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의 가족여행도 못간 택배기사…코로나19 특수의 그늘

입력 2020.08.1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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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년 만에 처음 떠나려던 가족여행도 못 가고…

"택배를 시작하고 8년 만에 처음으로 저희와 여행 간다고... 다음 날 아침에 깨웠는데... 애들 아빠가 죽어있었습니다."

국회 기자회견장에 선 서한미 씨가 힘겹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 공백은 길었습니다. 그 자리에 생긴 침묵은 무거웠습니다.

서 씨의 남편 41살 정상원 씨는 지난 5월 4일 아침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전날, 여행에 들떠 있던 모습이 가족들에게 남은 정 씨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정 씨의 직업은 택배 기사였습니다. 코로나 19 여파로 택배 물량이 크게 늘면서 정 씨의 노동 강도 역시 높아졌습니다.

월평균 8천 개였던 정 씨의 배송 물량은 올해 2월부터 많게는 만여 개로 급증했습니다. 유족들과 동료 택배 기사들이 정 씨의 죽음을 과로사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 과로사 추정 택배 기사 벌써 5명…"쉬게 해달라"

오늘(11일) 국회에서는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 마련 촉구 유가족 공동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정 씨처럼 과로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택배 기사는 올해만 벌써 5명입니다.

비대면을 권유하고 선호하는 환경에서 택배업은 전례 없는 특수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역시 전례 없는 노동 강도를 감내하고 있는 택배 기사들이 있습니다.

국회에 나온 유족들의 요구는 간단했습니다. 쉬게 해달라는 겁니다.


■ 택배 기사들이 마음 놓고 쉴 수 없는 이유는?

택배 기사들은 '특수 고용직'입니다. 사업주로부터 일을 받지만 근로 계약은 맺지 않는 일종의 프리랜서입니다. 독립적이고 자율성이 보장되는 근로 형태를 위해 도입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경호 택배노조 부위원장은 "일거리를 쌓아 놓고 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본인이 맡은 구역에서 물량을 소화하지 못하면 사실상 불이익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한 택배사는 택배 기사들의 당일 배송률을 평가해 수수료를 차등 지급하기도 합니다.

결국, 택배 기사들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 6일을, 폭증한 업무 속에서 버티고 있습니다. 아프다고 쉴 수 있는 여건이 안되는 겁니다.

과로사로 추정되는 또 다른 택배 기사 유족은 "평일 하루라도 쉴 시간이 있었으면 동생이 병원에 가서 아픈 걸 치료를 받아서 지금은 살아있을 것"이라고 토로했습니다.

박홍근 의원은 택배 기사들의 근로 여건에 대해 "고용·안정·소득·휴식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채 일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 8월 14일은 '택배 없는 날'…근본적인 해법 마련해야

택배사들이 가입한 한국 통합물류협회는 오는 14일을 '택배 없는 날'로 정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택배 물량이 급증해 택배 기사들의 휴식이 시급하다는 노조 요구에 호응한 결과입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SNS를 통해 "코로나 극복 주역으로 의료진과 함께 택배 기사들의 노고를 기억했으면 한다"며 "기사님들이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응원해 달라"고 밝혔습니다.

8월 14일 하루를 쉬게 됐지만, 택배 기사들의 마음은 편치만은 않습니다. 휴식 기간에 쌓인 택배가 복귀할 이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달 말엔 택배 기사들이 두려워하는 추석 연휴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늘 기자회견에서 민주당 우원식 의원은 "택배 노동자들이 맞는 첫 공식휴가가 단순히 하루의 휴식을 넘어 장시간 노동과 고용 안정 문제 등의 해법을 찾는 첫걸음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습니다.

택배 없는 날'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하루면 끝날 '이벤트'보다 살인적인 근로 여건을 개선할 구조적인 해결 방안이 필요하다는 진단, 이미 정치권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2018년 한국교통연구원이 발표한 '택배서비스 산업 일자리 실태 조사 분석'에 따르면 택배 기사들은 하루 평균 12.7시간씩 월평균 25.6일을 근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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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년 만의 가족여행도 못간 택배기사…코로나19 특수의 그늘
    • 입력 2020-08-11 18:01:00
    취재K
■ 8년 만에 처음 떠나려던 가족여행도 못 가고…

"택배를 시작하고 8년 만에 처음으로 저희와 여행 간다고... 다음 날 아침에 깨웠는데... 애들 아빠가 죽어있었습니다."

국회 기자회견장에 선 서한미 씨가 힘겹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 공백은 길었습니다. 그 자리에 생긴 침묵은 무거웠습니다.

서 씨의 남편 41살 정상원 씨는 지난 5월 4일 아침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전날, 여행에 들떠 있던 모습이 가족들에게 남은 정 씨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정 씨의 직업은 택배 기사였습니다. 코로나 19 여파로 택배 물량이 크게 늘면서 정 씨의 노동 강도 역시 높아졌습니다.

월평균 8천 개였던 정 씨의 배송 물량은 올해 2월부터 많게는 만여 개로 급증했습니다. 유족들과 동료 택배 기사들이 정 씨의 죽음을 과로사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 과로사 추정 택배 기사 벌써 5명…"쉬게 해달라"

오늘(11일) 국회에서는 택배 노동자 과로사 대책 마련 촉구 유가족 공동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정 씨처럼 과로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택배 기사는 올해만 벌써 5명입니다.

비대면을 권유하고 선호하는 환경에서 택배업은 전례 없는 특수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역시 전례 없는 노동 강도를 감내하고 있는 택배 기사들이 있습니다.

국회에 나온 유족들의 요구는 간단했습니다. 쉬게 해달라는 겁니다.


■ 택배 기사들이 마음 놓고 쉴 수 없는 이유는?

택배 기사들은 '특수 고용직'입니다. 사업주로부터 일을 받지만 근로 계약은 맺지 않는 일종의 프리랜서입니다. 독립적이고 자율성이 보장되는 근로 형태를 위해 도입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경호 택배노조 부위원장은 "일거리를 쌓아 놓고 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본인이 맡은 구역에서 물량을 소화하지 못하면 사실상 불이익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한 택배사는 택배 기사들의 당일 배송률을 평가해 수수료를 차등 지급하기도 합니다.

결국, 택배 기사들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 6일을, 폭증한 업무 속에서 버티고 있습니다. 아프다고 쉴 수 있는 여건이 안되는 겁니다.

과로사로 추정되는 또 다른 택배 기사 유족은 "평일 하루라도 쉴 시간이 있었으면 동생이 병원에 가서 아픈 걸 치료를 받아서 지금은 살아있을 것"이라고 토로했습니다.

박홍근 의원은 택배 기사들의 근로 여건에 대해 "고용·안정·소득·휴식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채 일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 8월 14일은 '택배 없는 날'…근본적인 해법 마련해야

택배사들이 가입한 한국 통합물류협회는 오는 14일을 '택배 없는 날'로 정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로 택배 물량이 급증해 택배 기사들의 휴식이 시급하다는 노조 요구에 호응한 결과입니다.

문재인 대통령도 SNS를 통해 "코로나 극복 주역으로 의료진과 함께 택배 기사들의 노고를 기억했으면 한다"며 "기사님들이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응원해 달라"고 밝혔습니다.

8월 14일 하루를 쉬게 됐지만, 택배 기사들의 마음은 편치만은 않습니다. 휴식 기간에 쌓인 택배가 복귀할 이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달 말엔 택배 기사들이 두려워하는 추석 연휴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늘 기자회견에서 민주당 우원식 의원은 "택배 노동자들이 맞는 첫 공식휴가가 단순히 하루의 휴식을 넘어 장시간 노동과 고용 안정 문제 등의 해법을 찾는 첫걸음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습니다.

택배 없는 날'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하루면 끝날 '이벤트'보다 살인적인 근로 여건을 개선할 구조적인 해결 방안이 필요하다는 진단, 이미 정치권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2018년 한국교통연구원이 발표한 '택배서비스 산업 일자리 실태 조사 분석'에 따르면 택배 기사들은 하루 평균 12.7시간씩 월평균 25.6일을 근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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