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샤일록’에게 살점 떼어 주고…‘모태펀드’ 성공할까?

입력 2020.10.29 (06:00) 수정 2020.10.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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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없이 창업에 도전하고, 실패를 겪어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사회"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모태펀드 지원을 늘려 벤처기업 육성을 돕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며 한 말입니다.

한번 창업했다가 실패하면 신용불량자가 돼 인생을 송두리째 담보 잡히는 사회가 아니라, 실패를 자산으로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벤처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취지였습니다.

2005년 처음 조성된 모태펀드. 중기부, 문체부, 과기부 등 정부 부처에서 공적자금을 출자해 모태펀드를 결성하고, 여기에 민간 투자자들이 돈을 더 얹어 유망한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어떤 기업에 얼마나 투자할지 등 펀드 운용은 민간운용사에게 맡깁니다.

그런데 한 벤처기업이 대기업 계열의 모태펀드 운용사로부터 10억원의 투자를 받았다가 경영 위기에 처했습니다.



10억 투자하고 "50억 받아오라"...대표이사에 연대책임 요구도

2018년 5월, 한 해외직구 솔루션 개발 밴처기업은 포스코 계열사인 포스코기술투자가 운용하는 '포스코 고급기술인력창업펀드'로부터 10억 원의 투자 제안을 받고 계약을 체결합니다.

보통주 인수 방식의 투자였습니다. 보통주 투자는 투자자가 벤처기업의 지분을 사들여 사실상 주주가 되는 투자 방식인데, 투자원금 보장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투자자가 위험을 감내해야 합니다. 대신 벤처기업이 성장해 지분가치가 올라가면 투자자는 보유한 주식만큼의 이익을 보는 구조입니다.

벤처기업 육성이라는 공익적 목적이 뚜렷한 모태펀드의 특성상 정부에선 일정 비율 이상 보통주로 투자하도록 하는 등 보통주 투자를 장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스코기술투자는 위험을 감내해야 하는 보통주 투자를 하면서도 계약서에는 '특별상환청구권' 조항을 넣었습니다.

'투자금 납일일로부터 2년 이내에 전략적투자자 및 재무적 투자자로부터 50억 원 이상의 투자를 유치하지 못하는 경우, 원금과 이에 대하여 연복리5%를 적용하여 계산한 이자금액을 매수가격으로 (상환)한다.'

계약서를 받은 업체 대표 A씨는 "투자 유치가 회사의 성장지표도 아닌데 너무 무리한 조건"이라고 반문했습니다.

A씨는 '운용사의 윗분들에게 대표이사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형식적인 문구일 뿐'이라며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투자를 철회하겠다'는 투자 담당자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계약서에 서명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2년이 지난 시점, 운용사는 50억 원 투자 유치를 못 했다는 이유로 상환을 요구해왔습니다.

"많은 정부 유니콘 선정 관련 프로그램에 선정되고 있고 사업성을 인정받고 있는데 50억원 투자를 못받았기 때문에 저 개인에게 청구를 하는거죠. 저보고 되사라...그걸 상환하라고 하면 사실상 회사를 망하게 하는거나 똑같은 거예요. 당장에 채권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회사는 지난 5년간 만들어놓은 것들이 다 없어지게 되는거죠." -벤처기업 대표 A씨

상환이 어렵다는 업체 대표에게 투자 담당자는 이번엔 1년 동안 상환을 미뤄주는 조건으로 '추가 약정서(안)'를 보냅니다.

투자 담당자가 해당 업체에 보낸 추가 약정서 양식에는 대표이사의 주식을 담보로 잡고, 운용사를 1순위 담보권자로 설정하는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초 연복리 5%였던 이자는 6%로 인상됐고, 1년 안에 상환하지 않으면 연복리 12%로 이자를 올리겠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1년 뒤 운용사가 대표이사의 주식을 강제로 처분해 원금과 이자를 챙길 수도 있는 겁니다.

이렇게 대표 개인에게까지 연대 책임을 지도록 하는 행위는 현행법과 '모태펀드 출자 기준 규약'에서 금지돼있습니다.

포스코 측은 계약서를 쓸 당시 '모태펀드 출자 기준 규약'에는 '연대책임금지' 조항이 없었다며 법적인 문제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연대책임금지' 조항은 공교롭게 계약서 작성 한 달 뒤 추가됩니다.

그러나, 모태펀드 관리 기관인 한국벤처투자는 규약 개정과 무관하게 '연대보증 요구'는 벤처활성화라는 법 취지에 어긋난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규약 개정 전에도 '연대 보증' 요구를 하지 않도록 운용사에 권고해왔다고 밝혔습니다.

포스코 측은 추가 약정서가 과도하게 작성된 측면은 인정하면서도, 실무진의 판단일뿐 회사의 공식 절차는 아니었다고 강조했습니다.

투자 담당자는 "주주총회나 자금대여 등 회사가 주요 경영 사항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아 '모럴해저드'를 막기 위한 일종의 충격요법이었다"며 " 펀드운용사는 벤처기업 지원도 해야 하지만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해이가 의심되는 기업을 성실히 관리해 투자자들의 자금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도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벤처기업의 '모럴해저드'와 운용사의 '불공정 계약' 사이

포스코기술투자가 가장 우려한 것은 벤처기업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입니다. 세금으로 모은 모태펀드가 문제 있는 회사에 자금을 댈 경우, 국민 신뢰를 잃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벤처기업이 '먹튀'를 하지는 않는지 감시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불공정 계약'에 대한 해명으로는 부족합니다. '50억 원 추가 투자 유치'를 조건 계약서에 넣지 않더라도 벤처기업의 모럴해저드는 견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표준 투자 계약서에는 선의의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벌칙 조항이 충분히 마련돼 있습니다.

또 해당 벤처기업은 중기부 우수 벤처기업으로 선정되는 등 경영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2019년도 매출은 77억 원, 코로나19에도 올 상반기 매출이 26억 원에 달했습니다. 포스코 측도 업체의 성과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반면, 도덕적 해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취재 중 가장 많이 들은 말, "계약서 사인 해놓고 인제 와서"…샤일록은 안토니오의 살점을 도려내도 될까

이번 사건을 취재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업체가 계약서에 사인했다"는 겁니다.

포스코기술투자 관계자는 "이 조건 아니면 저희도 투자를 못 하는데, 한마디로 그 회사가 (투자를) 안 받으시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모태펀드를 관리·감독하는 중기부와 한국벤처투자 관계자가 가장 먼저 꺼낸 말도 "민간의 거래에 관여할 수 없다", "이미 계약서에 서명해놓고 인제 와서 자신들이 불리해지니 부당하다고 주장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비유를 들어보죠.

극 중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평소 앙심을 품고 있던 상인 안토니오에게 돈 3천듀카트를 빌려주고, 갚지 못하면 벌금으로 몸 어디서든 흰 살점 한 파운드를 도려내겠다는 서약을 요구합니다.

둘은 증인을 대동해 증서까지 썼지만, 안토니오가 빌린 돈을 갚을 수 없게 됩니다. 샤일록은 계약대로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살점을 도려내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주장합니다.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계약은 서명했다는 이유로 무조건 지켜져야 하는 걸까요? 포스코 측은 상법상 '계약 자유의 원칙'에 따라 상호 합의하에 맺어진 계약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서명했다고 모두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민법 103조에 따라, '해당 계약이 강행법규에 위반되거나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반할 경우' 무효가 됩니다.

또, 민법 104조에 근거해 '계약 당사자가 궁박하거나 경솔 또는 무경험으로 인해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경우'에도 효력을 잃습니다.

민법 제104조에 규정된 불공정한 법률행위는 객관적으로 급부와 반대급부 사이에 현저한 불균형이 존재하고, 주관적으로 위와 같이 균형을 잃은 거래가 피해당사자의 궁박이나 경솔 또는 무경험을 이용하여 이루어진 경우에 한하여 성립하는 것으로서 약자적 지위에 있는 자의 궁박이나 경설 또는 무경험을 이용한 폭리행위를 규제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대법원 1994. 11. 08. 선고 94다31969 판결)

'50억 추가 투자'는 모든 기업에 이롭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경영권 확보가 중요한 기업에는 오히려 위험합니다. 투자를 받기 위해 주식을 새로 발행하면 대표이사가 지분이 희석되기 때문입니다.

이동구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변호사(법무법인 참)는 " 벤처기업이 투자를 유치하게 되면 자금이 들어오는 반대급부로 대주주의 지분이 희석되는데, 벤처기업은 초기 자본금이 작으므로 자금이 필요하지도 않는데 투자를 받으라는 것은 벤처기업 입장에선 불리한 조건"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벤처라는 것은 이 기업이 제대로 매출이 올라가고 영업이익이 나기까지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는 거거든요. 투자하는 사람도 모험심을 가지고 투자 하는거고, 투자한 다음에 참고 기다려주는거고, 그 벤처기업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도와줘야 되는건데 이런 전혀 회사의 본질, 기본적인 회사가 영위하고 있는 사업과는 별개로 조건을 내걸고, 그 조건을 지키지 못했으니 돈을 돌려줘라, 아니면 당신의 주식을 담보로 맡겨라 그리고 연이율 복리 6%다 하는것은 횡포이자 갑질이죠." -이동구 변호사/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민간 계약에 관여할 수 없다"던 중기부, 보도 직전 "불공정 여부 검토하겠다"

국민의힘 한무경 의원실의 협조를 받아 이번 투자 건처럼 특별상환청구권이 달린 모태펀드의 보통주 투자 계약이 얼마나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한국벤처투자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이뤄진 보통주 투자 2,599건 가운데 최소 25건이 확인됐습니다. 여기엔 이자율 최고 15%까지 요구하는 계약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계약들이 민간 운용사에 오롯이 맡겨져 걸러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중기부와 한국벤처투자는 모태펀드 운용사가 맺은 투자 계약서 등 일체의 자료를 보고받는데, 그 과정에서 계약 세부 내용의 불공정 여부를 검토하지 않고 법규에 규정된 금지행위만 제한하는 소극적 관리만 하는 셈입니다.

예컨대, 원리금 상환을 요구하면서 이면계약서를 썼다면 부당거래 단속 대상이지만, 이면계약서가 아니라 이번 사례처럼 본 계약서에 대놓고 원리금 상환을 요구한 것은 부당거래로 단속되지 않습니다.

취재 초반 "민간 투자에 관여할 수 없다"던 정부는 보도 직전에야 불공정 계약인지 검토해보겠다는 답변을 내놨습니다. 불공정 행위라는 판단이 들면 앞으로 규약에 반영해 걸러질 수 있게 조치하겠다는 겁니다.

다시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과 안토니오 계약의 결말입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안토니오는 '피를 한 방울도 가져가지 않고 오직 살점만 도려내라'는 판사의 지혜로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정부는 어떤 판단을 내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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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샤일록’에게 살점 떼어 주고…‘모태펀드’ 성공할까?
    • 입력 2020-10-29 06:00:05
    • 수정2020-10-29 06:00:12
    취재후·사건후
"두려움 없이 창업에 도전하고, 실패를 겪어도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사회"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모태펀드 지원을 늘려 벤처기업 육성을 돕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며 한 말입니다.

한번 창업했다가 실패하면 신용불량자가 돼 인생을 송두리째 담보 잡히는 사회가 아니라, 실패를 자산으로 다시 도전할 수 있는 벤처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취지였습니다.

2005년 처음 조성된 모태펀드. 중기부, 문체부, 과기부 등 정부 부처에서 공적자금을 출자해 모태펀드를 결성하고, 여기에 민간 투자자들이 돈을 더 얹어 유망한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어떤 기업에 얼마나 투자할지 등 펀드 운용은 민간운용사에게 맡깁니다.

그런데 한 벤처기업이 대기업 계열의 모태펀드 운용사로부터 10억원의 투자를 받았다가 경영 위기에 처했습니다.



10억 투자하고 "50억 받아오라"...대표이사에 연대책임 요구도

2018년 5월, 한 해외직구 솔루션 개발 밴처기업은 포스코 계열사인 포스코기술투자가 운용하는 '포스코 고급기술인력창업펀드'로부터 10억 원의 투자 제안을 받고 계약을 체결합니다.

보통주 인수 방식의 투자였습니다. 보통주 투자는 투자자가 벤처기업의 지분을 사들여 사실상 주주가 되는 투자 방식인데, 투자원금 보장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투자자가 위험을 감내해야 합니다. 대신 벤처기업이 성장해 지분가치가 올라가면 투자자는 보유한 주식만큼의 이익을 보는 구조입니다.

벤처기업 육성이라는 공익적 목적이 뚜렷한 모태펀드의 특성상 정부에선 일정 비율 이상 보통주로 투자하도록 하는 등 보통주 투자를 장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스코기술투자는 위험을 감내해야 하는 보통주 투자를 하면서도 계약서에는 '특별상환청구권' 조항을 넣었습니다.

'투자금 납일일로부터 2년 이내에 전략적투자자 및 재무적 투자자로부터 50억 원 이상의 투자를 유치하지 못하는 경우, 원금과 이에 대하여 연복리5%를 적용하여 계산한 이자금액을 매수가격으로 (상환)한다.'

계약서를 받은 업체 대표 A씨는 "투자 유치가 회사의 성장지표도 아닌데 너무 무리한 조건"이라고 반문했습니다.

A씨는 '운용사의 윗분들에게 대표이사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형식적인 문구일 뿐'이라며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투자를 철회하겠다'는 투자 담당자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계약서에 서명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정확히 2년이 지난 시점, 운용사는 50억 원 투자 유치를 못 했다는 이유로 상환을 요구해왔습니다.

"많은 정부 유니콘 선정 관련 프로그램에 선정되고 있고 사업성을 인정받고 있는데 50억원 투자를 못받았기 때문에 저 개인에게 청구를 하는거죠. 저보고 되사라...그걸 상환하라고 하면 사실상 회사를 망하게 하는거나 똑같은 거예요. 당장에 채권이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회사는 지난 5년간 만들어놓은 것들이 다 없어지게 되는거죠." -벤처기업 대표 A씨

상환이 어렵다는 업체 대표에게 투자 담당자는 이번엔 1년 동안 상환을 미뤄주는 조건으로 '추가 약정서(안)'를 보냅니다.

투자 담당자가 해당 업체에 보낸 추가 약정서 양식에는 대표이사의 주식을 담보로 잡고, 운용사를 1순위 담보권자로 설정하는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초 연복리 5%였던 이자는 6%로 인상됐고, 1년 안에 상환하지 않으면 연복리 12%로 이자를 올리겠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1년 뒤 운용사가 대표이사의 주식을 강제로 처분해 원금과 이자를 챙길 수도 있는 겁니다.

이렇게 대표 개인에게까지 연대 책임을 지도록 하는 행위는 현행법과 '모태펀드 출자 기준 규약'에서 금지돼있습니다.

포스코 측은 계약서를 쓸 당시 '모태펀드 출자 기준 규약'에는 '연대책임금지' 조항이 없었다며 법적인 문제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연대책임금지' 조항은 공교롭게 계약서 작성 한 달 뒤 추가됩니다.

그러나, 모태펀드 관리 기관인 한국벤처투자는 규약 개정과 무관하게 '연대보증 요구'는 벤처활성화라는 법 취지에 어긋난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규약 개정 전에도 '연대 보증' 요구를 하지 않도록 운용사에 권고해왔다고 밝혔습니다.

포스코 측은 추가 약정서가 과도하게 작성된 측면은 인정하면서도, 실무진의 판단일뿐 회사의 공식 절차는 아니었다고 강조했습니다.

투자 담당자는 "주주총회나 자금대여 등 회사가 주요 경영 사항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아 '모럴해저드'를 막기 위한 일종의 충격요법이었다"며 " 펀드운용사는 벤처기업 지원도 해야 하지만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해이가 의심되는 기업을 성실히 관리해 투자자들의 자금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도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벤처기업의 '모럴해저드'와 운용사의 '불공정 계약' 사이

포스코기술투자가 가장 우려한 것은 벤처기업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입니다. 세금으로 모은 모태펀드가 문제 있는 회사에 자금을 댈 경우, 국민 신뢰를 잃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벤처기업이 '먹튀'를 하지는 않는지 감시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불공정 계약'에 대한 해명으로는 부족합니다. '50억 원 추가 투자 유치'를 조건 계약서에 넣지 않더라도 벤처기업의 모럴해저드는 견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표준 투자 계약서에는 선의의 피해를 예방할 수 있는 벌칙 조항이 충분히 마련돼 있습니다.

또 해당 벤처기업은 중기부 우수 벤처기업으로 선정되는 등 경영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2019년도 매출은 77억 원, 코로나19에도 올 상반기 매출이 26억 원에 달했습니다. 포스코 측도 업체의 성과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반면, 도덕적 해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취재 중 가장 많이 들은 말, "계약서 사인 해놓고 인제 와서"…샤일록은 안토니오의 살점을 도려내도 될까

이번 사건을 취재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업체가 계약서에 사인했다"는 겁니다.

포스코기술투자 관계자는 "이 조건 아니면 저희도 투자를 못 하는데, 한마디로 그 회사가 (투자를) 안 받으시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모태펀드를 관리·감독하는 중기부와 한국벤처투자 관계자가 가장 먼저 꺼낸 말도 "민간의 거래에 관여할 수 없다", "이미 계약서에 서명해놓고 인제 와서 자신들이 불리해지니 부당하다고 주장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비유를 들어보죠.

극 중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평소 앙심을 품고 있던 상인 안토니오에게 돈 3천듀카트를 빌려주고, 갚지 못하면 벌금으로 몸 어디서든 흰 살점 한 파운드를 도려내겠다는 서약을 요구합니다.

둘은 증인을 대동해 증서까지 썼지만, 안토니오가 빌린 돈을 갚을 수 없게 됩니다. 샤일록은 계약대로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살점을 도려내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주장합니다.

샤일록과 안토니오의 계약은 서명했다는 이유로 무조건 지켜져야 하는 걸까요? 포스코 측은 상법상 '계약 자유의 원칙'에 따라 상호 합의하에 맺어진 계약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서명했다고 모두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민법 103조에 따라, '해당 계약이 강행법규에 위반되거나 선량한 풍속이나 사회질서에 반할 경우' 무효가 됩니다.

또, 민법 104조에 근거해 '계약 당사자가 궁박하거나 경솔 또는 무경험으로 인해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경우'에도 효력을 잃습니다.

민법 제104조에 규정된 불공정한 법률행위는 객관적으로 급부와 반대급부 사이에 현저한 불균형이 존재하고, 주관적으로 위와 같이 균형을 잃은 거래가 피해당사자의 궁박이나 경솔 또는 무경험을 이용하여 이루어진 경우에 한하여 성립하는 것으로서 약자적 지위에 있는 자의 궁박이나 경설 또는 무경험을 이용한 폭리행위를 규제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대법원 1994. 11. 08. 선고 94다31969 판결)

'50억 추가 투자'는 모든 기업에 이롭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경영권 확보가 중요한 기업에는 오히려 위험합니다. 투자를 받기 위해 주식을 새로 발행하면 대표이사가 지분이 희석되기 때문입니다.

이동구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변호사(법무법인 참)는 " 벤처기업이 투자를 유치하게 되면 자금이 들어오는 반대급부로 대주주의 지분이 희석되는데, 벤처기업은 초기 자본금이 작으므로 자금이 필요하지도 않는데 투자를 받으라는 것은 벤처기업 입장에선 불리한 조건"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벤처라는 것은 이 기업이 제대로 매출이 올라가고 영업이익이 나기까지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모르는 거거든요. 투자하는 사람도 모험심을 가지고 투자 하는거고, 투자한 다음에 참고 기다려주는거고, 그 벤처기업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도와줘야 되는건데 이런 전혀 회사의 본질, 기본적인 회사가 영위하고 있는 사업과는 별개로 조건을 내걸고, 그 조건을 지키지 못했으니 돈을 돌려줘라, 아니면 당신의 주식을 담보로 맡겨라 그리고 연이율 복리 6%다 하는것은 횡포이자 갑질이죠." -이동구 변호사/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민간 계약에 관여할 수 없다"던 중기부, 보도 직전 "불공정 여부 검토하겠다"

국민의힘 한무경 의원실의 협조를 받아 이번 투자 건처럼 특별상환청구권이 달린 모태펀드의 보통주 투자 계약이 얼마나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한국벤처투자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이뤄진 보통주 투자 2,599건 가운데 최소 25건이 확인됐습니다. 여기엔 이자율 최고 15%까지 요구하는 계약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계약들이 민간 운용사에 오롯이 맡겨져 걸러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중기부와 한국벤처투자는 모태펀드 운용사가 맺은 투자 계약서 등 일체의 자료를 보고받는데, 그 과정에서 계약 세부 내용의 불공정 여부를 검토하지 않고 법규에 규정된 금지행위만 제한하는 소극적 관리만 하는 셈입니다.

예컨대, 원리금 상환을 요구하면서 이면계약서를 썼다면 부당거래 단속 대상이지만, 이면계약서가 아니라 이번 사례처럼 본 계약서에 대놓고 원리금 상환을 요구한 것은 부당거래로 단속되지 않습니다.

취재 초반 "민간 투자에 관여할 수 없다"던 정부는 보도 직전에야 불공정 계약인지 검토해보겠다는 답변을 내놨습니다. 불공정 행위라는 판단이 들면 앞으로 규약에 반영해 걸러질 수 있게 조치하겠다는 겁니다.

다시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과 안토니오 계약의 결말입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안토니오는 '피를 한 방울도 가져가지 않고 오직 살점만 도려내라'는 판사의 지혜로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정부는 어떤 판단을 내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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