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차 가로막아도 ‘업무방해죄’만?…‘나쁜 사마리아인법’ 도입 추진

입력 2020.08.17 (11:03) 수정 2020.08.17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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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 상황 길 막아서도 "죄목은 업무방해죄"

참여인원 '735,972명'. 지난 7월 3일부터 청와대 국민청원 페이지에 올라온 한 청원 글에 동의한 시민들 숫자다.(8월 2일 청원 완료) '응급환자가 있는 구급차를 막아 세운 택시 기사를 처벌해주세요.'라는 제목의 이 글, 폐암 말기인 어머니가 탄 구급차와 추돌한 택시 기사가 가족의 호소에도 길을 막아섰고, 어머니는 뒤늦게 병원 이송 후 숨을 거뒀다는 내용이었다.

청원인이 공개한 블랙박스 영상에는 응급차를 막아선 택시기사의 음성이 생생히 담겨있었다. "응급실 가는 건데 급한 건 아니잖아. 죽으면 내가 책임진다니깐? 나 치고 가 그러면!"이라며, 응급차 통행을 저지한 채 사고처리부터 하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글. 2020.07.03.청와대 국민청원 게시글. 2020.07.03.

해당 청원인은 "경찰 처벌을 기다리고 있지만, 죄목은 업무방해죄밖에 없다고 하니..."라며 청원 글을 올린 이유를 밝혔다. 시민들은 분노했고 뜨거워진 여론 속에 경찰은 수사팀을 보강해 철저한 수사를 약속했다. 지난달 30일, 경찰은 택시기사를 업무방해 및 특수폭행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응급차를 막아섰고 구조에 협조하지 않은 행위 자체가 블랙박스 화면에 담겨있는 상황임에도 '업무방해죄' 밖에 없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일까, 법 조항을 들여다보자.

의료법, 소방법, 응급의료법에도 없는 '구조불이행 처벌'

'소방기본법'에는 '소방자동차가 구조 활동을 위해 출동할 때 모든 차와 사람이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응급차는 '사설' 응급차라 소방차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해당하지 않는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도 '응급 환자를 발견하면 즉시 응급의료를 해야 한다'는 항목이 있지만, '응급의료종사자'의 경우에만 해당할 뿐 택시기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응급 상황에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법 조항,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5조는 '누구든지 응급 환자를 발견하면 즉시 응급의료기관 등에 신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위반해도 처벌 규정이 없다. '구조에 협조해야 한다'는 항목도 있지만 '처벌'하는 강제 조항은 역시 없다.


경찰은 결국 해당 사건의 택시기사에게 의료법이나 소방법, 응급의료법이 아닌 '형법'상 업무방해죄를 적용했다. 응급 환자부터 이송해야 한다는 응급차 기사와 승강이를 벌인 것과 관련해선 '특수폭행' 혐의가 포함됐다.

청원인이 올린 글에서처럼 구조를 막아서고 방해한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업무방해' 혐의만 적용된 상황이다.

사건 수사 관계자에게 혐의 적용 범위에 관해 묻자, "객관적인 법 조항으로 보면 대답하기가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응급의료법'으로 처벌이 가능한지 구체적으로 묻는 질문에도, "응급의료법 부분이라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며 곤란하다는 견해를 밝혀왔다.

여론의 관심 속에 수사팀까지 보강했던 경찰로서는 처벌이 불가능해질 경우 난감해질 수 있는 상황. 공은 일단 검찰로 넘어갔지만 '구조 방해 행위' 자체로 처벌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쓰러진 택시기사 두고 떠났지만 처벌은 없었다.

지난 2016년 대전에서 차 안에 쓰러진 택시기사를 놔두고 승객들이 떠나버린 사건이 있었다. 택시기사가 급성 심장마비로 의식을 잃으면서 앞차를 들이받고서 멈춰 섰는데, 승객들은 운전석에 꽂혀있던 열쇠까지 빼서 트렁크에서 가방을 꺼내 다른 택시를 잡아타고 현장을 떠났다. 택시기사는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숨졌다.

비행기를 놓칠까 봐 떠났다는 게 경찰 조사에서 밝힌 승객들의 해명이었다. 여론은 들끓었지만 처벌할 방법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응급 상황에서 '구조 불이행죄'를 명시한 규정이 현행법에는 없기 때문이다.

구조를 돕지 않거나 방해하지 않은 경우 도덕적인 비난은 가능하나 형사처벌을 할 근거는 없는 것, 현재 응급 상황과 관련된 우리나라 법의 현실이다.

프랑스, 구조 안 하고 지나치면 징역형

유럽 국가들에선 응급상황에서 구조가 가능함에도 그냥 지나치는 것만으로도 처벌받는다. 이른바 '나쁜 사마리아인 법'이다.

강도를 만나 다쳐 쓰러진 유대인을 어느 사마리아인이 구해줬다는 성경 내용에서 유래했다. 좁은 의미의 '착한 사마리아인 법'은 선의를 가지고 타인을 돕다가 문제가 생기면 면책해주는 내용인데 우리나라 응급의료법에는 이 같은 조항은 이미 포함돼있다.

돕지 않을 경우 처벌하는 조항을 지칭하는 것이 '나쁜 사마리아인 법'인데, 프랑스에서는 '위험에 처한 타인을 구조할 수 있었음에도 나서지 않으면 5년 이하의 징역형 및 75,000유로 이하의 벌금형'을 도입하고 있다. 독일, 오스트리아 등에서는 1년 이하의 징역, 그리고 벌금형까지 도입한 나라들은 스무 군데가 넘고, 미국도 30여 개 주에서 징역형이나 벌금형으로 처벌을 명시하고 있다.


'나쁜 사마리아인 법' 우리나라에 도입 가능할까?

우리나라도 이제는 '나쁜 사마리아인 법'을 도입할 시점이 됐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도덕적 의무를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신중론도 나온다. 법이 모호하게 적용될 위험이 있다는 것 역시 문제로 지적된다. 어떤 경우를 '긴급한 상황'으로 볼 것인지 주관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정문 의원은 '구조가 가능함'에도 돕지 않거나 구조를 방해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명시하는 '구조불이행죄' 항목을 신설하는 개정안 발의를 준비하고 있다.

나쁜사마리아인법 입법 추진안나쁜사마리아인법 입법 추진안

이 의원은 "구급차 이동방해에 대한 법의 사각지대가 드러나게 된 상황에서 우리 사회에서도 긴급상황에서 법적 구호 의무가 필요하다는 '나쁜 사마리안법' 도입이 필요하다"면서 "재난상황이나 긴급한 상황 시에 구조의무를 부과해서 이를 불이행하거나 구조행위를 방해하는 경우엔 최대한 징역형까지 처벌하고, 특히 구조불이행으로 사망하는 경우에는 형량의 2배까지 가중처벌하는 내용도 담을 것"이라고 밝혔다.

'긴급 상황'의 범위나 적용 범위 등은 국회 차원의 공청회 등을 통해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나쁜 사마리아인 법' 발의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앞서 지난 18대 국회에서 '최소한의 윤리성과 사회 연대성마저 무너지고 있다'면서 이 같은 내용의 법안이 발의됐고, 20대 국회에서도 당시 바른정당 박성중 의원이 '구성원의 공동체 의식을 제고하기 위해서'라며 형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두 법안 모두 제대로 된 논의 없이 임기가 만료돼 폐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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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8-17 11:03:45
    • 수정2020-08-17 15:13:57
    취재K
응급 상황 길 막아서도 "죄목은 업무방해죄"

참여인원 '735,972명'. 지난 7월 3일부터 청와대 국민청원 페이지에 올라온 한 청원 글에 동의한 시민들 숫자다.(8월 2일 청원 완료) '응급환자가 있는 구급차를 막아 세운 택시 기사를 처벌해주세요.'라는 제목의 이 글, 폐암 말기인 어머니가 탄 구급차와 추돌한 택시 기사가 가족의 호소에도 길을 막아섰고, 어머니는 뒤늦게 병원 이송 후 숨을 거뒀다는 내용이었다.

청원인이 공개한 블랙박스 영상에는 응급차를 막아선 택시기사의 음성이 생생히 담겨있었다. "응급실 가는 건데 급한 건 아니잖아. 죽으면 내가 책임진다니깐? 나 치고 가 그러면!"이라며, 응급차 통행을 저지한 채 사고처리부터 하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글. 2020.07.03.
해당 청원인은 "경찰 처벌을 기다리고 있지만, 죄목은 업무방해죄밖에 없다고 하니..."라며 청원 글을 올린 이유를 밝혔다. 시민들은 분노했고 뜨거워진 여론 속에 경찰은 수사팀을 보강해 철저한 수사를 약속했다. 지난달 30일, 경찰은 택시기사를 업무방해 및 특수폭행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응급차를 막아섰고 구조에 협조하지 않은 행위 자체가 블랙박스 화면에 담겨있는 상황임에도 '업무방해죄' 밖에 없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일까, 법 조항을 들여다보자.

의료법, 소방법, 응급의료법에도 없는 '구조불이행 처벌'

'소방기본법'에는 '소방자동차가 구조 활동을 위해 출동할 때 모든 차와 사람이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응급차는 '사설' 응급차라 소방차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해당하지 않는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도 '응급 환자를 발견하면 즉시 응급의료를 해야 한다'는 항목이 있지만, '응급의료종사자'의 경우에만 해당할 뿐 택시기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응급 상황에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법 조항,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5조는 '누구든지 응급 환자를 발견하면 즉시 응급의료기관 등에 신고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위반해도 처벌 규정이 없다. '구조에 협조해야 한다'는 항목도 있지만 '처벌'하는 강제 조항은 역시 없다.


경찰은 결국 해당 사건의 택시기사에게 의료법이나 소방법, 응급의료법이 아닌 '형법'상 업무방해죄를 적용했다. 응급 환자부터 이송해야 한다는 응급차 기사와 승강이를 벌인 것과 관련해선 '특수폭행' 혐의가 포함됐다.

청원인이 올린 글에서처럼 구조를 막아서고 방해한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업무방해' 혐의만 적용된 상황이다.

사건 수사 관계자에게 혐의 적용 범위에 관해 묻자, "객관적인 법 조항으로 보면 대답하기가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응급의료법'으로 처벌이 가능한지 구체적으로 묻는 질문에도, "응급의료법 부분이라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며 곤란하다는 견해를 밝혀왔다.

여론의 관심 속에 수사팀까지 보강했던 경찰로서는 처벌이 불가능해질 경우 난감해질 수 있는 상황. 공은 일단 검찰로 넘어갔지만 '구조 방해 행위' 자체로 처벌할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

쓰러진 택시기사 두고 떠났지만 처벌은 없었다.

지난 2016년 대전에서 차 안에 쓰러진 택시기사를 놔두고 승객들이 떠나버린 사건이 있었다. 택시기사가 급성 심장마비로 의식을 잃으면서 앞차를 들이받고서 멈춰 섰는데, 승객들은 운전석에 꽂혀있던 열쇠까지 빼서 트렁크에서 가방을 꺼내 다른 택시를 잡아타고 현장을 떠났다. 택시기사는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숨졌다.

비행기를 놓칠까 봐 떠났다는 게 경찰 조사에서 밝힌 승객들의 해명이었다. 여론은 들끓었지만 처벌할 방법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응급 상황에서 '구조 불이행죄'를 명시한 규정이 현행법에는 없기 때문이다.

구조를 돕지 않거나 방해하지 않은 경우 도덕적인 비난은 가능하나 형사처벌을 할 근거는 없는 것, 현재 응급 상황과 관련된 우리나라 법의 현실이다.

프랑스, 구조 안 하고 지나치면 징역형

유럽 국가들에선 응급상황에서 구조가 가능함에도 그냥 지나치는 것만으로도 처벌받는다. 이른바 '나쁜 사마리아인 법'이다.

강도를 만나 다쳐 쓰러진 유대인을 어느 사마리아인이 구해줬다는 성경 내용에서 유래했다. 좁은 의미의 '착한 사마리아인 법'은 선의를 가지고 타인을 돕다가 문제가 생기면 면책해주는 내용인데 우리나라 응급의료법에는 이 같은 조항은 이미 포함돼있다.

돕지 않을 경우 처벌하는 조항을 지칭하는 것이 '나쁜 사마리아인 법'인데, 프랑스에서는 '위험에 처한 타인을 구조할 수 있었음에도 나서지 않으면 5년 이하의 징역형 및 75,000유로 이하의 벌금형'을 도입하고 있다. 독일, 오스트리아 등에서는 1년 이하의 징역, 그리고 벌금형까지 도입한 나라들은 스무 군데가 넘고, 미국도 30여 개 주에서 징역형이나 벌금형으로 처벌을 명시하고 있다.


'나쁜 사마리아인 법' 우리나라에 도입 가능할까?

우리나라도 이제는 '나쁜 사마리아인 법'을 도입할 시점이 됐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도덕적 의무를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신중론도 나온다. 법이 모호하게 적용될 위험이 있다는 것 역시 문제로 지적된다. 어떤 경우를 '긴급한 상황'으로 볼 것인지 주관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정문 의원은 '구조가 가능함'에도 돕지 않거나 구조를 방해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명시하는 '구조불이행죄' 항목을 신설하는 개정안 발의를 준비하고 있다.

나쁜사마리아인법 입법 추진안
이 의원은 "구급차 이동방해에 대한 법의 사각지대가 드러나게 된 상황에서 우리 사회에서도 긴급상황에서 법적 구호 의무가 필요하다는 '나쁜 사마리안법' 도입이 필요하다"면서 "재난상황이나 긴급한 상황 시에 구조의무를 부과해서 이를 불이행하거나 구조행위를 방해하는 경우엔 최대한 징역형까지 처벌하고, 특히 구조불이행으로 사망하는 경우에는 형량의 2배까지 가중처벌하는 내용도 담을 것"이라고 밝혔다.

'긴급 상황'의 범위나 적용 범위 등은 국회 차원의 공청회 등을 통해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나쁜 사마리아인 법' 발의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앞서 지난 18대 국회에서 '최소한의 윤리성과 사회 연대성마저 무너지고 있다'면서 이 같은 내용의 법안이 발의됐고, 20대 국회에서도 당시 바른정당 박성중 의원이 '구성원의 공동체 의식을 제고하기 위해서'라며 형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두 법안 모두 제대로 된 논의 없이 임기가 만료돼 폐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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