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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지만 않으면 그만’…외교관 성추행 사라질까
입력 2020.12.08 (20:18) 취재K

"대사관 서열 2위의 성비위 처분, 내부 공관원들끼리 의논해 판단"
"조사 시작되고도 3일 동안 피해자가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근무"
"세 차례 성추행에 대한 징계, 감봉 1월에 그쳐"

지난 2017년 말, 주뉴질랜드 한국 대사관에서 일어난 성추행 사건 처리 과정을 두고 제기된 문제들입니다. 지난 7월 현지 언론의 보도로 주목을 받은 이 사건은 정상 간 통화에서까지 언급되며 외교 문제로 비화했고, 외교부는 제 식구를 감싸 솜방망이 처벌을 내렸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약 반 년만인 오늘(8일) 외교부가 재발을 막겠다며 '재외공관 성비위 지침'을 새로 내놨습니다. 외교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재외공관은 그동안 자체 지침 없이 외교부 성희롱·성폭력 예방지침을 따라 왔는데, 공관만의 특성을 반영한 별도 지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습니다.

전체 재외공관 187곳 중 절반 이상은 직원이 다섯 명을 넘지 않는 소규모 공관입니다. 행정 업무 전담 직원의 60%는 현지에서 채용한 외국인이기도 합니다.

2017년 12월 현지 직원이었던 피해자가 당시 공사참사관이었던 A씨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문제를 제기했을 때, 대사관의 초기 대응에도 이런 공관 특성이 반영됐습니다.

당시 공관 전체 구성원 5명 중 A씨를 뺀 4명이 모여 대응 수위를 의논하고 '경고'로 뜻을 모았는데, 대부분 A 씨를 상급자로 둬 처벌을 강하게 주장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지적은 한참 뒤에야 나왔습니다.

■ 사건 처리는 본부가 직접, 공관은 보고와 피해자 보호만


외교부가 내놓은 해결책은 사건 접수 즉시 본부에 보고하고, 그 뒤에는 본부 지휘에 따라 움직이라는 겁니다. 아예 재외공관 자체 판단으로 사건을 처리하지 말라는 내용을 보도 참고자료에도 못박았습니다. 그 전에는 성비위 사건을 접수하더라도 공관 고충상담원이 본부에 어떻게 보고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지침이 없었는데, 이제는 접수 즉시 보고하도록 의무화했습니다.

대신 재외공관은 신속한 사건 보고와 피해자 보호에 역점을 두게 됩니다. 외교부 당국자는 "그간 공관장 판단으로 처리했던 부분이 2차 피해를 부르는 등 문제가 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본부가 일률적 기준으로 처리하는 게 바르다고 보여 대응을 강화하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성비위 해당 여부를 판단하는 성희롱·성폭력 고충심의위원회는 외교부 밖 외부인사의 참여를 3명에서 5명으로 늘립니다. 전에는 외교부 내·외부 인사가 각각 3명씩 참여했지만, 변호사와 양성평등 전문가 등 전문 위원의 수를 2명 더 늘리기로 했습니다.

징계와 별도로, 가해자에게는 인사·성과 등급에서 그해 최하위 등급을 주는 내용도 포함됐습니다. 과거엔 징계를 받았을 때에만 성과에서 최하위 등급을 줬지만, 이제는 처벌이 더 강화된 겁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인사 등급은 공직 경력 관리의 기본"이라면서, "최하위 등급을 세 차례 받으면 공직자 자격 박탈 가능성이 있고, 고위직은 임명 자체가 안 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사건 접수 즉시 재택 근무 등을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는 2차 가해 예방 조치도 도입됩니다. 당시 뉴질랜드 대사관 피해자는 조사가 시작된 뒤에도 3일 동안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일해야 했는데, 적어도 이런 일은 막을 수 있게 된겁니다.

■ 관건은 '처벌 강화'가 아니라 '처벌을 제대로 하는 것'

외교부가 내놓은 대책, 이번에는 성추행을 제대로 막을 수 있을까요?

외교부의 발표를 살펴본 최란 한국성폭력상담소 사무국장은 "아직 전체 지침이 다 공개된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평가하긴 어렵다"면서도, 마음에 걸리는 지점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보도자료가 강조하듯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 횟수와 시간을 4배로 '대폭 확대'한다고 해서 성폭력이 근절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최 국장은 "지금도 공공 기관 등의 성희롱 예방 교육 이수율은 90%를 넘는다"며, "조직 내부에 왜곡된 성 문화가 존재하는 한 예방 교육은 실효성을 갖기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강력한 처벌보다는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는 게 먼저"라고 강조했습니다. 피해자가 성비위 신고를 내더라도 여러 이유로 사건이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끝까지 제대로 된 징계를 내려야 성비위 재발을 막을 수 있다는 겁니다. 최 국장은 "성비위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가 제대로 징계와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구성원들이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외교부가 발표한 이번 지침은 내년 1월 1일부터 적용됩니다. 외교부는 이번 지침 개선을 계기로 '성비위 무관용 원칙'을 더욱 강조해 나가겠다고 밝혔는데요. 재외공관의 갖가지 성비위 소식이 잇따랐던 올해와 달리, 내년부터는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습니다.
  • ‘걸리지만 않으면 그만’…외교관 성추행 사라질까
    • 입력 2020-12-08 20:18:12
    취재K

"대사관 서열 2위의 성비위 처분, 내부 공관원들끼리 의논해 판단"
"조사 시작되고도 3일 동안 피해자가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근무"
"세 차례 성추행에 대한 징계, 감봉 1월에 그쳐"

지난 2017년 말, 주뉴질랜드 한국 대사관에서 일어난 성추행 사건 처리 과정을 두고 제기된 문제들입니다. 지난 7월 현지 언론의 보도로 주목을 받은 이 사건은 정상 간 통화에서까지 언급되며 외교 문제로 비화했고, 외교부는 제 식구를 감싸 솜방망이 처벌을 내렸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약 반 년만인 오늘(8일) 외교부가 재발을 막겠다며 '재외공관 성비위 지침'을 새로 내놨습니다. 외교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재외공관은 그동안 자체 지침 없이 외교부 성희롱·성폭력 예방지침을 따라 왔는데, 공관만의 특성을 반영한 별도 지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습니다.

전체 재외공관 187곳 중 절반 이상은 직원이 다섯 명을 넘지 않는 소규모 공관입니다. 행정 업무 전담 직원의 60%는 현지에서 채용한 외국인이기도 합니다.

2017년 12월 현지 직원이었던 피해자가 당시 공사참사관이었던 A씨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문제를 제기했을 때, 대사관의 초기 대응에도 이런 공관 특성이 반영됐습니다.

당시 공관 전체 구성원 5명 중 A씨를 뺀 4명이 모여 대응 수위를 의논하고 '경고'로 뜻을 모았는데, 대부분 A 씨를 상급자로 둬 처벌을 강하게 주장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지적은 한참 뒤에야 나왔습니다.

■ 사건 처리는 본부가 직접, 공관은 보고와 피해자 보호만


외교부가 내놓은 해결책은 사건 접수 즉시 본부에 보고하고, 그 뒤에는 본부 지휘에 따라 움직이라는 겁니다. 아예 재외공관 자체 판단으로 사건을 처리하지 말라는 내용을 보도 참고자료에도 못박았습니다. 그 전에는 성비위 사건을 접수하더라도 공관 고충상담원이 본부에 어떻게 보고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지침이 없었는데, 이제는 접수 즉시 보고하도록 의무화했습니다.

대신 재외공관은 신속한 사건 보고와 피해자 보호에 역점을 두게 됩니다. 외교부 당국자는 "그간 공관장 판단으로 처리했던 부분이 2차 피해를 부르는 등 문제가 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본부가 일률적 기준으로 처리하는 게 바르다고 보여 대응을 강화하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성비위 해당 여부를 판단하는 성희롱·성폭력 고충심의위원회는 외교부 밖 외부인사의 참여를 3명에서 5명으로 늘립니다. 전에는 외교부 내·외부 인사가 각각 3명씩 참여했지만, 변호사와 양성평등 전문가 등 전문 위원의 수를 2명 더 늘리기로 했습니다.

징계와 별도로, 가해자에게는 인사·성과 등급에서 그해 최하위 등급을 주는 내용도 포함됐습니다. 과거엔 징계를 받았을 때에만 성과에서 최하위 등급을 줬지만, 이제는 처벌이 더 강화된 겁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인사 등급은 공직 경력 관리의 기본"이라면서, "최하위 등급을 세 차례 받으면 공직자 자격 박탈 가능성이 있고, 고위직은 임명 자체가 안 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사건 접수 즉시 재택 근무 등을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는 2차 가해 예방 조치도 도입됩니다. 당시 뉴질랜드 대사관 피해자는 조사가 시작된 뒤에도 3일 동안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일해야 했는데, 적어도 이런 일은 막을 수 있게 된겁니다.

■ 관건은 '처벌 강화'가 아니라 '처벌을 제대로 하는 것'

외교부가 내놓은 대책, 이번에는 성추행을 제대로 막을 수 있을까요?

외교부의 발표를 살펴본 최란 한국성폭력상담소 사무국장은 "아직 전체 지침이 다 공개된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평가하긴 어렵다"면서도, 마음에 걸리는 지점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보도자료가 강조하듯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 횟수와 시간을 4배로 '대폭 확대'한다고 해서 성폭력이 근절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최 국장은 "지금도 공공 기관 등의 성희롱 예방 교육 이수율은 90%를 넘는다"며, "조직 내부에 왜곡된 성 문화가 존재하는 한 예방 교육은 실효성을 갖기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강력한 처벌보다는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는 게 먼저"라고 강조했습니다. 피해자가 성비위 신고를 내더라도 여러 이유로 사건이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끝까지 제대로 된 징계를 내려야 성비위 재발을 막을 수 있다는 겁니다. 최 국장은 "성비위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가 제대로 징계와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구성원들이 아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외교부가 발표한 이번 지침은 내년 1월 1일부터 적용됩니다. 외교부는 이번 지침 개선을 계기로 '성비위 무관용 원칙'을 더욱 강조해 나가겠다고 밝혔는데요. 재외공관의 갖가지 성비위 소식이 잇따랐던 올해와 달리, 내년부터는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