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년 전 프랑스 대통령은 왜 명품 도자기를 선물했나

입력 2020.07.29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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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프랑스 마리 프랑수아 사디 카르노 대통령이 고종에게 도자기 한 점을 선물합니다. 프랑스 국립세브르도자제작소에서 제작한 높이 62cm짜리 대형 장식용 병입니다. 당시 조선에 선물을 보낸 서양 국가는 프랑스가 유일했는데요. 프랑스 대통령은 조선에 왜 이런 선물을 보냈을까요?

1888년 프랑스 대통령이 선물한 병 안에 찍힌 마크1888년 프랑스 대통령이 선물한 병 안에 찍힌 마크

이 병의 내부에는 "S.78"이라고 쓴 녹색 마크와 "RF"라고 쓴 붉은 마크가 찍혀 있습니다. S는 이 병을 제작한 세브르를, 78은 1878년에 제작됐음을 의미합니다. 또 "RF"는 프랑스 공화국의 약자입니다. 국립세브르도자제작소의 1888년 8월 출고 기록을 보면, 이 병이 한국의 왕에게 보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은 1882년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여러 국가들과 통상조약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프랑스는 청나라를 통해 조선과의 조약 체결을 요청했고, 프랑스는 미국과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에 이어 서양 열강들 중 여섯 번째로 조선과 조약을 체결한 국가가 됐습니다.

이 병은 1886년 조선과 프랑스가 체결한 조-불 수호통상조약 기념으로 프랑스 대통령이 선물한 것이었습니다. 세브르 도자기는 당시 전 세계 왕실과 귀족들의 사랑을 받았던 프랑스 대표 도자기였습니다. 프랑스는 이를 선물해 프랑스가 문화강국이자 우호국이라는 인식을 심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종은 답례로 12~13세기 고려청자 두 점과 '반화(금속제 화분에 금칠한 나무를 세우고, 각종 보석으로 만든 꽃과 잎을 달아놓은 장식품)' 한 쌍을 선물했습니다.

초대 조선 주재공사인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초대 조선 주재공사인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양국 간 수교예물 교환의 주역은 초대 조선 주재공사인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였습니다. 콜랭 드 플랑시 공사는 총 13년간 두 차례에 걸쳐 주 조선 프랑스 공사로 근무했습니다. 지금의 외교부에 해당하는 '외부'에서 프랑스와 주고받은 교섭 왕복 문서를 보면 두 나라 간 수교예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여기에도 콜랭 드 플랑시 공사가 나옵니다.

조선과 프랑스가 주고받은 교섭 왕복 문서를 수록한 책조선과 프랑스가 주고받은 교섭 왕복 문서를 수록한 책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는 기증물에 대한 면세 의뢰권'이라는 제목과 함께, 발신자는 프랑스 콜랭 드 블랑시 공사로, "고종께서 우리 대통령에게 보내시는 각종 진귀한 보물에 대해 이미 포장을 했습니다. 이 두 상자에 대해서는 세금을 면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라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프랑스와의 수교 체결, 특히 예물 교환을 전후로 양국 간 교류는 더욱 활발해집니다. 고종은 1887년 12월 취임한 프랑스 사디 카르노 대통령에게 이듬해인 1888년 축하의 뜻을 전하는 국서를 보냅니다.

1888년 고종이 프랑스 사디카르노 대통령에게 보낸 국서1888년 고종이 프랑스 사디카르노 대통령에게 보낸 국서

이 국서에는 '백리새천덕 伯理壐天德'이라는 글귀가 나오는데, 이는 대통령을 뜻하는 'President'를 한자음을 빌려 표기한 것이었습니다. 이 문서 끝에는 국새 '대조선국대군주보'도 찍혀 있습니다.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을 삽화로 실은 프랑스 잡지 표지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을 삽화로 실은 프랑스 잡지 표지

콜랭 드 플랑시 공사는 동양학에 관심이 많아 조선에 머무는 동안 다양한 한국 도자기를 수집한 것으로 전해졌는데요. 이렇게 수집해 프랑스 박물관에 기증한 도자기들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돼 한국 도자기에 대한 인식을 세우는 데 이바지했다고 합니다.

연회에 사용한 서양식 식기 세트연회에 사용한 서양식 식기 세트

19세기 후반 근대 전환기에 맞닥뜨린 조선왕실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서구 열강과 동등한 위치에 오르기 위해 짧은 시간 내에 독립국의 기틀을 세워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의 입지를 지키고자 각국 외교사절과의 교류를 중시했습니다. 서양식 건물을 짓고, 가구와 도자기 등을 수입한 것도 외교사절단과의 연회 등을 위해서였습니다.

전등이 켜진 창덕궁 대조전전등이 켜진 창덕궁 대조전

또 1887년에는 전기가 도입됩니다. 이는 1883년 미국을 방문한 조선 사절단, 보빙사가 밤거리를 밝힌 전등을 보고 조선으로 돌아와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보빙사로 미국에 다녀온 민영익은 당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나는 암흑에서 태어나 광명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경복궁 후원의 건청궁은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켜진 곳입니다. 또 궁궐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도 전기 시설이 갖춰지면서 밤까지 활동 시간이 연장돼 왕실의 생활양식이 변화하게 됐습니다. 궁궐의 불을 밝히기 위해 가지각색의 유리 전등갓이 설치됐는데, 조선왕실의 상징인 오얏꽃 무늬가 새겨진 것들도 있습니다.

조선왕실 상징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진 유리 등갓조선왕실 상징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진 유리 등갓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기획한 <신왕실도자,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 전시가 10월 4일까지 열립니다.

서양식 도자기들은 개항 이후부터 대한제국 초까지 혼란한 세태 속에서 조선이 지향했던 사회를 관통해 보여줍니다. 이런 서양식 도자기는 민중의 삶의 외면하고 사치를 일삼았던 왕실 전유물로 여겨지기도 했는데요. 그러나 조선왕실의 서양식 도자기는 서양의 문물을 도입해 격변기 최전선에서 외교적 해법을 찾으려했던 왕실의 노력을 오롯이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도자기들이지만, 한편으론 조선왕실이 끝내 제대로 꽃 피우지 못한 채 저물어 간 나날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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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0년 전 프랑스 대통령은 왜 명품 도자기를 선물했나
    • 입력 2020-07-29 07:06:18
    취재K
1888년, 프랑스 마리 프랑수아 사디 카르노 대통령이 고종에게 도자기 한 점을 선물합니다. 프랑스 국립세브르도자제작소에서 제작한 높이 62cm짜리 대형 장식용 병입니다. 당시 조선에 선물을 보낸 서양 국가는 프랑스가 유일했는데요. 프랑스 대통령은 조선에 왜 이런 선물을 보냈을까요?

1888년 프랑스 대통령이 선물한 병 안에 찍힌 마크
이 병의 내부에는 "S.78"이라고 쓴 녹색 마크와 "RF"라고 쓴 붉은 마크가 찍혀 있습니다. S는 이 병을 제작한 세브르를, 78은 1878년에 제작됐음을 의미합니다. 또 "RF"는 프랑스 공화국의 약자입니다. 국립세브르도자제작소의 1888년 8월 출고 기록을 보면, 이 병이 한국의 왕에게 보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은 1882년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여러 국가들과 통상조약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프랑스는 청나라를 통해 조선과의 조약 체결을 요청했고, 프랑스는 미국과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에 이어 서양 열강들 중 여섯 번째로 조선과 조약을 체결한 국가가 됐습니다.

이 병은 1886년 조선과 프랑스가 체결한 조-불 수호통상조약 기념으로 프랑스 대통령이 선물한 것이었습니다. 세브르 도자기는 당시 전 세계 왕실과 귀족들의 사랑을 받았던 프랑스 대표 도자기였습니다. 프랑스는 이를 선물해 프랑스가 문화강국이자 우호국이라는 인식을 심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종은 답례로 12~13세기 고려청자 두 점과 '반화(금속제 화분에 금칠한 나무를 세우고, 각종 보석으로 만든 꽃과 잎을 달아놓은 장식품)' 한 쌍을 선물했습니다.

초대 조선 주재공사인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양국 간 수교예물 교환의 주역은 초대 조선 주재공사인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였습니다. 콜랭 드 플랑시 공사는 총 13년간 두 차례에 걸쳐 주 조선 프랑스 공사로 근무했습니다. 지금의 외교부에 해당하는 '외부'에서 프랑스와 주고받은 교섭 왕복 문서를 보면 두 나라 간 수교예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여기에도 콜랭 드 플랑시 공사가 나옵니다.

조선과 프랑스가 주고받은 교섭 왕복 문서를 수록한 책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는 기증물에 대한 면세 의뢰권'이라는 제목과 함께, 발신자는 프랑스 콜랭 드 블랑시 공사로, "고종께서 우리 대통령에게 보내시는 각종 진귀한 보물에 대해 이미 포장을 했습니다. 이 두 상자에 대해서는 세금을 면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라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프랑스와의 수교 체결, 특히 예물 교환을 전후로 양국 간 교류는 더욱 활발해집니다. 고종은 1887년 12월 취임한 프랑스 사디 카르노 대통령에게 이듬해인 1888년 축하의 뜻을 전하는 국서를 보냅니다.

1888년 고종이 프랑스 사디카르노 대통령에게 보낸 국서
이 국서에는 '백리새천덕 伯理壐天德'이라는 글귀가 나오는데, 이는 대통령을 뜻하는 'President'를 한자음을 빌려 표기한 것이었습니다. 이 문서 끝에는 국새 '대조선국대군주보'도 찍혀 있습니다.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을 삽화로 실은 프랑스 잡지 표지
콜랭 드 플랑시 공사는 동양학에 관심이 많아 조선에 머무는 동안 다양한 한국 도자기를 수집한 것으로 전해졌는데요. 이렇게 수집해 프랑스 박물관에 기증한 도자기들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돼 한국 도자기에 대한 인식을 세우는 데 이바지했다고 합니다.

연회에 사용한 서양식 식기 세트
19세기 후반 근대 전환기에 맞닥뜨린 조선왕실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서구 열강과 동등한 위치에 오르기 위해 짧은 시간 내에 독립국의 기틀을 세워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의 입지를 지키고자 각국 외교사절과의 교류를 중시했습니다. 서양식 건물을 짓고, 가구와 도자기 등을 수입한 것도 외교사절단과의 연회 등을 위해서였습니다.

전등이 켜진 창덕궁 대조전
또 1887년에는 전기가 도입됩니다. 이는 1883년 미국을 방문한 조선 사절단, 보빙사가 밤거리를 밝힌 전등을 보고 조선으로 돌아와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보빙사로 미국에 다녀온 민영익은 당시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나는 암흑에서 태어나 광명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경복궁 후원의 건청궁은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켜진 곳입니다. 또 궁궐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도 전기 시설이 갖춰지면서 밤까지 활동 시간이 연장돼 왕실의 생활양식이 변화하게 됐습니다. 궁궐의 불을 밝히기 위해 가지각색의 유리 전등갓이 설치됐는데, 조선왕실의 상징인 오얏꽃 무늬가 새겨진 것들도 있습니다.

조선왕실 상징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진 유리 등갓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기획한 <신왕실도자, 조선왕실에서 사용한 서양식 도자기> 전시가 10월 4일까지 열립니다.

서양식 도자기들은 개항 이후부터 대한제국 초까지 혼란한 세태 속에서 조선이 지향했던 사회를 관통해 보여줍니다. 이런 서양식 도자기는 민중의 삶의 외면하고 사치를 일삼았던 왕실 전유물로 여겨지기도 했는데요. 그러나 조선왕실의 서양식 도자기는 서양의 문물을 도입해 격변기 최전선에서 외교적 해법을 찾으려했던 왕실의 노력을 오롯이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도자기들이지만, 한편으론 조선왕실이 끝내 제대로 꽃 피우지 못한 채 저물어 간 나날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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