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포해전의 명장 신여량, 그리고 엉터리 기록들

입력 2020.08.31 (11:40)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박물관이 다시 굳게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코로나19 확산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죠. 관람을 손꼽아 기다려온 분들의 탄식이 들리는 듯합니다. 전시를 하나라도 봤다면 그나마 운이 좋은 거죠. 국립중앙박물관 재개관에 맞춰 선보인 <신국보보물전>을 관람한 뒤, 언제나 그렇듯 두꺼운 도록을 찬찬히 넘기며 유물 하나하나를 다시 마음으로 어루만졌습니다. 그렇게 책장을 넘기다가 문득 한 유물에 관한 해설문에서 흥미로운 구절을 만납니다.

<신여량 상가교서>, 조선 1604년, 종이에 먹, 78.5×248.5cm, 보물 제1937호, 국립광주박물관<신여량 상가교서>, 조선 1604년, 종이에 먹, 78.5×248.5cm, 보물 제1937호, 국립광주박물관

"이 문서의 주인공 신여량은 본관이 고령(高靈), 자가 중임(重任), 호가 봉헌(鳳軒)으로, 전라도 흥양현(興陽縣, 오늘날 전라남도 고흥군) 출신이다. 그는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장수로서 크게 활약하였고, 1605년(선조 38) 전라우도(全羅右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었다. 당포 앞바다 해전을 기념하여 그린 그림으로 <당포전양승첩도 唐浦前洋勝捷圖> 2점이 남아 있다."

제가 눈여겨본 것은 마지막 줄에 보이는 그림 2점의 존재입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밑에서 함께 싸운 신여량이란 장수의 당포 앞바다 해전을 기념하는 그림이 있다! 전쟁과 관련한 조선시대 그림이 워낙 희귀한 터라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요. 위 유물 또한 그 해전과 관련된 문서입니다. 1604년(선조 37) 해전에서 공을 세운 신여량의 품계를 올려준다는 내용이 담겼죠. 오늘날로 치면 '상장'인 셈입니다.

그림으로 그려 기념할 정도였으니 당포해전이 당시에 '빛나는 승전'으로 인정됐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림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겠구나 여겼다가 생각 밖에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명확하지 않은 정보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물 해설문에 적힌 대로 그림은 분명 두 점이 맞습니다. <당포전양승첩지도 唐浦前洋勝捷之圖>란 같은 제목의 두 그림은 그러나 여러 면에서 조금 다릅니다.

<당포전양승첩지도>, 조선 후기, 68×120.5cm, 전(前)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47호, 국립광주박물관<당포전양승첩지도>, 조선 후기, 68×120.5cm, 전(前)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47호, 국립광주박물관

먼저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된 그림부터 보겠습니다. 맨 위에 제목이 있고, 그 아래 해상 전투 장면을 그렸습니다. 그 밑에는 전투에 참여한 28명의 관직과 이름, 자, 생년, 본관, 거주지를 순서대로 적었습니다. 이 그림은 신여량의 가문인 고령 신씨 문중에서 보관해 오다가 1987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47호로 지정됐고, 2003년에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됐습니다. 그림이 언제 그려졌는지 알려주는 기록이 없어, 후대에 옮겨 그린 이모본(移摸本)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포전양승첩지도>의 그림 부분<당포전양승첩지도>의 그림 부분

이제 그림을 자세히 볼까요. 화면 왼쪽에 다른 배와 확실히 다르게 생긴 커다란 배 한 척이 보입니다. 적들이 타고 온 배입니다. 맞은 편에는 선단에서 가장 큰 배가 있죠. 조선 수군의 대장선입니다. 갑판 위에 앉아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이 전투 작전을 지휘하는 조선 수군 사령관입니다. 크고 작은 조선 수군의 배가 적선을 에워싼 채 활을 쏘고, 적선 위에서는 아군과 적군 병사들이 창칼을 휘두르며 선상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에 묘사된 전투는 대체 무엇인가. 두 차례 왜란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1604년 6월의 어느 날, 경남 남해 통영 앞바다에 크고 검은 수상한 배가 나타납니다. 첩보를 입수한 조선 수군은 즉각 전투선을 띄우죠. 밤새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상당수의 일본인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전과를 올립니다. 포로 중에는 중국인과 남만인도 있었습니다. 사로잡은 이들을 심문해보니, 이 배는 캄보디아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는 길에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조선까지 흘러온 것이었습니다.

전투가 벌어진 지역은 당포(唐浦).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두 번째 원정에 올라 해전을 치른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꼬박 하루 만에 적선을 제압하고 난 뒤 당시 삼도수군통제사는 곧바로 조정에 이 사실을 보고했고, 포로들을 한양으로 압송해 다시 심문합니다. 그 결과 문제의 배는 단순한 무역선이 아니라 당시 일본의 통치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캄보디아와 공식 통상을 맺기 위해 처음으로 보낸 무역사절선이란 사실이 밝혀집니다.

정유재란이 끝난 뒤 6년이 흐른 시점이었고, 폐허가 된 국가를 재건하는 혼란스러운 시기였음에도 조선 수군의 해상 방위 능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음을 이 전투는 고스란히 입증했죠. 그래서 이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 전투를 기념하는 그림이 그려진 겁니다. 통상 이 전투를 <당포해전>이라 부릅니다. 그러다 보니 혼동이 일어나죠. <당포해전>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끈 승전을 떠올립니다.

임진왜란 시기의 <당포해전>과 임진왜란 이후의 <당포해전>

문화재청 누리집에서 검색한 유물 해설문화재청 누리집에서 검색한 유물 해설

그렇다면 문화재청의 유물 해설에는 대체 뭐라고 돼 있을까. 문화재청 누리집의 [문화재 검색]에서 해당 그림을 찾아봤습니다. 유물 해설을 읽어보니 첫 줄부터 잘못됐습니다. 이 그림은 임진왜란과 관련이 없는 데도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공을 막아냈던 공신들에게 왕이 하사했던 그림이라고 전하고 있다.>고 돼 있죠. 첫 단추를 잘못 끼웠으니 다음은 안 봐도 뻔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당포 앞바다에서 왜적과 싸워 승리하던 장면을 그린 것>이라고 소개한 뒤 마지막 줄에 <임진왜란과 관계된 그림으로, 당시 전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강조까지 해놨습니다.

모두 틀린 말입니다. 이런 엉터리 역사 기록이 버젓이 적혀 있는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듯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의 당포해전>과 그림에 묘사된 <1604년의 당포해전>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포전양승첩지도>, 조선 후기, 80×150cm,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5호<당포전양승첩지도>, 조선 후기, 80×150cm,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5호


또 하나, 문화재청 누리집에서 찾은 <당포전양승첩지도>는 제가 위에 설명한 그 그림이 아닙니다. 두 점 가운데 아직 소개하지 않은 나머지 그림이죠. 위에서 본 그림이 신여량의 문중에서 오래도록 고이 모셔온 가문의 보물이라면, 문화재청 누리집에 보이는 그림은 함평 노씨 문중에서 보관해온 다른 그림입니다. 함평 노씨 후손들이 그림을 대대로 간수한 이유도 마찬가지로 같은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운 노홍(魯鴻)이란 자신들의 조상 때문입니다. 다른 두 문중에서 같은 전투를 묘사한 그림을 각각 보관해온 거죠.

그림 상단 제목 오른쪽에 적혀 있는 글씨그림 상단 제목 오른쪽에 적혀 있는 글씨

제목부터 그림의 내용, 아래 명단까지 두 그림은 거의 같습니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죠. 두 그림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표지가 있습니다. 함평 노씨 가문에서 전해진 그림의 제목 오른쪽에 작은 글씨로 한자 네 글자가 적혀 있는 게 보입니다. 갑진 유월(甲辰 六月), 즉 1604년을 가리킵니다. 이 글자가 그림을 그린 시기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1604년이란 구체적인 시기를 적어놓았다는 점에서 고령 신씨 가문에 전해지는 그림보다 앞서 그려진 '원본격'으로 간주합니다.

<함평 노씨본>과 <고령 신씨본>은 유물번호가 같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황당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문화재청 누리집에는 <함평 노씨본>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호라고 소개돼 있는데요. 그런데 국립광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령 신씨본>을 국립중앙박물관이 운영하는 전국박물관소장품검색 서비스 'e뮤지엄'에서 찾아보니, 여기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호라고 돼 있더군요. 그림이 다른데, 유물번호는 같다? 말이 안 되죠. 어느 한쪽은 분명 잘못됐다는 뜻입니다.

(좌) 문화재청 누리집 (우) e뮤지엄 누리집(좌) 문화재청 누리집 (우) e뮤지엄 누리집

자료를 이리저리 뒤지던 와중에 <「당포해전승첩지도」와 임란 종전 후 해상 방위>라는 논문을 구해 읽었습니다. 한국고미술연구소가 2005년에 발간한 『국립박물관 동원학술논문집』 제7집에 수록된 이 논문을 보면, <함평 노씨본>과 <고령 신씨본>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죠. <함평 노씨본>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호가 맞습니다. 하지만 <고령 신씨본>은 번호가 다릅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47호입니다. 'e뮤지엄'에 잘못된 정보가 담긴 겁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고령 신씨본>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47호에서 해제됐습니다. <고령 신씨본>은 이 글의 앞머리에 소개해드린 <신여량 상가교서>와 함께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됐고, 기증된 유물 가운데 <신여량 상가교서>와 <신여량 밀부유서> 2건이 보물로 승격되면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에서 해제된 거죠. 따라서 정확하게 표현하면 <고령 신씨본>은 전(前)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47호인 것이고, 문화재 지정이 해제된 이상 그와 같은 표기마저도 지우는 것이 옳습니다.

신여량의 사망 시기는 임진왜란 때? 아니면 그 이후?

애초의 오류는 신여량의 사망 시기를 잘못 기록하는 혼란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이 문제는 앞서 검토한 것처럼, 임진왜란 시기의 <당포해전>과 임진왜란 이후의 <당포해전>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죠. 신여량이 세상을 떠난 이후 어느 시점에 생산된 잘못된 정보가 책에서 책으로 옮겨지고 전승되는 과정에서 마치 정설처럼 굳어진 겁니다. 신여량이 임진왜란 때 전사했다는 아래 기록이 대표적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누리집에서 확인되는 신여량의 생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누리집에서 확인되는 신여량의 생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누리집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두 번째 문장까지는 맞는 내용이죠. 하지만 세 번째 문장은 시기적으로도 앞뒤가 전혀 안 맞습니다. 수군절도사에 올라 통제사 이순신 밑에서 싸웠다? 말이 안 되죠. <당포승전도>가 임진왜란 때의 그 <당포해전>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확인했고요. 1593년 진도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기록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에 관한 해답을 알려주는 자료가 있습니다. 전남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 이수경 선임연구원이 쓴 <조선중기 무장 신여량의 행적 재검토>라는 논문입니다. 전사설이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은 복잡해서 여기서는 자세하게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명확한 것은 맨 앞에서 소개해드린 <신여량 상가교서>가 1604년 유물이라는 점만 봐도 신여량이 최소한 1604년까지는 살아 있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수경 연구원의 논문을 보면, 신여량은 1605년 12월 말에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됐고, 1606년 1월 9일에 부임했다가, 얼마 뒤 과거의 행적으로 인해 중도 하차한 사실이 『전라우수영지』에 분명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따라서 신여량이 사망한 해는 1606년 이후이고, 아무리 빨리 잡아도 1606년인 겁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 보니 신여량의 사망한 해를 잘못 알려주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 두산백과(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 두산백과

왼쪽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누리집에는 사망연도가 1593년으로 돼 있습니다. 전사했다는 설을 그대로 받아들인 겁니다. 오른쪽 두산백과도 마찬가지로 1593년이라고 적어 놓았죠. 심지어 두산백과에는 출생연도가 물음표로 돼 있습니다. 신여량은 1564년에 태어나 1606년에 돌아갔습니다. 연구자들의 정밀한 논문을 통해 사실을 확인한 이상, 이런 초보적인 오류들은 즉각 수정돼야 합니다. 잘못된 정보는 거듭되는 검색을 통해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되기 때문입니다.

신여량이라는 인물이 주는 생소함 때문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신여량이 임진왜란 시기에 세운 공로는 큽니다. 왕의 의주 피난길을 수행했고, 권율 장군과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왜적을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죠. 그림에 묘사된 1604년의 <당포해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 분들의 노고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거겠죠. <당포전양승첩지도>라는 그림 하나가 주는 의미는 이토록 넓고도 깊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당포해전의 명장 신여량, 그리고 엉터리 기록들
    • 입력 2020-08-31 11:40:35
    취재K
박물관이 다시 굳게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코로나19 확산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죠. 관람을 손꼽아 기다려온 분들의 탄식이 들리는 듯합니다. 전시를 하나라도 봤다면 그나마 운이 좋은 거죠. 국립중앙박물관 재개관에 맞춰 선보인 <신국보보물전>을 관람한 뒤, 언제나 그렇듯 두꺼운 도록을 찬찬히 넘기며 유물 하나하나를 다시 마음으로 어루만졌습니다. 그렇게 책장을 넘기다가 문득 한 유물에 관한 해설문에서 흥미로운 구절을 만납니다.

<신여량 상가교서>, 조선 1604년, 종이에 먹, 78.5×248.5cm, 보물 제1937호, 국립광주박물관
"이 문서의 주인공 신여량은 본관이 고령(高靈), 자가 중임(重任), 호가 봉헌(鳳軒)으로, 전라도 흥양현(興陽縣, 오늘날 전라남도 고흥군) 출신이다. 그는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과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장수로서 크게 활약하였고, 1605년(선조 38) 전라우도(全羅右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었다. 당포 앞바다 해전을 기념하여 그린 그림으로 <당포전양승첩도 唐浦前洋勝捷圖> 2점이 남아 있다."

제가 눈여겨본 것은 마지막 줄에 보이는 그림 2점의 존재입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밑에서 함께 싸운 신여량이란 장수의 당포 앞바다 해전을 기념하는 그림이 있다! 전쟁과 관련한 조선시대 그림이 워낙 희귀한 터라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요. 위 유물 또한 그 해전과 관련된 문서입니다. 1604년(선조 37) 해전에서 공을 세운 신여량의 품계를 올려준다는 내용이 담겼죠. 오늘날로 치면 '상장'인 셈입니다.

그림으로 그려 기념할 정도였으니 당포해전이 당시에 '빛나는 승전'으로 인정됐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림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겠구나 여겼다가 생각 밖에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명확하지 않은 정보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물 해설문에 적힌 대로 그림은 분명 두 점이 맞습니다. <당포전양승첩지도 唐浦前洋勝捷之圖>란 같은 제목의 두 그림은 그러나 여러 면에서 조금 다릅니다.

<당포전양승첩지도>, 조선 후기, 68×120.5cm, 전(前)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47호, 국립광주박물관
먼저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된 그림부터 보겠습니다. 맨 위에 제목이 있고, 그 아래 해상 전투 장면을 그렸습니다. 그 밑에는 전투에 참여한 28명의 관직과 이름, 자, 생년, 본관, 거주지를 순서대로 적었습니다. 이 그림은 신여량의 가문인 고령 신씨 문중에서 보관해 오다가 1987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47호로 지정됐고, 2003년에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됐습니다. 그림이 언제 그려졌는지 알려주는 기록이 없어, 후대에 옮겨 그린 이모본(移摸本)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포전양승첩지도>의 그림 부분
이제 그림을 자세히 볼까요. 화면 왼쪽에 다른 배와 확실히 다르게 생긴 커다란 배 한 척이 보입니다. 적들이 타고 온 배입니다. 맞은 편에는 선단에서 가장 큰 배가 있죠. 조선 수군의 대장선입니다. 갑판 위에 앉아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이 전투 작전을 지휘하는 조선 수군 사령관입니다. 크고 작은 조선 수군의 배가 적선을 에워싼 채 활을 쏘고, 적선 위에서는 아군과 적군 병사들이 창칼을 휘두르며 선상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에 묘사된 전투는 대체 무엇인가. 두 차례 왜란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1604년 6월의 어느 날, 경남 남해 통영 앞바다에 크고 검은 수상한 배가 나타납니다. 첩보를 입수한 조선 수군은 즉각 전투선을 띄우죠. 밤새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상당수의 일본인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전과를 올립니다. 포로 중에는 중국인과 남만인도 있었습니다. 사로잡은 이들을 심문해보니, 이 배는 캄보디아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는 길에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조선까지 흘러온 것이었습니다.

전투가 벌어진 지역은 당포(唐浦).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두 번째 원정에 올라 해전을 치른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꼬박 하루 만에 적선을 제압하고 난 뒤 당시 삼도수군통제사는 곧바로 조정에 이 사실을 보고했고, 포로들을 한양으로 압송해 다시 심문합니다. 그 결과 문제의 배는 단순한 무역선이 아니라 당시 일본의 통치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캄보디아와 공식 통상을 맺기 위해 처음으로 보낸 무역사절선이란 사실이 밝혀집니다.

정유재란이 끝난 뒤 6년이 흐른 시점이었고, 폐허가 된 국가를 재건하는 혼란스러운 시기였음에도 조선 수군의 해상 방위 능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음을 이 전투는 고스란히 입증했죠. 그래서 이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 전투를 기념하는 그림이 그려진 겁니다. 통상 이 전투를 <당포해전>이라 부릅니다. 그러다 보니 혼동이 일어나죠. <당포해전>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끈 승전을 떠올립니다.

임진왜란 시기의 <당포해전>과 임진왜란 이후의 <당포해전>

문화재청 누리집에서 검색한 유물 해설
그렇다면 문화재청의 유물 해설에는 대체 뭐라고 돼 있을까. 문화재청 누리집의 [문화재 검색]에서 해당 그림을 찾아봤습니다. 유물 해설을 읽어보니 첫 줄부터 잘못됐습니다. 이 그림은 임진왜란과 관련이 없는 데도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공을 막아냈던 공신들에게 왕이 하사했던 그림이라고 전하고 있다.>고 돼 있죠. 첫 단추를 잘못 끼웠으니 다음은 안 봐도 뻔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당포 앞바다에서 왜적과 싸워 승리하던 장면을 그린 것>이라고 소개한 뒤 마지막 줄에 <임진왜란과 관계된 그림으로, 당시 전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강조까지 해놨습니다.

모두 틀린 말입니다. 이런 엉터리 역사 기록이 버젓이 적혀 있는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듯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의 당포해전>과 그림에 묘사된 <1604년의 당포해전>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포전양승첩지도>, 조선 후기, 80×150cm,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5호

또 하나, 문화재청 누리집에서 찾은 <당포전양승첩지도>는 제가 위에 설명한 그 그림이 아닙니다. 두 점 가운데 아직 소개하지 않은 나머지 그림이죠. 위에서 본 그림이 신여량의 문중에서 오래도록 고이 모셔온 가문의 보물이라면, 문화재청 누리집에 보이는 그림은 함평 노씨 문중에서 보관해온 다른 그림입니다. 함평 노씨 후손들이 그림을 대대로 간수한 이유도 마찬가지로 같은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운 노홍(魯鴻)이란 자신들의 조상 때문입니다. 다른 두 문중에서 같은 전투를 묘사한 그림을 각각 보관해온 거죠.

그림 상단 제목 오른쪽에 적혀 있는 글씨
제목부터 그림의 내용, 아래 명단까지 두 그림은 거의 같습니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죠. 두 그림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표지가 있습니다. 함평 노씨 가문에서 전해진 그림의 제목 오른쪽에 작은 글씨로 한자 네 글자가 적혀 있는 게 보입니다. 갑진 유월(甲辰 六月), 즉 1604년을 가리킵니다. 이 글자가 그림을 그린 시기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1604년이란 구체적인 시기를 적어놓았다는 점에서 고령 신씨 가문에 전해지는 그림보다 앞서 그려진 '원본격'으로 간주합니다.

<함평 노씨본>과 <고령 신씨본>은 유물번호가 같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황당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문화재청 누리집에는 <함평 노씨본>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호라고 소개돼 있는데요. 그런데 국립광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령 신씨본>을 국립중앙박물관이 운영하는 전국박물관소장품검색 서비스 'e뮤지엄'에서 찾아보니, 여기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호라고 돼 있더군요. 그림이 다른데, 유물번호는 같다? 말이 안 되죠. 어느 한쪽은 분명 잘못됐다는 뜻입니다.

(좌) 문화재청 누리집 (우) e뮤지엄 누리집
자료를 이리저리 뒤지던 와중에 <「당포해전승첩지도」와 임란 종전 후 해상 방위>라는 논문을 구해 읽었습니다. 한국고미술연구소가 2005년에 발간한 『국립박물관 동원학술논문집』 제7집에 수록된 이 논문을 보면, <함평 노씨본>과 <고령 신씨본>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죠. <함평 노씨본>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호가 맞습니다. 하지만 <고령 신씨본>은 번호가 다릅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47호입니다. 'e뮤지엄'에 잘못된 정보가 담긴 겁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고령 신씨본>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47호에서 해제됐습니다. <고령 신씨본>은 이 글의 앞머리에 소개해드린 <신여량 상가교서>와 함께 국립광주박물관에 기증됐고, 기증된 유물 가운데 <신여량 상가교서>와 <신여량 밀부유서> 2건이 보물로 승격되면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에서 해제된 거죠. 따라서 정확하게 표현하면 <고령 신씨본>은 전(前)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47호인 것이고, 문화재 지정이 해제된 이상 그와 같은 표기마저도 지우는 것이 옳습니다.

신여량의 사망 시기는 임진왜란 때? 아니면 그 이후?

애초의 오류는 신여량의 사망 시기를 잘못 기록하는 혼란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이 문제는 앞서 검토한 것처럼, 임진왜란 시기의 <당포해전>과 임진왜란 이후의 <당포해전>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죠. 신여량이 세상을 떠난 이후 어느 시점에 생산된 잘못된 정보가 책에서 책으로 옮겨지고 전승되는 과정에서 마치 정설처럼 굳어진 겁니다. 신여량이 임진왜란 때 전사했다는 아래 기록이 대표적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누리집에서 확인되는 신여량의 생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누리집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두 번째 문장까지는 맞는 내용이죠. 하지만 세 번째 문장은 시기적으로도 앞뒤가 전혀 안 맞습니다. 수군절도사에 올라 통제사 이순신 밑에서 싸웠다? 말이 안 되죠. <당포승전도>가 임진왜란 때의 그 <당포해전>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사실은 앞에서 이미 확인했고요. 1593년 진도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기록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부분에 관한 해답을 알려주는 자료가 있습니다. 전남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 이수경 선임연구원이 쓴 <조선중기 무장 신여량의 행적 재검토>라는 논문입니다. 전사설이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은 복잡해서 여기서는 자세하게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명확한 것은 맨 앞에서 소개해드린 <신여량 상가교서>가 1604년 유물이라는 점만 봐도 신여량이 최소한 1604년까지는 살아 있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수경 연구원의 논문을 보면, 신여량은 1605년 12월 말에 전라우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됐고, 1606년 1월 9일에 부임했다가, 얼마 뒤 과거의 행적으로 인해 중도 하차한 사실이 『전라우수영지』에 분명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따라서 신여량이 사망한 해는 1606년 이후이고, 아무리 빨리 잡아도 1606년인 겁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 보니 신여량의 사망한 해를 잘못 알려주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습니다.

(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 두산백과
왼쪽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누리집에는 사망연도가 1593년으로 돼 있습니다. 전사했다는 설을 그대로 받아들인 겁니다. 오른쪽 두산백과도 마찬가지로 1593년이라고 적어 놓았죠. 심지어 두산백과에는 출생연도가 물음표로 돼 있습니다. 신여량은 1564년에 태어나 1606년에 돌아갔습니다. 연구자들의 정밀한 논문을 통해 사실을 확인한 이상, 이런 초보적인 오류들은 즉각 수정돼야 합니다. 잘못된 정보는 거듭되는 검색을 통해 계속해서 확대 재생산되기 때문입니다.

신여량이라는 인물이 주는 생소함 때문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신여량이 임진왜란 시기에 세운 공로는 큽니다. 왕의 의주 피난길을 수행했고, 권율 장군과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왜적을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죠. 그림에 묘사된 1604년의 <당포해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런 분들의 노고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거겠죠. <당포전양승첩지도>라는 그림 하나가 주는 의미는 이토록 넓고도 깊습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