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발함은 대체…‘차카타파’가 사라진 2113년의 한국어

입력 2020.11.03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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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놀람 - 그것은 의도된 것이었다!

책을 펼쳐 이야기를 읽어갑니다. "다들 별로 안 믿는 모양이지만"으로 시작하는 첫 단락을 지나 두 번째 단락에 접어드는 순간 '어, 이게 뭐지?' 하게 되죠. 맞춤법에 안 맞는 낱말들이 줄줄이 출현합니다. 늘 하던 대로 연필을 꺼내 들고 오타 수정 작업을 하려는데, '어라, 이게 아니네?' 하며 놀라게 됩니다. 얼른 다음 장으로 넘겨 재빠르게 문장들을 훑었죠. '맞춤법 파괴'는 의도된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이런 식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2113년. 우리의 주인공인 역사학과 대학원생은 논문자격시험을 치르기 위한 필수 과정인 이른바 '격리실습'에 참가하게 됩니다. 4주 동안 외부와 연락을 차단한 채 실습실에 머물며 자유 주제로 소논문 한 편을 쓰라!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은 2020년에 한국에서 처음 열린 컬링 리그를 논문 주제로 정합니다. 주인공의 말을 들어볼까요?


■두 번째 놀람 - 읽다 보니 익숙해지더라!

책장을 넘길수록 점점 더 많은 오타들과 만납니다. 눈은 덜컹거리고, 책 읽는 속도는 한없이 더딥니다. 2113년의 한국어를 2020년의 한국어로 번역하며 읽게 되다니! 이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특별한 체험은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익숙함으로 바뀌더군요. 놀랍고도 신비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깨달았죠. 모름지기 언어는 습관이라는 것을.

반대로, 우리의 주인공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한 2020년 대한민국의 현실에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우리의 주인공에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건 야구 중계방송이었죠.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프로스포츠 경기가 줄줄이 중단되고, 다시 경기가 열렸을 때도 관중 없이 텅 빈 경기장에서 펼쳐진 2020년 코로나 시대의 한국. 주인공을 경악하게 한 2020년 야구장의 풍경을 한 번 볼까요?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 봅니다. 2113년의 대한민국에서 사는 우리의 주인공은 2020년 한국의 야구 경기에 혐오감을 금치 못합니다. 선수들의 침 뱉는 행동 때문이죠. 2020년은 '차카타파'의 시대였습니다. 파열음의 시대이자 격음의 시대였죠. 소설이 설정한 2113년의 한국어에는 '차카타파'가 없습니다. 국민 건강을 이유로 침이 많이 튀는 격한 표현들이 모조리 사라진 겁니다. 소설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근대인들에게 2020년은 혐오를 재발견하는 시기였다."

21세기 발성법을 연습하는 2113년의 유명 배우 서한지의 입에서 그야말로 침이 분수처럼 뿜어나오는 순간은 이 소설의 '절정'이라 할 만합니다. 이 대목은 원문 그대로 읽어야 '제맛'이 납니다.


얼마 전에 개최된 2020 서울국제도서전 행사의 하나로 현재 가장 핫한 작가인 김초엽의 강연이 마련됐습니다. 이 자리에서 어느 독자가 코로나 시대의 '띵작'(명작)을 꼽아달라고 하자 김초엽 작가가 이 작품을 소개하더군요. 코로나 팬데믹을 주제로 단편소설 6편을 모은 소설집 《팬데믹, 여섯 개의 세계》(문학과지성사, 2020)에 수록된 배명훈 작가의 단편소설 <차카타파의 열망으로>였습니다.

이 기발하고 창의적인 이야기는 저를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소설 이야기를 들려주었죠. 코로나 이후를 상상하는 이들의 상식은 대체로 과학기술이나 의학의 발전 등등에 머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배명훈 작가의 빛나는 상상력은 그 상식을 여지없이 깨버립니다. 침방울이 튀지 않는 미래의 한국어! 코로나와 같은 질병의 반복적 유행이 만들어낼 미래인들의 새로운 언어습관! 저는 이 소설을 거듭거듭 읽으며 가다르시스를 느겼습니다. 2020년의 세계는 우리의 주인공 말마다나,

와, 정말 미진 문명, 아니 미친 문명이잖아!

그래픽: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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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기발함은 대체…‘차카타파’가 사라진 2113년의 한국어
    • 입력 2020-11-03 09:02:07
    취재K
■첫 번째 놀람 - 그것은 의도된 것이었다!

책을 펼쳐 이야기를 읽어갑니다. "다들 별로 안 믿는 모양이지만"으로 시작하는 첫 단락을 지나 두 번째 단락에 접어드는 순간 '어, 이게 뭐지?' 하게 되죠. 맞춤법에 안 맞는 낱말들이 줄줄이 출현합니다. 늘 하던 대로 연필을 꺼내 들고 오타 수정 작업을 하려는데, '어라, 이게 아니네?' 하며 놀라게 됩니다. 얼른 다음 장으로 넘겨 재빠르게 문장들을 훑었죠. '맞춤법 파괴'는 의도된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이런 식입니다.


때는 바야흐로 2113년. 우리의 주인공인 역사학과 대학원생은 논문자격시험을 치르기 위한 필수 과정인 이른바 '격리실습'에 참가하게 됩니다. 4주 동안 외부와 연락을 차단한 채 실습실에 머물며 자유 주제로 소논문 한 편을 쓰라!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은 2020년에 한국에서 처음 열린 컬링 리그를 논문 주제로 정합니다. 주인공의 말을 들어볼까요?


■두 번째 놀람 - 읽다 보니 익숙해지더라!

책장을 넘길수록 점점 더 많은 오타들과 만납니다. 눈은 덜컹거리고, 책 읽는 속도는 한없이 더딥니다. 2113년의 한국어를 2020년의 한국어로 번역하며 읽게 되다니! 이 생소하기 이를 데 없는 특별한 체험은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익숙함으로 바뀌더군요. 놀랍고도 신비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깨달았죠. 모름지기 언어는 습관이라는 것을.

반대로, 우리의 주인공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한 2020년 대한민국의 현실에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우리의 주인공에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건 야구 중계방송이었죠.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프로스포츠 경기가 줄줄이 중단되고, 다시 경기가 열렸을 때도 관중 없이 텅 빈 경기장에서 펼쳐진 2020년 코로나 시대의 한국. 주인공을 경악하게 한 2020년 야구장의 풍경을 한 번 볼까요?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 봅니다. 2113년의 대한민국에서 사는 우리의 주인공은 2020년 한국의 야구 경기에 혐오감을 금치 못합니다. 선수들의 침 뱉는 행동 때문이죠. 2020년은 '차카타파'의 시대였습니다. 파열음의 시대이자 격음의 시대였죠. 소설이 설정한 2113년의 한국어에는 '차카타파'가 없습니다. 국민 건강을 이유로 침이 많이 튀는 격한 표현들이 모조리 사라진 겁니다. 소설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근대인들에게 2020년은 혐오를 재발견하는 시기였다."

21세기 발성법을 연습하는 2113년의 유명 배우 서한지의 입에서 그야말로 침이 분수처럼 뿜어나오는 순간은 이 소설의 '절정'이라 할 만합니다. 이 대목은 원문 그대로 읽어야 '제맛'이 납니다.


얼마 전에 개최된 2020 서울국제도서전 행사의 하나로 현재 가장 핫한 작가인 김초엽의 강연이 마련됐습니다. 이 자리에서 어느 독자가 코로나 시대의 '띵작'(명작)을 꼽아달라고 하자 김초엽 작가가 이 작품을 소개하더군요. 코로나 팬데믹을 주제로 단편소설 6편을 모은 소설집 《팬데믹, 여섯 개의 세계》(문학과지성사, 2020)에 수록된 배명훈 작가의 단편소설 <차카타파의 열망으로>였습니다.

이 기발하고 창의적인 이야기는 저를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소설 이야기를 들려주었죠. 코로나 이후를 상상하는 이들의 상식은 대체로 과학기술이나 의학의 발전 등등에 머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배명훈 작가의 빛나는 상상력은 그 상식을 여지없이 깨버립니다. 침방울이 튀지 않는 미래의 한국어! 코로나와 같은 질병의 반복적 유행이 만들어낼 미래인들의 새로운 언어습관! 저는 이 소설을 거듭거듭 읽으며 가다르시스를 느겼습니다. 2020년의 세계는 우리의 주인공 말마다나,

와, 정말 미진 문명, 아니 미친 문명이잖아!

그래픽: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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