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너희도 147일 계속 일해 봐”…‘녹초된 아베’ 왜 띄우나

입력 2020.08.21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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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신문기자)들은 147일 동안 쉬지 않고 일해 본 적 있어요? 없죠? 그럼 말을 마세요! 140일 일을 안 해 본 사람이 일 한 사람 얘기를 할 필요 없죠."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돌연 도쿄(東京) 시내 한 대학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은 17일 저녁,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가 취재진에게 한 말입니다. "너희가 '총리직의 무게감'을 아느냐"는 듯 능청스럽고 거만한 말투였습니다. 마치 "~해 봤어요? 안 해봤으면 말 마세요!'라며 의혹을 차단하던 달인 김병만 선생을 연상케 했습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와 아소 다로 부총리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와 아소 다로 부총리

■ '녹초 된 아베' 집중 부각

아베 총리의 과로 문제는 측근들의 입을 통해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아베 총리가 코로나19 사태 등에 대응하느라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몸을 혹사했다며 '동정론'에 기대는 눈치입니다. 아마리 아키라(甘利明·70) 자민당 세제조사회장은 17일 자신의 트위터에 이렇게 썼습니다.

"'왜 일정을 연달아 넣어 총리를 못 쉬게 하나. 녹초가 된 상황인데!'라고 총리 비서관을 꾸짖었더니 '아무리 말해도 듣질 않아요. 본인이 안 쉬려고 해요. 대신 좀 설득해 주세요'라고 하더라. 곁에서 본 총리는 틀림없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아마리 회장은 전날인 16일 민영 후지TV의 한 프로그램에서 "(아베 총리는) 쉬는 것을 '죄'라고까지 생각한다"며 강한 책임감을 거론하기도 했고, 정권 핵심 멤버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도 18일 민방 BS 프로그램에서 "조금 더 쉬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건의하고 있다"면서 "'과로 상태'인 아베 총리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거들었습니다.

매일 총리관저 홈페이지와 주요 일간지 지면을 통해 공개되는 아베 총리의 동정을 보면 실제로 1월 26일(일)부터 6월 20일(토)까지 147일간 '공무 없음'(公務なし), 즉 정식으로 쉰 날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근무 강도'도 그럴까요.

일본 정부는 총리관저 홈페이지를 통해 매일 ‘총리 일정’을 공개하고 있다.일본 정부는 총리관저 홈페이지를 통해 매일 ‘총리 일정’을 공개하고 있다.

■ 주말 64%, 2시간 이하 근무

일본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아베 총리가 쉼 없이 일했다는 147일 가운데 주말과 공휴일은 모두 49일이었습니다.

아베 총리가 후쿠시마(福島)에 출장을 간 3월 7일(토)과, 고(故) 히로히토 일왕의 생일을 기리는 '쇼와(昭和)의 날'인 4월 29일(수)을 뺀 휴일은 47일이었고, 하루 평균 집무 시간은 123.1분, 약 2시간이었습니다.

집무 시간이 1시간 이하였던 날은 전체의 27.7%(47일 중 13일), 2시간 이하였던 것이 63.8%(47일 중 30일)입니다. 다시 말해 휴일 집무의 약 30%가 1시간 이하, 60% 이상이 2시간 이하입니다.

물론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이 대세인 요즘, 휴일에도 일해야 하는 현실이 바람직할 리 없습니다. 또 관저에서의 전화 대응 등 총리 동정에 반영되지 않은 업무도 꽤 있었을 겁니다. 다만 이를 감안해도 아베 총리의 '147일 연속 근무'가 보통의 직장인이나 자영업자보다 훨씬 강도가 높다라는 게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의 빈곤퇴치 운동 전문가인 후지타 다카노리(藤田孝典)는 20일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반 노동자를 147일간 쉬지 않고 일하게 했다면 위법한 일이 되겠지만, 아베 총리는 본인 재량으로 일의 양을 조절할 수 있다"며 "총리와 일반 노동자의 일하는 방식이 다른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측근들이 '과로'를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아베 총리를 태운 차량이 17일 도쿄 시내 한 대학 병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출처=산케이신문]아베 총리를 태운 차량이 17일 도쿄 시내 한 대학 병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출처=산케이신문]

■ '피곤한 아베' 왜 띄우나?

그럼 측근들은 왜 이 시점에 '피곤한 아베'를 부각하려는 걸까요.

일부에서는 총리의 건강 문제는 최고 수위의 보안 사항인데 지난 17일, 건강검진 사실이 의외로 쉽게 노출된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일본 기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베 총리의 병원행은 전날인 16일 저녁부터 이미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최근 아베 내각은 악재가 꼬리를 물며 속절없이 추락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계에선 '내각과 집권당의 지지율 합이 50% 미만이면 정권 퇴진으로 이어진다'는 이른바 '아오키 법칙'이 있습니다. 그런데 5월 마이니치(每日)신문 조사에선 이게 52%가 나와 마지노선에 근접했습니다. 자민당 내부에서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분출하는 상황입니다.

이 때문에 당장은 코로나19 대책의 실패나, 정권이 안고 있는 갖가지 비리 사건에 대해 국회나 기자회견장에서 추궁당하고 싶지 않다는 속내부터 읽힙니다. 실제로 20일 열린 일본 여야 국회 대책위원장 회담에서 집권 자민당 측은 "아베 총리 건강 상태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는 야당의 임시국회 소집 요구를 또다시 거부했습니다.

여기에 멀게는 그나마 건강 문제가 비판의 소지가 적은 만큼 '열심히 일하다 건강을 버렸다'는 이미지를 조금씩 언론에 노출시키며 '사임 수순'을 밟는, 일종의 연착륙 전략 아니냐는 분석도 있습니다.

지난 1월 2일 도쿄 인근 가나가와현에서 라운딩을 즐기고 있는 아베 총리. 골프광으로 알려진 아베 총리는 이날 이후 골프를 한번도 치지 못한 상태이다. [교도=연합]지난 1월 2일 도쿄 인근 가나가와현에서 라운딩을 즐기고 있는 아베 총리. 골프광으로 알려진 아베 총리는 이날 이후 골프를 한번도 치지 못한 상태이다. [교도=연합]

■ 부메랑 된 "정치는 결과"

"저는 늘 '정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저 자신도 그 책임을 피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내각 총리대신으로서 국민의 생명과 생활을 지킨다. 그 큰 책임을 앞장서서 완수해 가겠다는 결의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147일 연속 근무했다는 지난 2월 29일(토) 저녁, 아베 총리가 기자회견에서 한 말입니다. '결과 책임'은 아베 총리의 입버릇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말이 부메랑이 돼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아베 총리는 5월 25일 회견에서 "일본만의 방식으로 불과 한 달 반 만에 이번 (코로나19) 유행을 거의 수습하는 것이 가능했다. 정말로 일본 모델의 힘을 보여줬다"고 자랑했지만, 최근 전국으로 확대된 코로나19는 1차 유행 규모를 웃돌고 있습니다. 20일 일본 전역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6만 명을 넘겼습니다.

최근 나온 경제 성적표는 열도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2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속보치)는 연간으로 환산해 -27.8%였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리먼 사태) 당시인 2009년 1분기(-17.8%)보다 나쁜 실적으로, 통계가 나온 1955년 이후 최대 역성장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베 총리 측근들이 경쟁적으로 내놓는 동정심 유발 전략이 잘 먹히지 않을 건 당연해 보입니다. 일본의 한 누리꾼은 트위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연속 근무나 몇 시간 일 했는지가 중요하냐? 할 일만 제대로 해 준다면 하루 간격으로 휴가를 줘도 괜찮다. 정치는 결과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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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너희도 147일 계속 일해 봐”…‘녹초된 아베’ 왜 띄우나
    • 입력 2020-08-21 08:16:33
    특파원 리포트
"당신(신문기자)들은 147일 동안 쉬지 않고 일해 본 적 있어요? 없죠? 그럼 말을 마세요! 140일 일을 안 해 본 사람이 일 한 사람 얘기를 할 필요 없죠."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돌연 도쿄(東京) 시내 한 대학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은 17일 저녁,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가 취재진에게 한 말입니다. "너희가 '총리직의 무게감'을 아느냐"는 듯 능청스럽고 거만한 말투였습니다. 마치 "~해 봤어요? 안 해봤으면 말 마세요!'라며 의혹을 차단하던 달인 김병만 선생을 연상케 했습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와 아소 다로 부총리
■ '녹초 된 아베' 집중 부각

아베 총리의 과로 문제는 측근들의 입을 통해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아베 총리가 코로나19 사태 등에 대응하느라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몸을 혹사했다며 '동정론'에 기대는 눈치입니다. 아마리 아키라(甘利明·70) 자민당 세제조사회장은 17일 자신의 트위터에 이렇게 썼습니다.

"'왜 일정을 연달아 넣어 총리를 못 쉬게 하나. 녹초가 된 상황인데!'라고 총리 비서관을 꾸짖었더니 '아무리 말해도 듣질 않아요. 본인이 안 쉬려고 해요. 대신 좀 설득해 주세요'라고 하더라. 곁에서 본 총리는 틀림없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아마리 회장은 전날인 16일 민영 후지TV의 한 프로그램에서 "(아베 총리는) 쉬는 것을 '죄'라고까지 생각한다"며 강한 책임감을 거론하기도 했고, 정권 핵심 멤버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도 18일 민방 BS 프로그램에서 "조금 더 쉬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건의하고 있다"면서 "'과로 상태'인 아베 총리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거들었습니다.

매일 총리관저 홈페이지와 주요 일간지 지면을 통해 공개되는 아베 총리의 동정을 보면 실제로 1월 26일(일)부터 6월 20일(토)까지 147일간 '공무 없음'(公務なし), 즉 정식으로 쉰 날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근무 강도'도 그럴까요.

일본 정부는 총리관저 홈페이지를 통해 매일 ‘총리 일정’을 공개하고 있다.
■ 주말 64%, 2시간 이하 근무

일본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아베 총리가 쉼 없이 일했다는 147일 가운데 주말과 공휴일은 모두 49일이었습니다.

아베 총리가 후쿠시마(福島)에 출장을 간 3월 7일(토)과, 고(故) 히로히토 일왕의 생일을 기리는 '쇼와(昭和)의 날'인 4월 29일(수)을 뺀 휴일은 47일이었고, 하루 평균 집무 시간은 123.1분, 약 2시간이었습니다.

집무 시간이 1시간 이하였던 날은 전체의 27.7%(47일 중 13일), 2시간 이하였던 것이 63.8%(47일 중 30일)입니다. 다시 말해 휴일 집무의 약 30%가 1시간 이하, 60% 이상이 2시간 이하입니다.

물론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이 대세인 요즘, 휴일에도 일해야 하는 현실이 바람직할 리 없습니다. 또 관저에서의 전화 대응 등 총리 동정에 반영되지 않은 업무도 꽤 있었을 겁니다. 다만 이를 감안해도 아베 총리의 '147일 연속 근무'가 보통의 직장인이나 자영업자보다 훨씬 강도가 높다라는 게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일본의 빈곤퇴치 운동 전문가인 후지타 다카노리(藤田孝典)는 20일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반 노동자를 147일간 쉬지 않고 일하게 했다면 위법한 일이 되겠지만, 아베 총리는 본인 재량으로 일의 양을 조절할 수 있다"며 "총리와 일반 노동자의 일하는 방식이 다른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측근들이 '과로'를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아베 총리를 태운 차량이 17일 도쿄 시내 한 대학 병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출처=산케이신문]
■ '피곤한 아베' 왜 띄우나?

그럼 측근들은 왜 이 시점에 '피곤한 아베'를 부각하려는 걸까요.

일부에서는 총리의 건강 문제는 최고 수위의 보안 사항인데 지난 17일, 건강검진 사실이 의외로 쉽게 노출된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일본 기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베 총리의 병원행은 전날인 16일 저녁부터 이미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최근 아베 내각은 악재가 꼬리를 물며 속절없이 추락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계에선 '내각과 집권당의 지지율 합이 50% 미만이면 정권 퇴진으로 이어진다'는 이른바 '아오키 법칙'이 있습니다. 그런데 5월 마이니치(每日)신문 조사에선 이게 52%가 나와 마지노선에 근접했습니다. 자민당 내부에서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분출하는 상황입니다.

이 때문에 당장은 코로나19 대책의 실패나, 정권이 안고 있는 갖가지 비리 사건에 대해 국회나 기자회견장에서 추궁당하고 싶지 않다는 속내부터 읽힙니다. 실제로 20일 열린 일본 여야 국회 대책위원장 회담에서 집권 자민당 측은 "아베 총리 건강 상태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는 야당의 임시국회 소집 요구를 또다시 거부했습니다.

여기에 멀게는 그나마 건강 문제가 비판의 소지가 적은 만큼 '열심히 일하다 건강을 버렸다'는 이미지를 조금씩 언론에 노출시키며 '사임 수순'을 밟는, 일종의 연착륙 전략 아니냐는 분석도 있습니다.

지난 1월 2일 도쿄 인근 가나가와현에서 라운딩을 즐기고 있는 아베 총리. 골프광으로 알려진 아베 총리는 이날 이후 골프를 한번도 치지 못한 상태이다. [교도=연합]
■ 부메랑 된 "정치는 결과"

"저는 늘 '정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저 자신도 그 책임을 피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내각 총리대신으로서 국민의 생명과 생활을 지킨다. 그 큰 책임을 앞장서서 완수해 가겠다는 결의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147일 연속 근무했다는 지난 2월 29일(토) 저녁, 아베 총리가 기자회견에서 한 말입니다. '결과 책임'은 아베 총리의 입버릇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말이 부메랑이 돼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아베 총리는 5월 25일 회견에서 "일본만의 방식으로 불과 한 달 반 만에 이번 (코로나19) 유행을 거의 수습하는 것이 가능했다. 정말로 일본 모델의 힘을 보여줬다"고 자랑했지만, 최근 전국으로 확대된 코로나19는 1차 유행 규모를 웃돌고 있습니다. 20일 일본 전역의 코로나19 누적 확진자는 6만 명을 넘겼습니다.

최근 나온 경제 성적표는 열도에 큰 충격을 줬습니다. 2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속보치)는 연간으로 환산해 -27.8%였습니다. 글로벌 금융위기(리먼 사태) 당시인 2009년 1분기(-17.8%)보다 나쁜 실적으로, 통계가 나온 1955년 이후 최대 역성장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베 총리 측근들이 경쟁적으로 내놓는 동정심 유발 전략이 잘 먹히지 않을 건 당연해 보입니다. 일본의 한 누리꾼은 트위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연속 근무나 몇 시간 일 했는지가 중요하냐? 할 일만 제대로 해 준다면 하루 간격으로 휴가를 줘도 괜찮다. 정치는 결과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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