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붙’으로 만든 서울시의 100억짜리 정류장 계획서

입력 2020.11.05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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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기질 측정기, 태양광 발전기, 비상벨이 갖춰진 100억짜리 버스정류장

여기 3개의 보고서가 있습니다. 어느 버스 정류장에 대한 사업계획서입니다. 정류장이라 해서 간단한 사업이 아닙니다. 경기도와 서울을 오가는 광역버스들이 효율적으로 오갈 수 있도록 환승센터를 갖추고 승객 대기 공간에는 냉·난방 시설들을 갖춘 '스마트 쉘터(Smart Shelter)'도 설치합니다. '스마트 쉘터'에는 냉·난방기뿐 아니라 전광판, 공기질 측정기는 물론 태양광 발전기와 비상벨까지 갖춰져 있습니다.

광역버스환승정류소 상상도광역버스환승정류소 상상도

서울시는 내년 12월까지 당산, 강변, 사당, 서울역, 강남, 홍대, 합정 7곳에 광역환승정류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총 400억 원 규모입니다. 이 중 당산·강변·사당역 사업은 각각 100억 원이 투입됩니다. 이 세 곳은 큰 예산이 드는 사업이다 보니 서울시 투자심사도 거쳐, 지난 5월 '조건부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 사업이 부실·졸속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KBS는 담당 사업 부서인 서울시 도시교통실에서 작성한 문서를 확보해 내용을 분석해 봤습니다. 이 문서는 도시교통실에서 외부인 등이 참여하는 서울시 투자심사위원회에 예산을 보내달라며 보낸 심사의뢰서입니다.

■ '복붙'? 오타까지 같은 세 개의 보고서

가장 궁금한 점, 100억 원의 예산은 어떻게 산출된 걸까요? 아무리 '스마트' 정류장이라지만 한 곳당 100억 원은 적지 않은 예산입니다. 참고로 여의도, 청량리, 구로디지털단지 등 우리에게 익숙한 버스 환승센터는 각각 30억 원이 채 안 되는 사업비가 들었습니다.

먼저 사당역입니다. 토목공사 5억 9천 815만 원, 건축공사 36억 7천 435만 원, 설비공사 10억 9천 376만 원… 꽤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데, 세부 내역이나 산출 근거는 없습니다. 이번엔 강변역과 당산역 사업을 볼까요. 이상한 점이 눈에 띕니다. 앞서 봤던 사당역 보고서와 비교해 숫자 하나까지도 내용이 똑같습니다.


서울시에 따르면 사당역은 일반 도보 위에 환승 센터가 지어집니다. 반면 당산역과 강변역은 각각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 상에 환승 센터를 지어서 보행자가 지하철역으로 올라갈 수 있는 구조입니다. 같은 환승센터라고 해도 구조나 면적이 완전히 달라 토목비와 건축비 등에서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은 사업의 효과를 측정하는 비용편익(b/c) 분석입니다. 역시 세 군데 모두 1.67이라는 숫자가 나와 경제적 타당성이 있다는 게 사업부서의 자체 평가입니다. 하지만 수혜를 보는 주민이 수도권 주민 전체인 2천 6백만여 명으로 가정돼 편익이 과다하게 추산됐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가령 인천 섬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사당역 환승센터를 평생 몇 번이나 이용할까요?

게다가 세 역의 하루 평균 이용객은 사당역은 2만여 명, 당산역 9천여 명, 강변역 3천여 명가량으로 차이가 크게 납니다. 아무리 '광역' 정류장이라고 해도 서울 경기를 간단하게 묶어서 추산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 의뢰서를 함께 검토한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도 "이 사업 예산이 500억 원이 넘었다면 의무적으로 예비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했을 텐데 400억 원으로 조금 못 미쳐 엄밀한 타당성 조사를 받을 필요가 없게 된 것 같다"라며, "편익은 사업 목표에 부합해야 하는데 이 의뢰서의 편익은 그렇지 못하고 왜 이렇게 산정된 건지 산식이 없어 맞다 틀리다 얘기조차 하기 어렵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세 보고서는 심지어 오타까지도 똑같습니다. 이 정도면 사실상 '복붙(복사 뒤 붙여넣기)'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 "검토할 수 있는 수준의 내용이 아냐"

의뢰서가 이렇다 보니 세 곳에 드는 총 3백억의 예산을 결정해야 하는 서울시 투자심사위도 난감했던 것 같습니다.
지난 5월 20일 투심위 회의록을 보면 "죄송한데,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뭐를 할 것인지에 대한 게 3개 의뢰서 모두에 없다", "이 계획서 자체가 검토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의 내용이 아닌 것 같다"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또 "솔직히 예산 낭비인 측면도 없지 않아 있다", "이 시설을 돈을 들여가지고 오히려 더 사고를 유발할 수 있는 문제가 있다"라는 지적까지 나왔습니다.

다만 국비가 이미 내려온 사업이고 필요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공감하는 만큼, 기본설계를 다시 올리고 실시설계 전에 2단계 투자심사를 다시 받으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년 봄쯤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2단계 심사에서 '적정'이 나오면 사업을 추진하고 '부적정'이 나오면 사업을 추진할 수 없습니다. 서울시 사업부서도 KBS 취재진에 "해당 사업은 아직 확정된 게 아니다. 2차 투자심사를 앞두고 있는 만큼 기본 설계부터 다시 추진하겠다"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 투자심사 결과 무시하고 실시설계

그런데 서울시는 '실시설계 전에 투자심사를 다시 받으라'는 투자심사위원회 결과를 무시한 채 기본설계와 함께 실시설계 용역 공고도 함께 낸 것으로 KBS 취재 결과 나타났습니다. 또 예산이 20억대 수준이라 투자심사를 거치지 않고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서울역, 강남, 홍대, 합정 중 일부 구간에 대해서는 시설물 일부에 대한 사업자 공모도 완료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서울시가 이 사업에 대해 이렇게까지 속도를 내는 속내는 무엇일까요. 서울시 관계자는 "해당 사업은 국비 30% 시비 70%가 들어가는 사업인데, 중앙 정부에서 예산을 책정하다 보니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털어놨습니다.

실제 국토교통부에서는 지난 5월 12일에 국고보조금 교부를 신청하라고 서울시에 알려왔고 서울시 투심위는 일주일쯤 뒤인 20일에 열렸으니 의뢰서를 작성하기는 빠듯한 시간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올해 1월부터 시범사업지를 제출하는 등 국토부와 서울시가 협의해 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졸속 추진 논란은 더욱 아쉽습니다.
서울시의회는 오늘(5일) 행정감사에서 이 사업의 졸속·부실 논란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의할 예정입니다. 올해 1월까지만 해도 139억 원이었던 총 사업비가 갑자기 402억 원으로 늘어난 이유, 졸속·부실 투자심사가 있었던 이유 등을 캐물을 것으로 보입니다

추승우 서울시의회 의원 (교통위원회)추승우 서울시의회 의원 (교통위원회)

추승우 서울시의원(교통위)은 "1년 예산이 50조에 달하는 서울시 행정에서 이런 졸속 사업이 나왔다는 건 굉장히 문제가 크다고 생각한다"며 "국비가 내려왔다고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진행할 수는 없다. 아무리 예산이 중요하대도 그에 걸맞은 절차, 투명성, 공정성을 담보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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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붙’으로 만든 서울시의 100억짜리 정류장 계획서
    • 입력 2020-11-05 07:01:31
    취재K
■ 공기질 측정기, 태양광 발전기, 비상벨이 갖춰진 100억짜리 버스정류장

여기 3개의 보고서가 있습니다. 어느 버스 정류장에 대한 사업계획서입니다. 정류장이라 해서 간단한 사업이 아닙니다. 경기도와 서울을 오가는 광역버스들이 효율적으로 오갈 수 있도록 환승센터를 갖추고 승객 대기 공간에는 냉·난방 시설들을 갖춘 '스마트 쉘터(Smart Shelter)'도 설치합니다. '스마트 쉘터'에는 냉·난방기뿐 아니라 전광판, 공기질 측정기는 물론 태양광 발전기와 비상벨까지 갖춰져 있습니다.

광역버스환승정류소 상상도
서울시는 내년 12월까지 당산, 강변, 사당, 서울역, 강남, 홍대, 합정 7곳에 광역환승정류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총 400억 원 규모입니다. 이 중 당산·강변·사당역 사업은 각각 100억 원이 투입됩니다. 이 세 곳은 큰 예산이 드는 사업이다 보니 서울시 투자심사도 거쳐, 지난 5월 '조건부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 사업이 부실·졸속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KBS는 담당 사업 부서인 서울시 도시교통실에서 작성한 문서를 확보해 내용을 분석해 봤습니다. 이 문서는 도시교통실에서 외부인 등이 참여하는 서울시 투자심사위원회에 예산을 보내달라며 보낸 심사의뢰서입니다.

■ '복붙'? 오타까지 같은 세 개의 보고서

가장 궁금한 점, 100억 원의 예산은 어떻게 산출된 걸까요? 아무리 '스마트' 정류장이라지만 한 곳당 100억 원은 적지 않은 예산입니다. 참고로 여의도, 청량리, 구로디지털단지 등 우리에게 익숙한 버스 환승센터는 각각 30억 원이 채 안 되는 사업비가 들었습니다.

먼저 사당역입니다. 토목공사 5억 9천 815만 원, 건축공사 36억 7천 435만 원, 설비공사 10억 9천 376만 원… 꽤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데, 세부 내역이나 산출 근거는 없습니다. 이번엔 강변역과 당산역 사업을 볼까요. 이상한 점이 눈에 띕니다. 앞서 봤던 사당역 보고서와 비교해 숫자 하나까지도 내용이 똑같습니다.


서울시에 따르면 사당역은 일반 도보 위에 환승 센터가 지어집니다. 반면 당산역과 강변역은 각각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 상에 환승 센터를 지어서 보행자가 지하철역으로 올라갈 수 있는 구조입니다. 같은 환승센터라고 해도 구조나 면적이 완전히 달라 토목비와 건축비 등에서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은 사업의 효과를 측정하는 비용편익(b/c) 분석입니다. 역시 세 군데 모두 1.67이라는 숫자가 나와 경제적 타당성이 있다는 게 사업부서의 자체 평가입니다. 하지만 수혜를 보는 주민이 수도권 주민 전체인 2천 6백만여 명으로 가정돼 편익이 과다하게 추산됐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가령 인천 섬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사당역 환승센터를 평생 몇 번이나 이용할까요?

게다가 세 역의 하루 평균 이용객은 사당역은 2만여 명, 당산역 9천여 명, 강변역 3천여 명가량으로 차이가 크게 납니다. 아무리 '광역' 정류장이라고 해도 서울 경기를 간단하게 묶어서 추산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 의뢰서를 함께 검토한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도 "이 사업 예산이 500억 원이 넘었다면 의무적으로 예비타당성 조사를 받아야 했을 텐데 400억 원으로 조금 못 미쳐 엄밀한 타당성 조사를 받을 필요가 없게 된 것 같다"라며, "편익은 사업 목표에 부합해야 하는데 이 의뢰서의 편익은 그렇지 못하고 왜 이렇게 산정된 건지 산식이 없어 맞다 틀리다 얘기조차 하기 어렵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세 보고서는 심지어 오타까지도 똑같습니다. 이 정도면 사실상 '복붙(복사 뒤 붙여넣기)'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 "검토할 수 있는 수준의 내용이 아냐"

의뢰서가 이렇다 보니 세 곳에 드는 총 3백억의 예산을 결정해야 하는 서울시 투자심사위도 난감했던 것 같습니다.
지난 5월 20일 투심위 회의록을 보면 "죄송한데,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뭐를 할 것인지에 대한 게 3개 의뢰서 모두에 없다", "이 계획서 자체가 검토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의 내용이 아닌 것 같다"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또 "솔직히 예산 낭비인 측면도 없지 않아 있다", "이 시설을 돈을 들여가지고 오히려 더 사고를 유발할 수 있는 문제가 있다"라는 지적까지 나왔습니다.

다만 국비가 이미 내려온 사업이고 필요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공감하는 만큼, 기본설계를 다시 올리고 실시설계 전에 2단계 투자심사를 다시 받으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내년 봄쯤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2단계 심사에서 '적정'이 나오면 사업을 추진하고 '부적정'이 나오면 사업을 추진할 수 없습니다. 서울시 사업부서도 KBS 취재진에 "해당 사업은 아직 확정된 게 아니다. 2차 투자심사를 앞두고 있는 만큼 기본 설계부터 다시 추진하겠다"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 투자심사 결과 무시하고 실시설계

그런데 서울시는 '실시설계 전에 투자심사를 다시 받으라'는 투자심사위원회 결과를 무시한 채 기본설계와 함께 실시설계 용역 공고도 함께 낸 것으로 KBS 취재 결과 나타났습니다. 또 예산이 20억대 수준이라 투자심사를 거치지 않고 (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서울역, 강남, 홍대, 합정 중 일부 구간에 대해서는 시설물 일부에 대한 사업자 공모도 완료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서울시가 이 사업에 대해 이렇게까지 속도를 내는 속내는 무엇일까요. 서울시 관계자는 "해당 사업은 국비 30% 시비 70%가 들어가는 사업인데, 중앙 정부에서 예산을 책정하다 보니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털어놨습니다.

실제 국토교통부에서는 지난 5월 12일에 국고보조금 교부를 신청하라고 서울시에 알려왔고 서울시 투심위는 일주일쯤 뒤인 20일에 열렸으니 의뢰서를 작성하기는 빠듯한 시간이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올해 1월부터 시범사업지를 제출하는 등 국토부와 서울시가 협의해 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졸속 추진 논란은 더욱 아쉽습니다.
서울시의회는 오늘(5일) 행정감사에서 이 사업의 졸속·부실 논란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의할 예정입니다. 올해 1월까지만 해도 139억 원이었던 총 사업비가 갑자기 402억 원으로 늘어난 이유, 졸속·부실 투자심사가 있었던 이유 등을 캐물을 것으로 보입니다

추승우 서울시의회 의원 (교통위원회)
추승우 서울시의원(교통위)은 "1년 예산이 50조에 달하는 서울시 행정에서 이런 졸속 사업이 나왔다는 건 굉장히 문제가 크다고 생각한다"며 "국비가 내려왔다고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진행할 수는 없다. 아무리 예산이 중요하대도 그에 걸맞은 절차, 투명성, 공정성을 담보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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