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보고서 자기표절한 국책기관 연구원…‘해고’ 적법할까?

입력 2020.10.0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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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공직자 인사청문회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메뉴 중 하나, 논문 '자기 표절(중복 게재)' 문제입니다. 연구자가 자신이 이전에 출판했던 저작물의 일부 또는 상당 부분을, 자신의 새로운 논문에서 출처 표시 없이 재사용하는 연구윤리 위반 행위를 뜻하는데요.

얼마 전 한 국책 연구기관 소속 연구원이 자기 표절 문제로 해고를 당했습니다.

연구원 A 씨가 보고서를 쓰면서, 8년 전 자신이 썼던 보고서의 내용을 일부만 손봐 상당 부분을 '재탕'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난 것입니다. 해당 보고서는 연구기관 예산으로 발간돼 널리 배포된 뒤였습니다. 이에 해당 연구기관은 A 씨가 연구부정 행위를 저지르고 기관의 위신과 재산에 손해를 입혔다는 이유 등으로, 징계위원회를 열어 A 씨를 해임 처분했습니다.

■ "추후 보완할 생각…의도적 부정행위 아냐"

A 씨는 부당해고라며 반발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은 의도적으로 자기 표절이라는 연구부정 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억울함을 표했습니다. 보고서 내용 중 유독 제4장을 정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이에 제4장과 제5장은 나중에 보완할 생각으로 일단 자신이 예전에 썼던 보고서 내용으로 채워뒀을 뿐이라는 겁니다. 또 이렇게 미완성 상태인 보고서를 바로 발간해 버린 최종 책임은 연구기관에 있다고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지방·중앙노동위원회는 잇따라 A 씨의 구제신청을 기각했고, 결국 A 씨는 중앙노동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하라며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냈습니다.

■ 디테일 살펴보니…임시방편이라기엔 '치밀'

법원은 과연 해고 처분이 적법했는지를 가리기 위해, 고의적으로 연구부정 행위를 한 건 아니라는 A 씨의 주장을 면밀히 살폈습니다. 그 결과 더 구체적인 관련 사실들이 드러났습니다.

우선 A 씨는 8년 전 보고서의 내용을 단순히 그대로 복사해 붙여넣기 하는 식으로 활용한 게 아니었습니다. 마치 이번 연구 과제를 위해 새로 실시한 조사 결과를 분석한 것처럼, 조사 명칭과 조사대상자의 인적 특성 통계 등 일부 문구와 데이터를 바꿔서 기재했던 것입니다. 이에 더해 A 씨는 문제의 보고서 초안을 제출하면서 보고서 제1장과 제3장에 대한 카피킬러(표절검사 서비스) 결과보고서만 첨부하고, 자기 표절 내용이 들어간 제4장에 대해서는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도 확인됐습니다. 결국 A 씨 자신도 문제 소지를 인식하고 이를 들키지 않으려고 했던 게 아닌지 의심이 가는 대목들입니다.

재판부는 추후 보고서를 보완할 계획이었다는 A 씨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고 봤습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A 씨는 연구기관 측에 보고서가 미완성임을 알리고 신속히 보완 조치를 취했어야 할 텐데, 보고서 발간 이후 1년 7개월 뒤 연구부정 행위가 뒤늦게 드러날 때까지 A 씨가 아무런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법원도 "해고할 정도의 사유 있다" 인정

A 씨는 미완성 보고서를 발간한 책임은 연구기관에도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A 씨가 보고서 발간 일정을 지키지 않고 빠듯하게 보고서 완성본을 제출해, 연구기관으로서는 보고서 내용과 발간 절차에 문제가 있는지 검토해 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A 씨가 직접 보고서 인쇄와 발간 과정에 관여했던 점까지 고려하면, 미완성 보고서가 그대로 출간된 주된 귀책 사유는 연구기관이 아닌 A 씨에게 있다고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A 씨가 공익적인 연구 사업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정부출연 연구기관 소속으로, 높은 수준의 공공성과 책임성, 윤리성을 요구받는다는 지위에 있었다는 점도 A 씨에겐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결국 재판부는 A 씨에게 "사회 통념상 참가인(연구기관)과 고용 관계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책임 있는 사유"가 있다고 봐야 한다며, A 씨에 대한 해고는 징계재량권을 남용하거나 그 범위를 넘어섰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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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년 전 보고서 자기표절한 국책기관 연구원…‘해고’ 적법할까?
    • 입력 2020-10-05 07:00:49
    취재K
고위 공직자 인사청문회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메뉴 중 하나, 논문 '자기 표절(중복 게재)' 문제입니다. 연구자가 자신이 이전에 출판했던 저작물의 일부 또는 상당 부분을, 자신의 새로운 논문에서 출처 표시 없이 재사용하는 연구윤리 위반 행위를 뜻하는데요.

얼마 전 한 국책 연구기관 소속 연구원이 자기 표절 문제로 해고를 당했습니다.

연구원 A 씨가 보고서를 쓰면서, 8년 전 자신이 썼던 보고서의 내용을 일부만 손봐 상당 부분을 '재탕'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난 것입니다. 해당 보고서는 연구기관 예산으로 발간돼 널리 배포된 뒤였습니다. 이에 해당 연구기관은 A 씨가 연구부정 행위를 저지르고 기관의 위신과 재산에 손해를 입혔다는 이유 등으로, 징계위원회를 열어 A 씨를 해임 처분했습니다.

■ "추후 보완할 생각…의도적 부정행위 아냐"

A 씨는 부당해고라며 반발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은 의도적으로 자기 표절이라는 연구부정 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억울함을 표했습니다. 보고서 내용 중 유독 제4장을 정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이에 제4장과 제5장은 나중에 보완할 생각으로 일단 자신이 예전에 썼던 보고서 내용으로 채워뒀을 뿐이라는 겁니다. 또 이렇게 미완성 상태인 보고서를 바로 발간해 버린 최종 책임은 연구기관에 있다고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지방·중앙노동위원회는 잇따라 A 씨의 구제신청을 기각했고, 결국 A 씨는 중앙노동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하라며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냈습니다.

■ 디테일 살펴보니…임시방편이라기엔 '치밀'

법원은 과연 해고 처분이 적법했는지를 가리기 위해, 고의적으로 연구부정 행위를 한 건 아니라는 A 씨의 주장을 면밀히 살폈습니다. 그 결과 더 구체적인 관련 사실들이 드러났습니다.

우선 A 씨는 8년 전 보고서의 내용을 단순히 그대로 복사해 붙여넣기 하는 식으로 활용한 게 아니었습니다. 마치 이번 연구 과제를 위해 새로 실시한 조사 결과를 분석한 것처럼, 조사 명칭과 조사대상자의 인적 특성 통계 등 일부 문구와 데이터를 바꿔서 기재했던 것입니다. 이에 더해 A 씨는 문제의 보고서 초안을 제출하면서 보고서 제1장과 제3장에 대한 카피킬러(표절검사 서비스) 결과보고서만 첨부하고, 자기 표절 내용이 들어간 제4장에 대해서는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도 확인됐습니다. 결국 A 씨 자신도 문제 소지를 인식하고 이를 들키지 않으려고 했던 게 아닌지 의심이 가는 대목들입니다.

재판부는 추후 보고서를 보완할 계획이었다는 A 씨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고 봤습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A 씨는 연구기관 측에 보고서가 미완성임을 알리고 신속히 보완 조치를 취했어야 할 텐데, 보고서 발간 이후 1년 7개월 뒤 연구부정 행위가 뒤늦게 드러날 때까지 A 씨가 아무런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 법원도 "해고할 정도의 사유 있다" 인정

A 씨는 미완성 보고서를 발간한 책임은 연구기관에도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A 씨가 보고서 발간 일정을 지키지 않고 빠듯하게 보고서 완성본을 제출해, 연구기관으로서는 보고서 내용과 발간 절차에 문제가 있는지 검토해 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A 씨가 직접 보고서 인쇄와 발간 과정에 관여했던 점까지 고려하면, 미완성 보고서가 그대로 출간된 주된 귀책 사유는 연구기관이 아닌 A 씨에게 있다고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A 씨가 공익적인 연구 사업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정부출연 연구기관 소속으로, 높은 수준의 공공성과 책임성, 윤리성을 요구받는다는 지위에 있었다는 점도 A 씨에겐 불리하게 작용했습니다.

결국 재판부는 A 씨에게 "사회 통념상 참가인(연구기관)과 고용 관계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책임 있는 사유"가 있다고 봐야 한다며, A 씨에 대한 해고는 징계재량권을 남용하거나 그 범위를 넘어섰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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