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탈취도 세계 1위?…협력업체 기술 뺏고 거래도 끊은 현대중공업

입력 2020.07.26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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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공업을 돕는 일이 곧 우리나라 조선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마음가짐으로 회사를 운영해왔습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저희도 모르게 기술을 빼가는 모습을 보면서 협력사로서 순수한 마음을 갖고 일해왔던 게 제대로 걸어온 길인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한국현 삼영기계 사장)

충남 공주시에 있는 삼영기계. 1975년 문을 연 선박·철도기관용 엔진부품 전문기업입니다. 특히, 엔진의 피스톤 분야에서는 독일 말레(Mahle), 콜벤슈미트(Kolbenschmidt)와 함께 세계 3대 업체로 손꼽힙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삼영기계의 가장 큰 고객사는 현대중공업이었습니다. 삼영기계는 현대중공업이 2000년 개발한 '힘센엔진'에 들어가는 피스톤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해 2005년부터 10여 년간 독점 공급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거래가 끊긴 상태입니다. 현대중공업이 삼영기계의 기술자료를 다른 협력업체 J사로 넘겼고, J사가 본격적으로 피스톤 생산을 시작하자 거래처를 바꾼 것입니다.

■공정위, 협력업체 기술자료 유용한 현대중공업에  최고 수위 제재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영기계의 기술자료를 강압적으로 탈취해 유용한 현대중공업에 하도급법 위반으로 시정명령과 과징금 9억7천만 원을  내리기로 했다고  오늘(26일) 밝혔습니다.  기술유용 행위에 대해 그동안 부과된 과징금 가운데 가장 큰 규모입니다.

현대중공업이 법을 어기면서까지 삼영기계의 기술을 뺏은 이유는 원가절감입니다. 2015년 현대중공업은 내부적으로 삼영기계처럼 특정 업체에서 독점 공급하는 품목을 이원화하기로 하고 '임직원추천'을 통해 다른 엔진부품 협력업체 J사를 단독으로 선정했습니다.

삼영기계가 현대중공업에 10여 년 동안 독점 공급했던 중속엔진용 H21/32 피스톤삼영기계가 현대중공업에 10여 년 동안 독점 공급했던 중속엔진용 H21/32 피스톤
J사는 엔진 실린더 라이너(피스톤이 오가는 통로)를 생산하는 업체로 중소형 알루미늄 피스톤을 생산한 이력은 있지만, 대형 엔진에 들어가는 피스톤을 생산한 적은 없었습니다. J사는 현대중공업으로부터 피스톤 도면을 넘겨받아 시제품을 만들었지만, 현대중공업이 요구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선박용 중속엔진의 피스톤은 엄청난 힘과 열을 감당해야 하는데, 겉보기에는 쇠뭉치 같지만 문제없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기술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현대중공업은 J사의 미흡한 점을 해결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삼영기계의 기술자료를 빼내 J사에 넘겨주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중공업 구매담당자는 2016년 5월 31일 삼영기계에 피스톤 작업 표준서를 넘겨달라는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작업표준서는 제작 시 작업조건과 작업도, 작업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쓴 자료입니다.  담당자는 제출하지 않으면 양산승인을 취소할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거래를 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국현 사장은 "본사에 와서 실사할 때 좀 보자고 했던 적은 있지만, 아예 자료를 통째로 보내달라고 하는 게 이상하긴 했다"라며 "처음에는 안 보냈는데 다시 독촉 메일이 와서 승인취소를 하겠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보냈다"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중공업 구매담당자가 삼영기계 측에 보낸 이메일. 현대중공업 구매담당자가 삼영기계 측에 보낸 이메일.
또 현대중공업은 삼영기계에는 빈 양식을 보내 자료 작성을 요청하면서 J사에는 삼영기계가 내용을 채운 기술자료를 보냈는데, 삼영기계가 6군데에  '볼트'를 '너트'라고 쓴 오기가 J사 문서에서도 같은 위치에서 발견됐습니다.

한편 삼영기계에 기술자료를 달라고 압박한 이메일에 대해 현대중공업은 "하자발생에 따른 대책 수립 목적으로 자료를 요구한 것으로 정당한 사유가 인정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은 하자가 발생하지 않은 제품에 대해서도 기술자료를 요구했고, 하자가 발생한 제품에 대한 요구도 최소한의 범위를 넘어섰다고 공정위는 판단했습니다.

■현대중공업, '수주절벽' 시기 하도급법 밥 먹듯 위반

현대중공업의 기술유용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 2016년 현대중공업 건설장비사업부(現 현대건설기계)는 굴삭기의 전기회로를 구성하는 핵심부품 '하네스'의 단가를 낮추기 위해 기존업체의 도면을 다른 업체에 넘겨주다가 공정위에 적발돼 제재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공정위 조사가 진행되던 기간에도 도면을 넘겨주다 걸려 황급히 절차를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기술유용 행위 외에 하도급법 위반 사례는 더 많습니다. 2015년 12월에는 선박 엔진 관련 부품을 납품하는 하도급 업체를 대상으로 2016년 상반기에 일률적으로 단가를 10% 낮추라고 압박했고, 2016~2018년 사내 플랜트 공사 하도급 업체에 제조 원가보다 낮은 수준으로 대금을 결정해 지난해 말 공정위 제재를 받았습니다.

해당 사건으로 공정위 현장조사를 앞둔 2018년에는 조직적으로 조사 대상 부서 컴퓨터 101대와 하드디스크 273개를 교체하고 중요자료를 은닉했다가 적발돼 회사와 직원 2명이 과태료를 물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적발된 기술유용 행위를 포함해 하도급 갑질이 벌어진 것은 모두 2016년경. 세계적인 조선업황 악화로 '수주절벽'이 찾아오면서 현대중공업의 신규 수주량도 바닥을 친 시기입니다. 생존을 위해 길게는 수십 년을 함께 해온 협력업체를 내친 셈입니다.

현대중공업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현대중공업은 2016년 11월 현대중공업을 4개 회사로 쪼개고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지주회사가 현대중공업에서 분할된 자회사들에 대해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주식 매입을 위한 실탄을 사전에 마련해둘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상생'… 지금도 "피스톤은 우리 기술" 주장

현대중공업의 삼영기계 기술탈취·유용 의혹이 처음 알려진 것은 2년 전 국회 국정감사에서입니다. 송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장기돈 당시 현대중공업 엔진기계사업 대표를 증인으로 불렀는데, 이 자리에서 장 대표는 "법적 다툼보다는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서로 상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며 "삼영기계와  협상하겠다"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 차례의 협상테이블은 무의미하게 끝났고, 증언했던 장 대표도 얼마 가지 않아 회사를 은퇴했습니다.
한영석 현대중공업 대표이사가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에 참석해 한영석 현대중공업 대표이사가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에 참석해
지난해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국정감사에 같은 내용으로 출석한 한영석 현대중공업 대표이사는 "삼영기계에서 제조를 담당했고, 원천 기술은 현대중공업 연구소라든지 엔진사업본부에서 제공했다고 생각하고 있다"라며 "법원의 결론이 나면 삼영과 원만한 합의를 이루도록 하겠다"라고 했습니다.

1심 판결의 효력을 갖는 공정위 결정이 나왔지만, 현대중공업은 여전히 '엔진도 피스톤도 모두 우리 기술'이라는 입장을 바꾸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현대중공업 측은 이번 공정위 제재에 대해 "당사의 입장과 차이가 있어 공정위로부터 의결서를 받게 되면 검토 후 대응할 계획이다."라고 밝혔습니다.

현대중공업은 올해 3월 대표이사 직속 동반성장실을 신설하고 협력업체와 상생하겠다는 방안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공정위 제재 보도가 나오는 오늘(26일) 협력회사와 상생 모델을 본격적으로 만들겠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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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술 탈취도 세계 1위?…협력업체 기술 뺏고 거래도 끊은 현대중공업
    • 입력 2020-07-26 17:31:58
    취재K
"현대중공업을 돕는 일이 곧 우리나라 조선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마음가짐으로 회사를 운영해왔습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저희도 모르게 기술을 빼가는 모습을 보면서 협력사로서 순수한 마음을 갖고 일해왔던 게 제대로 걸어온 길인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한국현 삼영기계 사장)

충남 공주시에 있는 삼영기계. 1975년 문을 연 선박·철도기관용 엔진부품 전문기업입니다. 특히, 엔진의 피스톤 분야에서는 독일 말레(Mahle), 콜벤슈미트(Kolbenschmidt)와 함께 세계 3대 업체로 손꼽힙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삼영기계의 가장 큰 고객사는 현대중공업이었습니다. 삼영기계는 현대중공업이 2000년 개발한 '힘센엔진'에 들어가는 피스톤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해 2005년부터 10여 년간 독점 공급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거래가 끊긴 상태입니다. 현대중공업이 삼영기계의 기술자료를 다른 협력업체 J사로 넘겼고, J사가 본격적으로 피스톤 생산을 시작하자 거래처를 바꾼 것입니다.

■공정위, 협력업체 기술자료 유용한 현대중공업에  최고 수위 제재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영기계의 기술자료를 강압적으로 탈취해 유용한 현대중공업에 하도급법 위반으로 시정명령과 과징금 9억7천만 원을  내리기로 했다고  오늘(26일) 밝혔습니다.  기술유용 행위에 대해 그동안 부과된 과징금 가운데 가장 큰 규모입니다.

현대중공업이 법을 어기면서까지 삼영기계의 기술을 뺏은 이유는 원가절감입니다. 2015년 현대중공업은 내부적으로 삼영기계처럼 특정 업체에서 독점 공급하는 품목을 이원화하기로 하고 '임직원추천'을 통해 다른 엔진부품 협력업체 J사를 단독으로 선정했습니다.

삼영기계가 현대중공업에 10여 년 동안 독점 공급했던 중속엔진용 H21/32 피스톤J사는 엔진 실린더 라이너(피스톤이 오가는 통로)를 생산하는 업체로 중소형 알루미늄 피스톤을 생산한 이력은 있지만, 대형 엔진에 들어가는 피스톤을 생산한 적은 없었습니다. J사는 현대중공업으로부터 피스톤 도면을 넘겨받아 시제품을 만들었지만, 현대중공업이 요구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선박용 중속엔진의 피스톤은 엄청난 힘과 열을 감당해야 하는데, 겉보기에는 쇠뭉치 같지만 문제없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기술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현대중공업은 J사의 미흡한 점을 해결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삼영기계의 기술자료를 빼내 J사에 넘겨주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중공업 구매담당자는 2016년 5월 31일 삼영기계에 피스톤 작업 표준서를 넘겨달라는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작업표준서는 제작 시 작업조건과 작업도, 작업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쓴 자료입니다.  담당자는 제출하지 않으면 양산승인을 취소할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거래를 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국현 사장은 "본사에 와서 실사할 때 좀 보자고 했던 적은 있지만, 아예 자료를 통째로 보내달라고 하는 게 이상하긴 했다"라며 "처음에는 안 보냈는데 다시 독촉 메일이 와서 승인취소를 하겠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보냈다"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중공업 구매담당자가 삼영기계 측에 보낸 이메일. 또 현대중공업은 삼영기계에는 빈 양식을 보내 자료 작성을 요청하면서 J사에는 삼영기계가 내용을 채운 기술자료를 보냈는데, 삼영기계가 6군데에  '볼트'를 '너트'라고 쓴 오기가 J사 문서에서도 같은 위치에서 발견됐습니다.

한편 삼영기계에 기술자료를 달라고 압박한 이메일에 대해 현대중공업은 "하자발생에 따른 대책 수립 목적으로 자료를 요구한 것으로 정당한 사유가 인정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중공업은 하자가 발생하지 않은 제품에 대해서도 기술자료를 요구했고, 하자가 발생한 제품에 대한 요구도 최소한의 범위를 넘어섰다고 공정위는 판단했습니다.

■현대중공업, '수주절벽' 시기 하도급법 밥 먹듯 위반

현대중공업의 기술유용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 2016년 현대중공업 건설장비사업부(現 현대건설기계)는 굴삭기의 전기회로를 구성하는 핵심부품 '하네스'의 단가를 낮추기 위해 기존업체의 도면을 다른 업체에 넘겨주다가 공정위에 적발돼 제재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공정위 조사가 진행되던 기간에도 도면을 넘겨주다 걸려 황급히 절차를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기술유용 행위 외에 하도급법 위반 사례는 더 많습니다. 2015년 12월에는 선박 엔진 관련 부품을 납품하는 하도급 업체를 대상으로 2016년 상반기에 일률적으로 단가를 10% 낮추라고 압박했고, 2016~2018년 사내 플랜트 공사 하도급 업체에 제조 원가보다 낮은 수준으로 대금을 결정해 지난해 말 공정위 제재를 받았습니다.

해당 사건으로 공정위 현장조사를 앞둔 2018년에는 조직적으로 조사 대상 부서 컴퓨터 101대와 하드디스크 273개를 교체하고 중요자료를 은닉했다가 적발돼 회사와 직원 2명이 과태료를 물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적발된 기술유용 행위를 포함해 하도급 갑질이 벌어진 것은 모두 2016년경. 세계적인 조선업황 악화로 '수주절벽'이 찾아오면서 현대중공업의 신규 수주량도 바닥을 친 시기입니다. 생존을 위해 길게는 수십 년을 함께 해온 협력업체를 내친 셈입니다.

현대중공업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현대중공업은 2016년 11월 현대중공업을 4개 회사로 쪼개고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지주회사가 현대중공업에서 분할된 자회사들에 대해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주식 매입을 위한 실탄을 사전에 마련해둘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상생'… 지금도 "피스톤은 우리 기술" 주장

현대중공업의 삼영기계 기술탈취·유용 의혹이 처음 알려진 것은 2년 전 국회 국정감사에서입니다. 송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장기돈 당시 현대중공업 엔진기계사업 대표를 증인으로 불렀는데, 이 자리에서 장 대표는 "법적 다툼보다는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서로 상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며 "삼영기계와  협상하겠다"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 차례의 협상테이블은 무의미하게 끝났고, 증언했던 장 대표도 얼마 가지 않아 회사를 은퇴했습니다.
한영석 현대중공업 대표이사가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에 참석해 지난해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국정감사에 같은 내용으로 출석한 한영석 현대중공업 대표이사는 "삼영기계에서 제조를 담당했고, 원천 기술은 현대중공업 연구소라든지 엔진사업본부에서 제공했다고 생각하고 있다"라며 "법원의 결론이 나면 삼영과 원만한 합의를 이루도록 하겠다"라고 했습니다.

1심 판결의 효력을 갖는 공정위 결정이 나왔지만, 현대중공업은 여전히 '엔진도 피스톤도 모두 우리 기술'이라는 입장을 바꾸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현대중공업 측은 이번 공정위 제재에 대해 "당사의 입장과 차이가 있어 공정위로부터 의결서를 받게 되면 검토 후 대응할 계획이다."라고 밝혔습니다.

현대중공업은 올해 3월 대표이사 직속 동반성장실을 신설하고 협력업체와 상생하겠다는 방안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공정위 제재 보도가 나오는 오늘(26일) 협력회사와 상생 모델을 본격적으로 만들겠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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