체계를 가지고 한 적은 정말 없습니다. 없고 이것은 제가 처음으로 계획해서 실시가 되게 된 것이고. 물론 저도 명령을 받았으니까 했죠, 군인이니까. 그러나 그전까지는 정말 우리 사회는 그것이 없이 다만 참전용사들이 내 전우를 찾기 위해서 안타까운 마음에 또는 유가족들이 내 아버지나 형님이 어디서 전사했다고 그러니까 그것을 개별적으로 찾아가서 발굴해오는 그런 사례들은 있었습니다.

▷ 오태훈 : 99년부터 시작했는데 2018년까지 20년간 이 일에 매진할 거라고 그 당시에 생각하셨어요?

▶ 이용석 :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조금 뭐랄까. 가진 게 부족해서 이런 유해발굴. 그때 유해라는 단어 자체도 모를 시기였습니다.

▷ 오태훈 : 그러니까 왠지 좀 내가 한직으로 가는 거 아니냐 이런 생각도 하셨나봐요, 처음에는.

▶ 이용석 : 그렇습니다. 하고 나서부터는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내가 이걸 위해서 태어났구나. 정말 용사님들은 나라를 위해서 죽음으로 목숨을 바쳤다고 하면 나는 단 한 구 유해를 찾는 데 내 목숨을 바쳐야겠다 이런 각오를 갖게 되었습니다.

▷ 오태훈 : 20년 하셨으면 그리고 나라에서 이 임무를 부여했고 조직적으로 운영이 됐으면 이제는 다 찾았을지 않을까 싶은데 아닌가봐요.

▶ 이용석 : 그렇지 않습니다. 기록이라는 것이 우리가 전사가 있지만 전사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전사는 살아있는 산 용사님이 남긴 기록이고 우리가 차지해야 할 곳은 전사한 분의 기록인데 우리가 통산 13만 4천여 명을 찾지 못했다고 해서 이름이 명단이 현충원에 가면 위패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13만 4천은 지금 내 기록이 없는 겁니다. 어디서 전사했다고 하는. 그중에 기록에 남은 매화장 기록소라고 하는데 매화장 보고소가 7,800여 분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는 어디서 전사했다는 기록이 없어요. 그냥 서울 뭐 강릉, 춘천 이런 식으로 전사자 카드에 전사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보니까 찾기가 곤란합니다.

▷ 오태훈 : 어려움도 참 많았을 것 같습니다.

▶ 이용석 : 처음에는 저도 뭐 전사 담당 교관도 해본 적도 없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정말 야전에서 대대장 마치고 참모 마치고 내려갔는데 유해를 찾으라고 하는데 정말 그 당시 우리 그 사람도 답답했던지 저보고 제가 이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까 알면 내가 했지. 모르니까 너보고 하라는 거 아니야. 이런 일화가 있어요. 그런데 막상 부여 받은 군인은 수단과 방법을 정말 가리지 않고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면 해야 합니다. 전사를 밤낮으로 연구하고 현장을 쫓아다니고 지역 주민을 만나고 또 참전용사 협회 협조해서 살아계신 분들을 또 만나서 인터뷰를 해보고 해서 현장에 가보니까 이건 뭐 정말 지금이야 20여 년이 흘러서 많은 유해가 안 보였지만 그 당시에는 전쟁터라서 올라가보면 어떤 경우에는 일개 유학산 우측에 73고지 같은 경우에는 올라가더니 1개 소대가 그냥 다 전사했는데 너무 고지가 경사지니까 낙엽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게 그냥 그대로 전사하신 모습 그대로 1개 소대 인원수가 잠들어계시는 겁니다.

▷ 오태훈 : 40여 년이 지난 그 시점까지도.

▶ 이용석 : 그 당시 50년이 지난 거죠. 그냥 앙상한 처음으로 그렇게 완벽하게 머리부터 발 끝까지의 인체의 뼈대라는 것을. 그래서 많이 울게 되었죠.

▷ 오태훈 : 그분들이 얼마나 그곳에 계시면서 힘드셨을까요?

▶ 이용석 : 그래서 통상 어떤 누구는 귀신이 나타났다. 누구는 꿈에 보인다 하는 그런 내용들이 저 나름대로는 저는 믿고 있거든요. 현대문명에서 그걸 믿을 수는 없어요.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왜냐? 저도 직접 체험을 한 장본인이니까. 그 20대 약관 젊은이들이 책가방을 내던지고 전쟁터에 가서 그 용사님은 싸우고 싶었겠어요? 전사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찾아주지 않았어요. 정말 새소리, 바람소리, 구름, 비를 벗삼아서 50년을 기다리고 있는데 영혼이 있다면 얼마나 참 한이 맺히고 또 내 부모, 형제, 친구를 보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당연히 지금도 그건 사실 믿는 겁니다. 누가 야, 우리 동네에 귀신산이 있다. 뭐가 나타난다 그러면 저는 남들은 그런 게 어디 있어 하지만 저는 믿고 찾으러 갔습니다.

▷ 오태훈 : 그런데 궁금한 게 99년부터 이 일을 하셨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유해 발굴단이 창설된 건 2007년으로 제가 알고 있거든요.

▶ 이용석 : 그렇습니다. 그때는 처음에는 저 혼자 유해발굴 통제장교로서 임무를 기가 막힌 사실이죠. 혼자 시작을 했고 이제 그러다가 육군본부에 6.25 전쟁 50주년 기념 사업단이라고 해서 50년이 지난 그 시점에 기념행사 하기 위한 단이 편성이 됐고 그러다가 이제 50주년이 지나면서 이 사업은 계속 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육군본부에 유해발굴과로 하나의 이건 편재에 없는 임시 편재였습니다. 과로 존재하나 이래서는 안 된다. 왜냐. 그 당시 전국 전쟁터에서 유해가 발굴되고 신원이 확인되고 이슈가 되다 보니까 이건 3년 만에. 원래 3년만 하도록 되어 있었어요.

▷ 오태훈 : 한시적으로.

▶ 이용석 : 안 된다. 이걸 이대로 놔두고 또다시 우리가 묻어버린다고 하면 이것은 역사 앞에 우리는 더 이상 나설 그런 능력이 없다. 이렇게 해서 그게 받아들여져서 우리도 정식 부대를 편재하자. 이렇게 해서 국방부의 유해발굴감식단이 만들어지게 되었던 겁니다.

▷ 오태훈 : 청취자께서 많은 의견 보내주고 계시는데요. 김이안 님 “어젯밤 기념식 저도 봤습니다. 나열된 유해를 보면서 한국전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고 눈물도 흘렸습니다. 나라를 위해 죽어간 용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나라 만들어야 할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3571번님께서는 “소중한 일을 하셨습니다. 갑자기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김고은 님 “말씀 듣다보니 목이 매입니다. 지금도 다부동 전투가 있었던 칠곡 다부동에 가면 아직도 먹먹합니다.”라고 의견들 보내주고 계시는데요. 그 현장에서 발견을 했어요. 시신을 수습했어요. 누구인지 확인하는 건 어떻게 하십니까?

▶ 이용석 : 처음에 할 때는 우리가 50년이 지났는데 유해가 발굴되리라고 생각도 안 했기 때문에 발굴될 현장에서 수습을 해서 그 지역에 있는 충원탑이 통상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그 충원탑에다가 합동으로 합장하는 걸로 계획을 했다가.

▷ 오태훈 : 그냥 무명용사로 충원탑 세우고 거기에.

▶ 이용석 : 그 뒤에 합장을 하려다가 야, 이건 아니다 해서 또 고려됐던 것이 그러면 화장을 해서 여기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 지하납골당에 모시자. 이렇게 해서 또 계획이 수정이 됐는데 막상 발견하고 보니까 정말 최초에 고 최승갑 일병님이 최초로 2000년 4월 13일경에 다부동 369고지라는 곳에서 발견이 됐는데.

▷ 오태훈 : 최 일병님이.

▶ 이용석 : 네. 유가족을 조사해보니까 결혼을 하셔서 미망인인 엄 여사와 또 유복녀인 최 여사가 생존해 있어서 그분들을 현장에 모셨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이제 여러 가지 여론에서 이건 아니다. 이거 그냥 발굴해서 될 사항이 아니라 우리도 정말 미국. 저는 미국의 부대가 지금은 DPA라고 해서 포로실종자 확인, 그 당시에는 유해발굴센터 정도 규모였습니다. 그것처럼 우리도 빨리 규모를 갖추고 DNA 감식을 해라. 해서 DNA 감식 비용도 첫 해에는 없었습니다. 그 이후에 2001년부터 반영이 됐습니다.

▷ 오태훈 : 그러네요.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요구했던 것. 거기에서 사인한 네 번째가 유해발굴 해서 보내달라는 거였고 북한이 이걸 또 이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북쪽에도 지금 아직 이런 유해가 많이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 이용석 : 북쪽에 이제 우리가 일반적으로 DMZ부터 우리가 올라갔던 압록강, 두만강 최종 진출했던 그곳까지 우리가 보통 한 3만에서 4만이 남았다고 보는데 그중에서 한 반이 2만 명 정도는 DMZ 지역에 지금 화살머리 고지 지역에서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데 DMZ 비무장지대에 있는 것으로 저희들이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 오태훈 : 우리가 계속 해야 되겠네요.

▶ 이용석 : 그렇습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이건 말이 필요 없이 그냥 해야 하는 겁니다. 뭐 이런저런 게 필요 없습니다.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지금 다른 후세들도 나도 당연히 내 몸을 바칠 수 있다고 하는.

▷ 오태훈 : 나라를 위해서 군대를 가고 나라를 위해서 자기가 일을 할 수 있는 그것을 이런 일들이 있어야만 가능한 거 아니겠습니까?

▶ 이용석 :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게 국가 인지도의 척도가 되는 겁니다.

▷ 오태훈 : 가장 기억에 남는 발굴 작업이 있다면 어떤 걸 말씀하시겠습니까?

▶ 이용석 : 이제 경기도 포천 요골이라는 곳이 있는데 50년 6월 25일 전쟁이 났던 당일에 공허 없이 36분경입니다. 그걸 왜 정확히 아냐 하면 그 당시 그곳에서 중대장 했던 분이 생존해 있어서 현장에 와서 증언을 해줬는데 2.36인치 로켓포라는 게 있습니다. 장갑차도 잡는. 그런데 그것을 안고 이제 43번 국도가 지나가는데 그 도로를 바라보고 앉고 꽉 잡고 그대로 숨져가신 모습이 머리부터 저쪽 발가락 끝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정말 뭐라고 이렇게 표현하기 힘든 그런 모습인데 그곳에 바로 서거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그 당시에 거기를 오셨죠.

▷ 오태훈 : 이정한 님 “참전용사들 덕분에 우리가 잘 살고 있는데 너무 안타깝습니다. 저희 막내 외삼촌도 전사를 하셨는데 어머니가 오래도록 가슴 아파 하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라는 의견도 보내주고 계시는데 그러니까 우리 참전용사들의 시신을 보면 그 시신의 형태 다 그 역사라든가 이분들의 삶이 다 담겨 있다면서요? 보인다면서요?

▶ 이용석 : 정말 이건 그래서 안보교육, 충성심을 별도로 교육할 필요도 없다. 또 문제 있는 군인 병사들이든 일반인이든 발굴 현장에 올려보내서 발굴을 한번 해보면 안다고 저는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가 첫 번째 발굴했던 다부동328고지 328m밖에 안 되는데 그건 길목입니다. 아주 중요한 고지인데 16번의 백병전이 벌어진 곳이었는데 산 정상이 크지도 않은 곳인데 완전 포로 1m가 뒤집혔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발굴이 거기에서 이루어지는데 이거 삽으로 그냥 긁기만 하면 조각이 나서 하나도 제대로 된 유해가 없었습니다. 머리도 전부 다 부서져서 점으로 나오고 팔다리 온통 모든 곳이 다 흐트러져서 여기저기 따로 따로 나오는 겁니다. 그게 시점만 바꾸면 나고 내 전우고 지금의 내 부모, 형님, 동생이라고 생각을 하니 그냥 막 펑펑 울고 정말 그날은 저희가 잘 먹지도 못하는 소주도 몇 병을 마셨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 오태훈 : 많이 마음에 남으셨을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20년을 하셨어요.

▶ 이용석 : 하다 보니까 욕심이랄까. 대한민국 최초에 제가 계획을 했고 또 어쨌든 남보다 이걸 하기 위해서 정말 밤낮으로 전사도 연구했고 또 그 수많은 거의 몇만 명에 이르는 참전용사, 젊은 청춘들이 정말 전쟁터에 있는 각 지역 단위 웬만한 나이 드신 분들은 제가 20년간 거의 다 찾아뵀습니다. 그런데 이걸 한순간에 다 계획에 반영해서 어쨌든 현재 상존하고 있는 북한이 있는데 국군이 나라를 안 지키고 발굴을 할 수는 없는 겁니다. 1차적인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는 저는 여기에 내가 죽어서 저승에 가서라도 나는 유해발굴사업에 일조를 해야 되겠다. 이런 다짐을. 이게 내가 해야 할 인간으로서 도리다 이렇게 생각을 다짐하게 됐습니다.

▷ 오태훈 : 2018년까지.

▶ 이용석 : 2월까지 하고 이제 나왔습니다.

▷ 오태훈 :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세요, 그러면.

▶ 이용석 : 지금은 이제 시골에 내려가서 아주 깊은 산골에서 농사지으면서 제가 20년 동안 경험했던 것들을 기록에 남기는 그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남겨서 언젠가는 제가 사후라도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임진왜란을 정약용 선생이 진기록을 통해서 우리가 생생히 알 수 있듯이 그런 기록을 남기는 것이 또 저의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을 해서 그런 기록을 남기는 일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 오태훈 : 지금 제가 쓰신 책 죽은 자들의 증언이라는 이 책을 갖고 있는데 사진도 꽤 많이 이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나무뿌리와 하나가 된 유해. 철모를 벗지 못한 유해. 군복을 입은 채로 발견된 유해들의 사진들도 실려 있습니다. 지금은 그러면 이 유해 발굴 작업은 제대로 되고 있다고 보세요?

▶ 이용석 : 네. 발굴단이 만들어지면서 정말 제대로 된 조직과 예산 이것이 다 갖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DNA 감식할 수 있는 이런 능력과 보유자들이 저희들은 갖춰져 있기 때문에 연차적으로 문제는 어디에 유해가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한 많이 찾았으면 상대적으로 유가족들이 나서서 DNA 감식을 해줘야 이렇게 맞춰지게 되는데 너무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50년, 70년이 흐르다 보니까 이제 2세대와 3세대, 4세대에 진입했습니다. 이러니 부모, 형제 다 떠났는데 누가 이렇게 선듯 그런 찾겠다고 하는 마음가짐이 일어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과감하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무명용사가 없습니다. 이름이 없는 용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호명용사라고 저희들은 부릅니다.

▷ 오태훈 : 호명용사시다.

▶ 이용석 : 호국용사. 호국용사라고 정정합니다. 호국용사라고 부르는데. 이름을 찾아드려줘야 하는데 이름이 있는데 이름이 없이 무명용사 말이 되겠습니까? 이름을 찾아드려야 되고 유가족들도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국민들께서는 8촌까지 DNA 감식 가능하니까.

▷ 오태훈 : 8촌까지 가능합니까?

▶ 이용석 : 네. 웬만하면 다 가계도를 따지면 해당이 될 수 있습니다. 정말 적극적으로 나서서 가까운 관공서에 군부대 이런 데 가면 다 무료로 선물도 주고 여러 가지 여비도 주고 다 합니다. 그러니 꼭 DNA 감식에 참석하면 좋겠고 또 많은 분들이 시골에서 오래 살았던 분들은 참전용사보다 더 잘합니다, 발굴 지역을. 왜냐. 참전용사는 정신 없이 그냥.

▷ 오태훈 : 어딘지도 모르고 전장이니까 뛰어가신 분들이고.

▶ 이용석 : 교육도 받지 못하고 명령으로 갔다가 아침 새벽에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대충 어디에서 전사했습니까? 철원. 철원이 어디. 철원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군인데. 그래서 지역 주민들은 올라가서 그 옛날에 탄피를 캐서 우리 보릿고개 시절에 그걸로 생계 끼니를 잇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거를 본인들이 다 압니다. 그런 거 벌 주는 건 없습니다, 전부 다.

▷ 오태훈 : 제보해주시면.

▶ 이용석 : 제보해주시면 저희들이 계획에 반영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 오태훈 : 알겠습니다. 8341님 “저희 큰아버지도 학도병으로 전사하셨습니다. 어젯밤 방송 보며 많이 울었습니다.” 4315님 “저희 작은할아버지께서도 실종 전사 처리됐습니다. 제가 DNA 채취를 해도 확인 가능할까요?” 확인 가능합니다. 8촌까지 가능하다고 하니까 유가족 DNA 등록이 중요하고요. 전화번호 알려드리겠습니다. 1577-5625. 1577-5625 유해감식발굴단이니까 이쪽으로 문의해주시면 가까운 곳으로 DNA 등록하실 수 있는 것들 안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벌써 다 지나갔어요. 원래 준비된 시간이 더 있었는데 정말 감사드리고요. 오늘 이렇게 나와주셔서 중요한 이야기 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시사본부 금요초대석 유해발굴의 산증인 이용석 전 유해발굴단 발굴과장님과 함께 말씀 나눴습니다. 저희가 노래 하나 듣자고 먼저 말씀해주셨거든요. 어떤 노래 들으면 될까요? 지금 노래가 나가고 있는데.

▶ 이용석 : 저는 38선의 봄을 듣고 싶고 정말 국민들이 이런 잊지 말자. 그냥 이 시간이 지나가면 썰물처럼 빠지는 그런 기억을 가진 민족은 기록이 없으면 그 나라 민족은 죽은 목숨이나 같습니다. 잊지 말고 정말 다 같이 DNA 감식에 참여해주시고 또 비록 가물가물한 기억이라고 할지라도 제보해주시면 저희는 유해발굴 하는데 대한민국 국군 유해발굴 감식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 오태훈 : 알겠습니다. 오늘 나와주셔서 고맙고 그동안 함께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용석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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