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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병 돌 땐 명절에 차례도 안 지냈다
입력 2020.09.24 (07:01) 수정 2020.09.24 (09:25) 취재K
정부가 코로나19 재확산을 우려해 이번 추석에는 될 수 있으면 고향에 내려가지 말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 차례를 지내다 집단감염이라도 될까 우려하는 거죠. 그렇다면 유교 사상이 강했던 조선시대에는 역병이 돌 때 어떻게 했을까요?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의 옛 일기자료에서 당시 상황을 일부 엿볼 수 있습니다. 먼저 대표적인 양반 마을인 안동 하회마을의 류의목(柳懿睦, 1785~1833)이 쓴 《하와일록(河窩日錄)》입니다.

류의목의 하와일록(한국국학진흥원 제공)류의목의 하와일록(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추석 하루 전인 음력 1798년 8월 14일 자 일기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痘虎方熾。諸父議定不祭秋夕

해석하면 "마마(천연두)가 사방에 퍼져 마을에서 의논해 추석에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정했다"는 뜻입니다. 안동 풍산의 낙애 김두흠(金斗欽, 1804~1877)이 쓴 일기 《일록(日錄)》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김두흠의 일록(한국국학진흥원 제공)김두흠의 일록(한국국학진흥원 제공)

당시에도 역시 천연두가 극성을 부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음력 1851년 3월 5일 자 일기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寒食以痘警逼隣未行茶禮不勝感愴

"한식인데 천연두가 이웃 마을까지 번져서 두렵다. 그래서 차례를 행하지 못했다. 조상께 송구스럽기 그지없다."는 뜻입니다.

《현종실록》을 보면 "팔도에 전염병이 크게 퍼져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홍역과 천연두로 죽은 사람이 가장 많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현종실록》이 작성된 17세기뿐 아니라 18세기 《하와일록》과 19세기 김두흠의 《일록》을 통해 홍역과 천연두가 수백 년에 걸쳐 발생했음을 알 수 있는데요. 16세기에 쓴 옛 문헌도 볼까요?

경북 예천에 살고 있던 초간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1582년 2월 15일에 쓴 《초간일기(草澗日記)》입니다.

권문해의 초간일기(한국국학진흥원 제공)권문해의 초간일기(한국국학진흥원 제공)

家中疫氣方熾。未行茶禮于家廟。極爲未安

"역병이 번지기 시작해 차례를 행하지 못하니 몹시 송구스러웠다"고 돼 있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쓴 일기에는 "증손자가 홍역에 걸려 아파하기 시작했다"는 내용도 실려 있습니다.

홍역으로 인해 차례를 지내지 못했다는 내용은 안동 예안의 계암 김령(金坽, 1577~1641)이 쓴 《계암일록(溪巖日錄)》에서도 나타납니다.

김령의 계암일록(한국국학진흥원 제공)김령의 계암일록(한국국학진흥원 제공)

단오인 1609년 5월 5일 자 일기에는 "역병 때문에 차례를 중단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또 이때로부터 나흘 전인 5월 1일 자 일기에는 "홍역이 아주 가까운 곳까지 퍼졌다"라는 구절도 확인됩니다.

한국국학진흥원 김미영 수석연구원은 유교적 성향이 가장 강한 안동에서, 그것도 당대 유명한 유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명문가들을 중심으로 이런 자료가 발견됐다는 점이 상당히 흥미롭다고 말합니다. '예'를 몹시 중시했던 이들조차 전염병이 돌 때는 차례나 제사를 생략했다는 데서 의미가 크다는 겁니다.

또 우리 선조들이 이런 결단을 내린 배경은, '예'의 본질적 의미 '시성' 때문이라고 김 연구원은 설명합니다. '시성'은 형식을 기계적으로, 무조건으로 수행한다고 해서 예를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때에 맞게 합당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융통성을 발휘해 과감히 차례를 생략하는 게 오히려 예에 합당하다고 판단했다는 거죠.

이번에 공개된 자료들은 모두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하고 있던 7백여 종의 옛 일기들 가운데 일부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예산을 지원하고, 한국국학진흥원이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장기 프로젝트'를 통해 한글화 작업을 마친 자료에서만 찾아낸 건데요. 따라서 나머지 한문 자료들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일기들이 더 있을 거로 보여, '차례 생략'이 일부 지역이나 가문 만의 사례는 아니라고 국학진흥원은 설명했습니다.
  • 조선시대 역병 돌 땐 명절에 차례도 안 지냈다
    • 입력 2020-09-24 07:01:19
    • 수정2020-09-24 09:25:46
    취재K
정부가 코로나19 재확산을 우려해 이번 추석에는 될 수 있으면 고향에 내려가지 말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 차례를 지내다 집단감염이라도 될까 우려하는 거죠. 그렇다면 유교 사상이 강했던 조선시대에는 역병이 돌 때 어떻게 했을까요?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의 옛 일기자료에서 당시 상황을 일부 엿볼 수 있습니다. 먼저 대표적인 양반 마을인 안동 하회마을의 류의목(柳懿睦, 1785~1833)이 쓴 《하와일록(河窩日錄)》입니다.

류의목의 하와일록(한국국학진흥원 제공)류의목의 하와일록(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추석 하루 전인 음력 1798년 8월 14일 자 일기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痘虎方熾。諸父議定不祭秋夕

해석하면 "마마(천연두)가 사방에 퍼져 마을에서 의논해 추석에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정했다"는 뜻입니다. 안동 풍산의 낙애 김두흠(金斗欽, 1804~1877)이 쓴 일기 《일록(日錄)》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김두흠의 일록(한국국학진흥원 제공)김두흠의 일록(한국국학진흥원 제공)

당시에도 역시 천연두가 극성을 부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음력 1851년 3월 5일 자 일기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寒食以痘警逼隣未行茶禮不勝感愴

"한식인데 천연두가 이웃 마을까지 번져서 두렵다. 그래서 차례를 행하지 못했다. 조상께 송구스럽기 그지없다."는 뜻입니다.

《현종실록》을 보면 "팔도에 전염병이 크게 퍼져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홍역과 천연두로 죽은 사람이 가장 많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현종실록》이 작성된 17세기뿐 아니라 18세기 《하와일록》과 19세기 김두흠의 《일록》을 통해 홍역과 천연두가 수백 년에 걸쳐 발생했음을 알 수 있는데요. 16세기에 쓴 옛 문헌도 볼까요?

경북 예천에 살고 있던 초간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1582년 2월 15일에 쓴 《초간일기(草澗日記)》입니다.

권문해의 초간일기(한국국학진흥원 제공)권문해의 초간일기(한국국학진흥원 제공)

家中疫氣方熾。未行茶禮于家廟。極爲未安

"역병이 번지기 시작해 차례를 행하지 못하니 몹시 송구스러웠다"고 돼 있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쓴 일기에는 "증손자가 홍역에 걸려 아파하기 시작했다"는 내용도 실려 있습니다.

홍역으로 인해 차례를 지내지 못했다는 내용은 안동 예안의 계암 김령(金坽, 1577~1641)이 쓴 《계암일록(溪巖日錄)》에서도 나타납니다.

김령의 계암일록(한국국학진흥원 제공)김령의 계암일록(한국국학진흥원 제공)

단오인 1609년 5월 5일 자 일기에는 "역병 때문에 차례를 중단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또 이때로부터 나흘 전인 5월 1일 자 일기에는 "홍역이 아주 가까운 곳까지 퍼졌다"라는 구절도 확인됩니다.

한국국학진흥원 김미영 수석연구원은 유교적 성향이 가장 강한 안동에서, 그것도 당대 유명한 유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명문가들을 중심으로 이런 자료가 발견됐다는 점이 상당히 흥미롭다고 말합니다. '예'를 몹시 중시했던 이들조차 전염병이 돌 때는 차례나 제사를 생략했다는 데서 의미가 크다는 겁니다.

또 우리 선조들이 이런 결단을 내린 배경은, '예'의 본질적 의미 '시성' 때문이라고 김 연구원은 설명합니다. '시성'은 형식을 기계적으로, 무조건으로 수행한다고 해서 예를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때에 맞게 합당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융통성을 발휘해 과감히 차례를 생략하는 게 오히려 예에 합당하다고 판단했다는 거죠.

이번에 공개된 자료들은 모두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하고 있던 7백여 종의 옛 일기들 가운데 일부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예산을 지원하고, 한국국학진흥원이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장기 프로젝트'를 통해 한글화 작업을 마친 자료에서만 찾아낸 건데요. 따라서 나머지 한문 자료들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일기들이 더 있을 거로 보여, '차례 생략'이 일부 지역이나 가문 만의 사례는 아니라고 국학진흥원은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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