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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팬덤정치 위험 수위…민주주의 성숙에 걸림돌”
입력 2021.01.05 (14:01) 수정 2021.01.05 (14:03) 취재K
홍세화 장발장은행장·‘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저자

홍세화 장발장은행장·‘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저자

"한국에서는 공산주의자도 빨갱이지만 사회주의자도 빨갱이고, 진보주의자도 빨갱이며, 미국에 비판적이어도 또한 빨갱이라오." 1982년 6월 프랑스 외무부 망명 담당 사무국에서 홍세화 망명 신청자는 심사관 앞에 앉아 이렇게 고국을 설명해야 했다.

1979년 무역회사 근무로 유럽에 머물던 그는 한국 공안 당국의 '남민전 사건' 발표와 함께 귀국하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망명 자격을 묻는 심사관의 질문에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자는 전단지를 몇 차례 뿌렸다"는 게 그가 답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정도는 당시 프랑스에선 경범죄에도 해당하지 않는 일이었다. 고국의 동료들은 그 일로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쫓기는 와중이었다.

돌아갈 수 없음이 분명한데도 이를 증명하기는 어려운 이상한 나라의 이방인. 그는 심사 당시 자신의 상황을 "모순의 늪 속에 깊이 빠져들어갔다"고 회고한다.

흑과 백의 논리가 서로 등진 채 공존하지 못하는 상황을 모순이라 부른다면, 그는 모순의 역사를 누구보다 낱낱이 겪어온 한국인 중 한 사람이다.

파리 교민들 사이에서 "빨갱이"라는 수군거림을 듣는 한편 누군가로부터는 "안기부 끄나풀"이라는 모함을 감내하며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이같은 망명 생활 중 써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1995)는 한국 사회에 문화적 충격을 안기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각자의 개성에는 차이가 존재하며 이를 억압이나 배제에 이용하면 안 된다는 '똘레랑스'의 개념은, 가까스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뤄냈으나 실질적 민주주의로는 나아가지 못하던 우리 사회에 없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책 출간 26년이 돼가지만 한국 민주주의에 흑과 백 이외의 자리는 여전히 비좁아보인다. 어느 때 못지 않게 한국 정치에 대한 근심이 깊은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과의 문답을 전한다.


■"설득은 어렵고 선동은 쉬운 사회"

문: 20년 간의 망명 생활 끝에 귀국하신 지도 21년이 흘렀습니다. 귀국 후의 고국은 선생님께 어떻게 다가왔는지요.

답: 국내에서 계속 살아왔다면 변화를 감지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20년의 공백이 있던 사람이 한국 사회를 다시 만났을 때 그 차이가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면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물신주의 가치관이 심해졌다는 점입니다.

초등학생들의 입에서 어떻게 '휴거'(주택공사 아파트 거주자를 비하하는 말)나 '200충'(월 200만 원 소득자를 비하하는 말) 같은 말들이 나올까요. 부모의 인식이 반영되는 것이죠.

우리가 돈의 주인이어야 하는데 돈의 노예가 돼버린 형편이 아닌가 싶어요. '똘레랑스'가 있으려면 성찰하는 이성이 필요하고, 이는 인문학적 토대와 직결되는데, 책 출간 당시 저의 바람과 지금의 한국 현실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문: 최근 현 정부를 비판하는 취지의 칼럼과 인터뷰가 나간 이후 악성 댓글에 시달리고 계십니다. 어느 정도인지요.

답: 악성 댓글에는 이미 익숙하긴 합니다만…. 가장 자주 듣는 욕은 '파리에 가서 택시운전이나 하라'는 말입니다. 고대 로마 정치가인 키케로의 유명한 반어가 있지 않습니까.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 그런데 그 반어법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요.

19세기 프랑스의 보수 철학자 조제프 드 메스트르는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의 정부를 가진다'고 했지요. 우리들의 수준은 어떤 걸까 생각해보면 많이 안타깝습니다.

문: 우리가 이성과 논리에 의한 판단이라고 여겼던 것도 알고 보면 감정이 앞선 결과라는 점이 과학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정치적 팬덤 또한 이와 연관지어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답: 인간은 여전히 전쟁을 벌이는 존재입니다. 사람을, 그것도 짧은 시간에 많이 죽이는 방법을 연구하고 심지어 실행에 옮기는 존재죠.

동시에 인간은 외로운 존재입니다. 누군가에 기대고자 하는 마음이 지나치면, 한 사람의 정치인이나 유명인에 의탁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전체주의에 빠질 위험이 커집니다.

팬덤이란 것은 결국 좋고 싫고의 문제인데, 그것을 택하는 순간 잃는 게 있습니다. 진실과 허위를 구분하지 못하게 돼요. 좋아하는 것이 곧 옳은 것이 돼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 가짜뉴스가 만연하는 배경입니다.

게다가 팬덤이란 것은 집단에서 나오기 때문에 더욱 감정적으로 치닫게 됩니다. '내 편이 이렇게 많아', 이렇게 되니까 이성적으로 자기 생각을 수정하기 대단히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갑니다.


문: 이와 관련해 참여정부 시절로 거슬러올라가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 이후 노사모 회원들 스스로 '노사모를 해체하고 정부를 비판적으로 지지하자'는 기류가, 그 때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 대통령 서거 이후 형성된 시민들의 집단 기억이 지금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답: 그러다보니 건강하게 비판할 수 있는 여지는 더욱 사라졌습니다. 팬덤화가 더 심해졌죠.

예를 들면 당시 노 대통령 부인을 권양숙 '씨'라고 불렀다고 해서 노사모 회원들이 아우성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언론에서 문재인 대통령 부인을 김정숙 '씨'라고 했다가 지지자들이 난리가 났어요.

조국 전 장관 사태에서도 좋고 싫음에 의해서 진실과 허위의 구분은 사라지고, 자녀 스펙이나 입학 문제에서도 옳고 그름이 허물어진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집단적 울분이 물론 작용했지만 '정신의 신자유주의화'가 결합돼있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신자유주의란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 욕망을 충족시키라는 것이지요. 목표만 달성하면 되고 승리만 이루면 되니, 결과를 위해 모든 과정이 정당화됩니다.

문: 한 시민이 유력 정치인을 지지하는 일은 개인의 자유이겠습니다만 그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 이에 편승하거나 이를 이용한다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답: 그게 참 안타까운 일이죠. 결과적으로 그 지지를 받는 사람도 이익 될 게 없습니다. 진영 논리에 갇히게끔 만들고 결국 민주주의가 성숙하는 데 걸림돌이 됩니다. 옳고 그름을 정교하게 구분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회, 어떤 부문에서 진전이 가능하겠습니까.

문: 지난해 출간하신 책 「결:거칢에 대하여」에서 "설득은 어렵고 선동은 쉬운 사회"라고 지적하신 부분이 그래서 더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답: 설득이라는 건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죠. 하지만 자신을 의심하지 않으니 그 방향을 안 바꿉니다.

선동은 기존의 생각을 그 방향의 극단으로 몰아갑니다. 매우 쉽고도 위험한 것이죠. 섬세해지지 않고 거칠게 증폭됩니다. 결국 우리 사회는 다른 생각을 공유하지 못하는 사회가 돼버렸습니다.



■"학교에서 '생각하는 공부'해야…교육은 경쟁 아닌 성숙 위한 것"

문: 한국 사회가 다른 사회보다 더 생각을 공유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뭘까요.

답: 굉장히 긴 시간 동안 학교에서 '생각하는 공부'를 안 한 것이 저는 치명적이라고 봅니다. 생각을 하게 되면 시간에 따라 그것이 변화하는 걸 경험하게 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내 짝꿍은 다르게 생각한다'는 걸 경험하고, 이런 경험이 축적되면서 자신의 생각이 바뀔 수 있다, 또는 내 생각이 틀린 것일 수 있다는 인식이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는 공부를 전혀 안 했어요. 그러고는 '정답'을 입력했죠. 정답 외에는 생각하지 않으니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거나 설득하는 일을 포기한 채 살아왔습니다.

문: 바칼로레아(프랑스 대학입학 자격시험) 문제를 보면 한국과 프랑스 두 사회의 아득한 차이가 느껴집니다.

답: 2019년 바칼로레아 인문계 철학 시험 문제 중 하나는 '시간을 벗어나는 것은 가능한가'였습니다. 사회경제 계열에선 '노동은 인간을 분리하는가'라는 논제가 나왔죠. 학생들이 이런 문제를 4시간 동안 7장 정도로 써냅니다. 유럽 학생들이 대부분 비슷한데, 한국 학생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공부하면서 자기소개서 하나 쓰기도 어려워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질문하고 회의(懷疑)하는 공부를 한 적이 없는데 성인이 돼서 어떻게 자기 생각을 수정하거나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문: 끊임 없이 질문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볼 때 정답 맞히기 입시교육과 함께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재단하는 미디어의 책임도 큰 것 같습니다.

답: 문화적 헤게모니의 문제가 만만치 않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초동 집회에 "내가 조국이다"를 외치는 사람들이 수십만 명 모였는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촉구 집회에 모여 "내가 김용균이다"를 외치는 이들은 300명에 불과했어요.

이 차이가 뭘까요. 계급적 차이일까요? 서초동에 모인 분들도 계급적으로는 김용균에 가까운 분들이 많을 거예요. 미디어 역할이 결정적입니다. 조국 전 장관의 가족들이 검찰에 어떻게 당하는지 시시각각 상세하게 전해지지만 가난을 대물림받는 사람들을 그렇게 대변해주지 않습니다. 특히 요즘 같은 (뉴미디어) 시대에 공공성을 가진 미디어들은 굉장히 심각하게 이 문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 불평등과 양극화가 극심해지다보니 불안이 만연하고, 사람들은 자신보다 낮은 곳을 바라보지 않으려 합니다. 끝으로 평소 강조하시는 교육의 서열화 문제를 이와 관련해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답: 인간은 비교하는 존재이기도 하지요. 비교에는 '경쟁비교'가 있고 '성숙비교'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경쟁비교는 남과 비교해서 '내가 더 공부 잘 해', '내가 더 재산이 많아' 이런 비교를 하는 것이죠. 성숙비교는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성숙했는지를 비교합니다.

한국의 교육은 철저하게 경쟁비교에 매몰되게 만듭니다. 그러다보니 의사 집단이 '전교 1등' 운운하며 인문학적 소양은 텅 비어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이 생각의 신자유주의입니다.

그런 인식이 확대되면 나의 집단을 타 집단과 비교하기에 이릅니다. '나는 한민족이야', '나는 GDP 3만불 국민이야' 이러면서 이주노동자를 차별하고 난민을 반대합니다. 성숙비교를 하는 사람은 내 소속집단에 관심이 없고 약자를 포용합니다. 나부터 스스로 회의하며 독립적인 주체가 돼야 합니다.

관련 프로그램 : <시사기획 창> 신년기획 '당신의 민주주의는 진짜입니까?'
https://www.youtube.com/watch?v=wiSe4jqRHG8
  • 홍세화 “팬덤정치 위험 수위…민주주의 성숙에 걸림돌”
    • 입력 2021-01-05 14:01:00
    • 수정2021-01-05 14:03:36
    취재K

홍세화 장발장은행장·‘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저자

"한국에서는 공산주의자도 빨갱이지만 사회주의자도 빨갱이고, 진보주의자도 빨갱이며, 미국에 비판적이어도 또한 빨갱이라오." 1982년 6월 프랑스 외무부 망명 담당 사무국에서 홍세화 망명 신청자는 심사관 앞에 앉아 이렇게 고국을 설명해야 했다.

1979년 무역회사 근무로 유럽에 머물던 그는 한국 공안 당국의 '남민전 사건' 발표와 함께 귀국하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망명 자격을 묻는 심사관의 질문에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자는 전단지를 몇 차례 뿌렸다"는 게 그가 답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정도는 당시 프랑스에선 경범죄에도 해당하지 않는 일이었다. 고국의 동료들은 그 일로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쫓기는 와중이었다.

돌아갈 수 없음이 분명한데도 이를 증명하기는 어려운 이상한 나라의 이방인. 그는 심사 당시 자신의 상황을 "모순의 늪 속에 깊이 빠져들어갔다"고 회고한다.

흑과 백의 논리가 서로 등진 채 공존하지 못하는 상황을 모순이라 부른다면, 그는 모순의 역사를 누구보다 낱낱이 겪어온 한국인 중 한 사람이다.

파리 교민들 사이에서 "빨갱이"라는 수군거림을 듣는 한편 누군가로부터는 "안기부 끄나풀"이라는 모함을 감내하며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이같은 망명 생활 중 써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1995)는 한국 사회에 문화적 충격을 안기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각자의 개성에는 차이가 존재하며 이를 억압이나 배제에 이용하면 안 된다는 '똘레랑스'의 개념은, 가까스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뤄냈으나 실질적 민주주의로는 나아가지 못하던 우리 사회에 없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책 출간 26년이 돼가지만 한국 민주주의에 흑과 백 이외의 자리는 여전히 비좁아보인다. 어느 때 못지 않게 한국 정치에 대한 근심이 깊은 홍세화 장발장 은행장과의 문답을 전한다.


■"설득은 어렵고 선동은 쉬운 사회"

문: 20년 간의 망명 생활 끝에 귀국하신 지도 21년이 흘렀습니다. 귀국 후의 고국은 선생님께 어떻게 다가왔는지요.

답: 국내에서 계속 살아왔다면 변화를 감지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20년의 공백이 있던 사람이 한국 사회를 다시 만났을 때 그 차이가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면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물신주의 가치관이 심해졌다는 점입니다.

초등학생들의 입에서 어떻게 '휴거'(주택공사 아파트 거주자를 비하하는 말)나 '200충'(월 200만 원 소득자를 비하하는 말) 같은 말들이 나올까요. 부모의 인식이 반영되는 것이죠.

우리가 돈의 주인이어야 하는데 돈의 노예가 돼버린 형편이 아닌가 싶어요. '똘레랑스'가 있으려면 성찰하는 이성이 필요하고, 이는 인문학적 토대와 직결되는데, 책 출간 당시 저의 바람과 지금의 한국 현실에는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문: 최근 현 정부를 비판하는 취지의 칼럼과 인터뷰가 나간 이후 악성 댓글에 시달리고 계십니다. 어느 정도인지요.

답: 악성 댓글에는 이미 익숙하긴 합니다만…. 가장 자주 듣는 욕은 '파리에 가서 택시운전이나 하라'는 말입니다. 고대 로마 정치가인 키케로의 유명한 반어가 있지 않습니까. '논리로 안 되면 인신을 공격하라'. 그런데 그 반어법이 지금 한국 사회에서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요.

19세기 프랑스의 보수 철학자 조제프 드 메스트르는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의 정부를 가진다'고 했지요. 우리들의 수준은 어떤 걸까 생각해보면 많이 안타깝습니다.

문: 우리가 이성과 논리에 의한 판단이라고 여겼던 것도 알고 보면 감정이 앞선 결과라는 점이 과학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정치적 팬덤 또한 이와 연관지어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답: 인간은 여전히 전쟁을 벌이는 존재입니다. 사람을, 그것도 짧은 시간에 많이 죽이는 방법을 연구하고 심지어 실행에 옮기는 존재죠.

동시에 인간은 외로운 존재입니다. 누군가에 기대고자 하는 마음이 지나치면, 한 사람의 정치인이나 유명인에 의탁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전체주의에 빠질 위험이 커집니다.

팬덤이란 것은 결국 좋고 싫고의 문제인데, 그것을 택하는 순간 잃는 게 있습니다. 진실과 허위를 구분하지 못하게 돼요. 좋아하는 것이 곧 옳은 것이 돼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 가짜뉴스가 만연하는 배경입니다.

게다가 팬덤이란 것은 집단에서 나오기 때문에 더욱 감정적으로 치닫게 됩니다. '내 편이 이렇게 많아', 이렇게 되니까 이성적으로 자기 생각을 수정하기 대단히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갑니다.


문: 이와 관련해 참여정부 시절로 거슬러올라가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취임 이후 노사모 회원들 스스로 '노사모를 해체하고 정부를 비판적으로 지지하자'는 기류가, 그 때는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 대통령 서거 이후 형성된 시민들의 집단 기억이 지금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답: 그러다보니 건강하게 비판할 수 있는 여지는 더욱 사라졌습니다. 팬덤화가 더 심해졌죠.

예를 들면 당시 노 대통령 부인을 권양숙 '씨'라고 불렀다고 해서 노사모 회원들이 아우성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언론에서 문재인 대통령 부인을 김정숙 '씨'라고 했다가 지지자들이 난리가 났어요.

조국 전 장관 사태에서도 좋고 싫음에 의해서 진실과 허위의 구분은 사라지고, 자녀 스펙이나 입학 문제에서도 옳고 그름이 허물어진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집단적 울분이 물론 작용했지만 '정신의 신자유주의화'가 결합돼있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신자유주의란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좋다, 욕망을 충족시키라는 것이지요. 목표만 달성하면 되고 승리만 이루면 되니, 결과를 위해 모든 과정이 정당화됩니다.

문: 한 시민이 유력 정치인을 지지하는 일은 개인의 자유이겠습니다만 그 지지를 받는 정치인이 이에 편승하거나 이를 이용한다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답: 그게 참 안타까운 일이죠. 결과적으로 그 지지를 받는 사람도 이익 될 게 없습니다. 진영 논리에 갇히게끔 만들고 결국 민주주의가 성숙하는 데 걸림돌이 됩니다. 옳고 그름을 정교하게 구분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회, 어떤 부문에서 진전이 가능하겠습니까.

문: 지난해 출간하신 책 「결:거칢에 대하여」에서 "설득은 어렵고 선동은 쉬운 사회"라고 지적하신 부분이 그래서 더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답: 설득이라는 건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죠. 하지만 자신을 의심하지 않으니 그 방향을 안 바꿉니다.

선동은 기존의 생각을 그 방향의 극단으로 몰아갑니다. 매우 쉽고도 위험한 것이죠. 섬세해지지 않고 거칠게 증폭됩니다. 결국 우리 사회는 다른 생각을 공유하지 못하는 사회가 돼버렸습니다.



■"학교에서 '생각하는 공부'해야…교육은 경쟁 아닌 성숙 위한 것"

문: 한국 사회가 다른 사회보다 더 생각을 공유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뭘까요.

답: 굉장히 긴 시간 동안 학교에서 '생각하는 공부'를 안 한 것이 저는 치명적이라고 봅니다. 생각을 하게 되면 시간에 따라 그것이 변화하는 걸 경험하게 됩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내 짝꿍은 다르게 생각한다'는 걸 경험하고, 이런 경험이 축적되면서 자신의 생각이 바뀔 수 있다, 또는 내 생각이 틀린 것일 수 있다는 인식이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는 공부를 전혀 안 했어요. 그러고는 '정답'을 입력했죠. 정답 외에는 생각하지 않으니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거나 설득하는 일을 포기한 채 살아왔습니다.

문: 바칼로레아(프랑스 대학입학 자격시험) 문제를 보면 한국과 프랑스 두 사회의 아득한 차이가 느껴집니다.

답: 2019년 바칼로레아 인문계 철학 시험 문제 중 하나는 '시간을 벗어나는 것은 가능한가'였습니다. 사회경제 계열에선 '노동은 인간을 분리하는가'라는 논제가 나왔죠. 학생들이 이런 문제를 4시간 동안 7장 정도로 써냅니다. 유럽 학생들이 대부분 비슷한데, 한국 학생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공부하면서 자기소개서 하나 쓰기도 어려워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질문하고 회의(懷疑)하는 공부를 한 적이 없는데 성인이 돼서 어떻게 자기 생각을 수정하거나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문: 끊임 없이 질문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볼 때 정답 맞히기 입시교육과 함께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재단하는 미디어의 책임도 큰 것 같습니다.

답: 문화적 헤게모니의 문제가 만만치 않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초동 집회에 "내가 조국이다"를 외치는 사람들이 수십만 명 모였는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촉구 집회에 모여 "내가 김용균이다"를 외치는 이들은 300명에 불과했어요.

이 차이가 뭘까요. 계급적 차이일까요? 서초동에 모인 분들도 계급적으로는 김용균에 가까운 분들이 많을 거예요. 미디어 역할이 결정적입니다. 조국 전 장관의 가족들이 검찰에 어떻게 당하는지 시시각각 상세하게 전해지지만 가난을 대물림받는 사람들을 그렇게 대변해주지 않습니다. 특히 요즘 같은 (뉴미디어) 시대에 공공성을 가진 미디어들은 굉장히 심각하게 이 문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 불평등과 양극화가 극심해지다보니 불안이 만연하고, 사람들은 자신보다 낮은 곳을 바라보지 않으려 합니다. 끝으로 평소 강조하시는 교육의 서열화 문제를 이와 관련해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답: 인간은 비교하는 존재이기도 하지요. 비교에는 '경쟁비교'가 있고 '성숙비교'가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경쟁비교는 남과 비교해서 '내가 더 공부 잘 해', '내가 더 재산이 많아' 이런 비교를 하는 것이죠. 성숙비교는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성숙했는지를 비교합니다.

한국의 교육은 철저하게 경쟁비교에 매몰되게 만듭니다. 그러다보니 의사 집단이 '전교 1등' 운운하며 인문학적 소양은 텅 비어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이 생각의 신자유주의입니다.

그런 인식이 확대되면 나의 집단을 타 집단과 비교하기에 이릅니다. '나는 한민족이야', '나는 GDP 3만불 국민이야' 이러면서 이주노동자를 차별하고 난민을 반대합니다. 성숙비교를 하는 사람은 내 소속집단에 관심이 없고 약자를 포용합니다. 나부터 스스로 회의하며 독립적인 주체가 돼야 합니다.

관련 프로그램 : <시사기획 창> 신년기획 '당신의 민주주의는 진짜입니까?'
https://www.youtube.com/watch?v=wiSe4jqRHG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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