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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순간] 젊은 음악가들의 “참을 수 없는 연주 욕망”
입력 2020.09.25 (07:00) 수정 2020.09.25 (11:51) 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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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고 몽환적인 피아노 선율, 자세히 들어보면 같은 소절이 반복됩니다.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의 '짜증'(Vexation)이란 제목의 곡으로, 악보는 놀랍게도 고작 한 페이지입니다. 하지만 사티는 악보에서 '840회 반복'을 지시했습니다. 그러니까 악보 1페이지를 840회 반복해서 연주하란 겁니다. 듣는 사람도, 연주하는 사람도, 제목 그대로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이 음악, 템포에 따라 20시간까지도 걸린다고 합니다.

15시간 30분의 연주..."손가락이 굳어버린 듯한 고통"

영상에 등장하는 연주자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고 있는 34살의 러시아계 독일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트(Igor Levit)입니다. 올해 5월 30일부터 31일까지, 베를린의 한 스튜디오에서 총 15시간 30분에 걸쳐 이 곡을 연주했습니다. 레비트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말 그대로 손가락이 굳어버린 듯한 피곤함을 느꼈다"며 연주 당시의 고통을 토로했습니다. "생전 처음 16시간 동안 아이폰과 떨어져 있었다"는 익살스런 소감도 전했습니다.

악보 840부 자선 경매..2만5천 유로 모금

그는 같은 인터뷰에서 이런 고통을 자처한 이유에 대해 '코로나 시대 예술가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드러내기 위해'라고 설명했습니다. 극한의 지루함, 허기와 갈증을 견디고, 연주를 멈추지 않기 위해 소변도 최대한 참아야 했던 상황은 결국 무대에 설 수 없는 2020년의 현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레비트는 840부 복사한 악보를 한 장씩 던져가며 연주했는데, 연주를 할 수 없는 음악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한 달 뒤 이 악보들을 경매에 부쳐 2만5천 유로를 모금했습니다.


레비트는 최근 소니 클래시컬과 '인카운터(Encounter)'란 제목의 독주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부조니가 편곡한 바흐의 오르간곡들과 브람스, 레거, 펠드만의 작품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소품들을 모았습니다. 만남, 조우를 의미하는 제목 'Encounter'는 '유대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를 표현한 것이라고 음반사 측은 설명했습니다. 더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했지만, 미지의 곡과의 만남뿐 아니라 관객과의 만남을 열망한다는 의미도 함께 담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가격리 뒤에도 무대에 서지 못한 김선욱...12월 다시 귀국

레비트보다 한 살 어린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더 적극적입니다. 그는 최근 네 차례 예정된 독주회를 위해 귀국했다가, 자가격리만 하고 연주는 못 한 채 거주지인 베를린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는 12월 다시 귀국해 공연에 도전합니다. 연기된 독주회뿐 아니라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의 듀오 무대, 그리고 KBS교향악단과의 지휘자 데뷔 무대가 모두 12월에 예정돼 있습니다. 김선욱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꺼번에 몰린 일정들을 모두 소화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김선욱도 최근 새 음반으로 국내 팬들의 공연 갈증을 달랬습니다. 지난해 9월 예술의전당에서 정명훈이 지휘하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협연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실황 녹음입니다. 특유의 단정하고도 단호한 터치, 명징한 음색과 더불어 정명훈이 이끄는 세계 최고(最古) 오케스트라의 고색창연한 음색이 불꽃 튀는 명연을 펼칩니다.

하지만 음반에 고스란히 담긴 객석의 박수와 환호가 음악보다 더 반가울 수도 있겠습니다. 객석을 가득 채운 청중, 그리고 무대를 가득 채운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함께 만들어낸 소리로 달아오른 열기가 생생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공연장에서 오감을 통해 음악을 체험하며 일상을 잊었던 경험이 아득해져 버린 요즘, 가장 반가운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음반 가운데 박수갈채가 담긴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3악장>을 직접 들어보시죠. 이 음원은 KBS가 독일 '악센투스 뮤직'으로부터 음반을 수입해 국내에 출시한 '아울로스 미디어'에서 제공받은 겁니다.


음악가들의 다양한 실험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절박한 외침

일상이 돼버린 코로나 시대, 무대 밖에서 관객과 소통하려는 노력은 주로 온라인을 통해 구현됐습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사진으로 접해서는 그 실물의 아우라를 결코 체험할 수 없듯이, 무대와 객석의 긴밀한 교감과 공감을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대체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도전일지 모릅니다.

연주자들은 사실 그 누구보다 온라인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해소할 길 없는 '연주 욕망'과 관객을 향한 그리움을 우회적으로 달래고 있을 뿐입니다. 15시간 넘는 연주를 생중계하고, 새 음반을 출시하고, 귀국했다 허탕을 치고 돌아가도 다시 오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것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절박한 외침일 겁니다.
  • [예술의 순간] 젊은 음악가들의 “참을 수 없는 연주 욕망”
    • 입력 2020-09-25 07:00:59
    • 수정2020-09-25 11:51:41
    케이야
느리고 몽환적인 피아노 선율, 자세히 들어보면 같은 소절이 반복됩니다.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의 '짜증'(Vexation)이란 제목의 곡으로, 악보는 놀랍게도 고작 한 페이지입니다. 하지만 사티는 악보에서 '840회 반복'을 지시했습니다. 그러니까 악보 1페이지를 840회 반복해서 연주하란 겁니다. 듣는 사람도, 연주하는 사람도, 제목 그대로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이 음악, 템포에 따라 20시간까지도 걸린다고 합니다.

15시간 30분의 연주..."손가락이 굳어버린 듯한 고통"

영상에 등장하는 연주자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고 있는 34살의 러시아계 독일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트(Igor Levit)입니다. 올해 5월 30일부터 31일까지, 베를린의 한 스튜디오에서 총 15시간 30분에 걸쳐 이 곡을 연주했습니다. 레비트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말 그대로 손가락이 굳어버린 듯한 피곤함을 느꼈다"며 연주 당시의 고통을 토로했습니다. "생전 처음 16시간 동안 아이폰과 떨어져 있었다"는 익살스런 소감도 전했습니다.

악보 840부 자선 경매..2만5천 유로 모금

그는 같은 인터뷰에서 이런 고통을 자처한 이유에 대해 '코로나 시대 예술가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드러내기 위해'라고 설명했습니다. 극한의 지루함, 허기와 갈증을 견디고, 연주를 멈추지 않기 위해 소변도 최대한 참아야 했던 상황은 결국 무대에 설 수 없는 2020년의 현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레비트는 840부 복사한 악보를 한 장씩 던져가며 연주했는데, 연주를 할 수 없는 음악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한 달 뒤 이 악보들을 경매에 부쳐 2만5천 유로를 모금했습니다.


레비트는 최근 소니 클래시컬과 '인카운터(Encounter)'란 제목의 독주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부조니가 편곡한 바흐의 오르간곡들과 브람스, 레거, 펠드만의 작품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소품들을 모았습니다. 만남, 조우를 의미하는 제목 'Encounter'는 '유대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를 표현한 것이라고 음반사 측은 설명했습니다. 더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했지만, 미지의 곡과의 만남뿐 아니라 관객과의 만남을 열망한다는 의미도 함께 담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가격리 뒤에도 무대에 서지 못한 김선욱...12월 다시 귀국

레비트보다 한 살 어린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더 적극적입니다. 그는 최근 네 차례 예정된 독주회를 위해 귀국했다가, 자가격리만 하고 연주는 못 한 채 거주지인 베를린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는 12월 다시 귀국해 공연에 도전합니다. 연기된 독주회뿐 아니라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의 듀오 무대, 그리고 KBS교향악단과의 지휘자 데뷔 무대가 모두 12월에 예정돼 있습니다. 김선욱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꺼번에 몰린 일정들을 모두 소화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김선욱도 최근 새 음반으로 국내 팬들의 공연 갈증을 달랬습니다. 지난해 9월 예술의전당에서 정명훈이 지휘하는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협연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실황 녹음입니다. 특유의 단정하고도 단호한 터치, 명징한 음색과 더불어 정명훈이 이끄는 세계 최고(最古) 오케스트라의 고색창연한 음색이 불꽃 튀는 명연을 펼칩니다.

하지만 음반에 고스란히 담긴 객석의 박수와 환호가 음악보다 더 반가울 수도 있겠습니다. 객석을 가득 채운 청중, 그리고 무대를 가득 채운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함께 만들어낸 소리로 달아오른 열기가 생생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공연장에서 오감을 통해 음악을 체험하며 일상을 잊었던 경험이 아득해져 버린 요즘, 가장 반가운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음반 가운데 박수갈채가 담긴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3악장>을 직접 들어보시죠. 이 음원은 KBS가 독일 '악센투스 뮤직'으로부터 음반을 수입해 국내에 출시한 '아울로스 미디어'에서 제공받은 겁니다.


음악가들의 다양한 실험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절박한 외침

일상이 돼버린 코로나 시대, 무대 밖에서 관객과 소통하려는 노력은 주로 온라인을 통해 구현됐습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사진으로 접해서는 그 실물의 아우라를 결코 체험할 수 없듯이, 무대와 객석의 긴밀한 교감과 공감을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대체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도전일지 모릅니다.

연주자들은 사실 그 누구보다 온라인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해소할 길 없는 '연주 욕망'과 관객을 향한 그리움을 우회적으로 달래고 있을 뿐입니다. 15시간 넘는 연주를 생중계하고, 새 음반을 출시하고, 귀국했다 허탕을 치고 돌아가도 다시 오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것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절박한 외침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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