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소리’ 사이렌은 언제부터 울렸나

입력 2020.10.23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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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이상 <날개>


1936년 발표된 이상의 소설 <날개>의 한 대목입니다. 시각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1930년대 근대도시 경성의 심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나라에 사이렌 소리가 울린 건 언제부터일까요. 소방청이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사이렌을 찾아냈습니다. 충남 서천 지역에서 9개나 발견됐습니다.

충남 서천군에서 발견된 소방 사이렌 탑충남 서천군에서 발견된 소방 사이렌 탑

충남 서천에서 발견된 1925년도 산 소방 사이렌, 현존 최고(最古)

근대 시기 소방 사이렌은 철탑 위에 설치된 탑 형태입니다. 하지만 관리 과정에서 여러 차례 도색이 이뤄지면서 소방청은 사이렌 탑을 발견하고도 설치 시기를 확인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충남 보령시 청소면 의용소방대가 철탑에서 분리된 사이렌을 보존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 도색을 제거하고 명확한 제조 일자와 제조사를 비로소 파악했습니다. 일본 전기 철공 주식회사가 1925년 6월 14일에 제조한 이 사이렌은 우리나라에 설치된 기계식 경보장치의 효시로 평가됩니다.

Induction Moter Siren(유도전동기 사이렌)이라는 제품명이 박혀있는 이 사이렌은 가로 75cm, 높이 35cm 크기로 80kg 중량입니다.

충남 보령시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소방 사이렌.충남 보령시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소방 사이렌.

화재 발생부터 시보(時報), 공습경보, 민방위 훈련까지 다목적 활용

문헌상으로는 이보다 일찍 우리나라에 소방 사이렌이 설치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1924년 3월 남대문 소방서 망루에 설치된 것을 처음으로, 전국 읍면 단위까지 모든 곳으로 설치가 확대됐다고 합니다.

소방차에는 손으로 돌리는 수동식 사이렌이, 마을 높은 곳이나 소방대 청사에는 철제 탑을 만들어 대형 모터사이렌이 설치됐습니다. 조선 시대 타종으로 화재를 알리던 것을 벗어나 근대식 경보 방식이 이때부터 시작된 겁니다.

소방 사이렌은 <날개>에 나오는 것과 같이, 일제 강점기에는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도 사용됐습니다. 구한말 일제강점기, 근대적 개념의 시간이 도입됐지만 시계 보급이 충분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정오에 대포를 발사해 시간을 알렸습니다. 이를 오포(午砲)라 했는데요, 경성과 평양, 대구 등 대도시에는 모터사이렌이 설치되면서 소방 사이렌이 오포를 대신해 시보(時報)로 활용됐습니다.

또, 해방과 한국전쟁,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소방 사이렌은 공습경보와 민방위 훈련 발령경보 등에도 널리 쓰였습니다. 모터사이렌은 1970년 서울 남산타워를 비롯한 서울 시내 4곳에 민방위 경보 단말기가 설치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일부 읍면에서는 1990년대까지도 화재나 수해 등의 재난 발생을 알리거나 의용소방대의 소집 경보 등의 용도로 사용됐다고 합니다.

이번 발굴은 문화재청이 주관한 '근현대문화유산 소방안전분야 목록화 조사연구'의 하나로 진행됐는데요, 소방청은 소방 사이렌은 현존하는 수량이 적어 보존가치가 높고, 유럽권에서는 현재도 사용되고 있어 동서양의 교류를 실증할 수 있는 사료라고 평가했습니다.

조선호 소방청 대변인은 "근대 소방유물은 우리나라 안전의 발달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산임에도 아직 보존관리 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었다"면서 앞으로 소방청은 유물보존과 학술연구 활동을 강화해 나갈 계획이라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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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의 소리’ 사이렌은 언제부터 울렸나
    • 입력 2020-10-23 07:03:29
    취재K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이상 <날개>


1936년 발표된 이상의 소설 <날개>의 한 대목입니다. 시각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1930년대 근대도시 경성의 심상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나라에 사이렌 소리가 울린 건 언제부터일까요. 소방청이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사이렌을 찾아냈습니다. 충남 서천 지역에서 9개나 발견됐습니다.

충남 서천군에서 발견된 소방 사이렌 탑
충남 서천에서 발견된 1925년도 산 소방 사이렌, 현존 최고(最古)

근대 시기 소방 사이렌은 철탑 위에 설치된 탑 형태입니다. 하지만 관리 과정에서 여러 차례 도색이 이뤄지면서 소방청은 사이렌 탑을 발견하고도 설치 시기를 확인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충남 보령시 청소면 의용소방대가 철탑에서 분리된 사이렌을 보존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 도색을 제거하고 명확한 제조 일자와 제조사를 비로소 파악했습니다. 일본 전기 철공 주식회사가 1925년 6월 14일에 제조한 이 사이렌은 우리나라에 설치된 기계식 경보장치의 효시로 평가됩니다.

Induction Moter Siren(유도전동기 사이렌)이라는 제품명이 박혀있는 이 사이렌은 가로 75cm, 높이 35cm 크기로 80kg 중량입니다.

충남 보령시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소방 사이렌.
화재 발생부터 시보(時報), 공습경보, 민방위 훈련까지 다목적 활용

문헌상으로는 이보다 일찍 우리나라에 소방 사이렌이 설치된 것으로 확인됩니다. 1924년 3월 남대문 소방서 망루에 설치된 것을 처음으로, 전국 읍면 단위까지 모든 곳으로 설치가 확대됐다고 합니다.

소방차에는 손으로 돌리는 수동식 사이렌이, 마을 높은 곳이나 소방대 청사에는 철제 탑을 만들어 대형 모터사이렌이 설치됐습니다. 조선 시대 타종으로 화재를 알리던 것을 벗어나 근대식 경보 방식이 이때부터 시작된 겁니다.

소방 사이렌은 <날개>에 나오는 것과 같이, 일제 강점기에는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도 사용됐습니다. 구한말 일제강점기, 근대적 개념의 시간이 도입됐지만 시계 보급이 충분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정오에 대포를 발사해 시간을 알렸습니다. 이를 오포(午砲)라 했는데요, 경성과 평양, 대구 등 대도시에는 모터사이렌이 설치되면서 소방 사이렌이 오포를 대신해 시보(時報)로 활용됐습니다.

또, 해방과 한국전쟁,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 소방 사이렌은 공습경보와 민방위 훈련 발령경보 등에도 널리 쓰였습니다. 모터사이렌은 1970년 서울 남산타워를 비롯한 서울 시내 4곳에 민방위 경보 단말기가 설치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일부 읍면에서는 1990년대까지도 화재나 수해 등의 재난 발생을 알리거나 의용소방대의 소집 경보 등의 용도로 사용됐다고 합니다.

이번 발굴은 문화재청이 주관한 '근현대문화유산 소방안전분야 목록화 조사연구'의 하나로 진행됐는데요, 소방청은 소방 사이렌은 현존하는 수량이 적어 보존가치가 높고, 유럽권에서는 현재도 사용되고 있어 동서양의 교류를 실증할 수 있는 사료라고 평가했습니다.

조선호 소방청 대변인은 "근대 소방유물은 우리나라 안전의 발달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산임에도 아직 보존관리 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었다"면서 앞으로 소방청은 유물보존과 학술연구 활동을 강화해 나갈 계획이라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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