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60만 교포 울린 아이들…日 조선학교의 ‘트라이’

입력 2021.01.0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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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5일 오후, 일본 고교 럭비의 성지로 불리는 하나조노(花園) 경기장.

제100회 일본 전국고교럭비대회 준결승전이 열렸습니다. 오사카(大阪)를 대표한 조선고급학교와 가나가와(神奈川)현 도인가쿠엔(桐蔭学園)의 맞대결이었습니다. 전반 종료 점수는 12대 12.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후반 들어 오사카 조고(조선고급학교) 선수들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단 한 점도 보태지 못했습니다. 반면 상대 팀은 그라운드 끝단에 공을 꽂아 넣는 ‘트라이’(Try)를 연거푸 낚았습니다.

최종 점수는 12대 40. 황소 같던 아이들은 한동안 운동장을 떠나지 못한 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경기는 TV와 온라인 생중계 됐습니다. 울먹이는 아이들 모습에 60만 재일교포들도 함께 울었습니다.

1월 5일 일본 전국고교럭비대회 준결승에서 패한 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오사카 조고 선수들 〈일본 닛칸스포츠〉1월 5일 일본 전국고교럭비대회 준결승에서 패한 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오사카 조고 선수들 〈일본 닛칸스포츠〉

39명이 만든 기적

오사카 조선학교 전교생은 210명입니다. 이 중 여학생이 절반쯤 됩니다. 학생 수가 적으니 체력 조건이 뛰어난 학생을 골라 럭비팀을 꾸리기 쉽지 않죠. 입학 후 처음으로 공을 만진 ‘초보 선수’도 많습니다. 이번 대회에는 고작 39명이 출전했습니다.

준결승 상대인 도인가쿠엔은 너무 벅찬 상대였습니다. 이전 대회 우승팀입니다. 럭비부원 102명 가운데 정예를 추려 대회 2연패를 노렸습니다. 선수단 평균 체중만 따져도 오사카 조고에 비해 9kg을 웃돕니다. 쉽게 넘을 수 없는 벽이란 걸 오사카 조고 선수들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럭비 경기가 대단히 인기 있는 일본에는 전국 고교 럭비부가 8백여 개나 됩니다. 또 다른 4강 팀인 교토세이쇼(京都成章)고교의 럭비부원은 123명, 준결승에서 패한 히가시후쿠오카(東福岡)고교는 135명입니다. 오사카 조고에게는 ‘다윗’과 ‘골리앗’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지난해 11월 1일 지역 예선을 통과해 전국고교럭비대회 출전을 결정한 뒤 기뻐하는 오사카 조고 럭비단 선수들 〈마이니치신문〉지난해 11월 1일 지역 예선을 통과해 전국고교럭비대회 출전을 결정한 뒤 기뻐하는 오사카 조고 럭비단 선수들 〈마이니치신문〉

대회 참가 구호 ‘사명’

오사카 조고가 ‘4강’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89회(2009년), 90회(2010년) 대회에 이어 10년 만에 세 번째 ‘4강 재진입’입니다. 공교롭게도 준결승전 상대는 세 차례 모두 도인가쿠엔이었고, 이번에도 그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런 오사카 조고 선수들에게 이번 대회가 유독 특별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주장 김용철 등 3학년생 21명이 졸업하면 남은 선수는 18명(2학년 7명·1학년 11명)이 됩니다. 경기에 15명이 뛰어야 하니 부상자라도 생기면 대회 출전조차 장담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선수들이 이번 대회에 ‘사명’(使命)이란 구호를 내건 것도 이 때문입니다. ‘닛폰이치’(日本一), 즉 일본 전국을 반드시 제패해야 한다는 목표였습니다. 권정수 럭비팀 감독은 KBS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는 4월에 신입생이 입학해도 신체가 미성숙하기 때문에 규정에 따라 6월까지 대회 출전을 못 합니다. 그러니 춘계 대회는 18명으로 싸워야 합니다. 당연히 고정 포지션도 없습니다. (웃음) 아이들에게 이번 대회 우승이 더욱 간절했던 이유입니다. 신입생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 더 많은 아이들이 럭비를 하고 싶도록 만들어야 했거든요.”

오사카 조고의 이금수 선수가 1월 5일 전국고교럭비대회 준결승전에서 트라이에 성공하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오사카 조고의 이금수 선수가 1월 5일 전국고교럭비대회 준결승전에서 트라이에 성공하고 있다. 〈마이니치신문〉

출전에만 20여 년 걸려

오사카 조고에 럭비부가 생긴 건 1972년입니다. 이 학교 졸업생이자 신임 교사였던 김현익(71) 씨가 창단했습니다. 김 씨는 도쿄 조선대 럭비부 1기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오사카 조고는 한동안 전국 대회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일본 학교교육법상 조선학교는 ‘각종 학교’로 취급돼 공식전에 초청받지 못했던 겁니다. 이후 ‘문호 개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창단 21년 만인 1994년부터 출전이 가능해졌습니다. 대회가 열리는 하나조노 경기장은 학교에서 걸어서 불과 15분 거리입니다.

경기장에 입성한 뒤로도 시련은 이어졌습니다. 이번엔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를 고교 무상화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습니다. 권정수 감독의 말을 더 들어봤습니다.

“많은 학부모가 경제적 이유로 자녀의 조선학교 진학을 포기합니다. 아예 유치원 때부터 일본 학교로 보내는 거죠. 아이들 뿐만 아닙니다. 일본 전국의 조선학교 수입은 점차 줄어 교직원들도 퇴직할 수밖에 없는 거죠. 전쟁으로 따지면 성을 봉쇄하고 식량 공급을 끊은 셈입니다.”

2016년 3월 일본 도쿄 도심에서 재일 조선학교 보조금 중단 등을 요구하는 시위대(오른쪽)가 행진하고 있고,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왼쪽)이 피켓을 들어 항의하고 있다. 〈연합뉴스〉2016년 3월 일본 도쿄 도심에서 재일 조선학교 보조금 중단 등을 요구하는 시위대(오른쪽)가 행진하고 있고,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왼쪽)이 피켓을 들어 항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선학교, 무상화 적용 예외

일본의 고교 무상화 정책은 옛 민주당 정권 때인 2010년 4월 도입됐습니다.

처음에는 조선학교 학생들도 심사 대상이었지만, 2010년 11월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을 계기로 간 나오토(菅直人) 당시 총리가 지시해 조선학교는 적용이 보류됐습니다. 이어 제2차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 출범 후인 2013년 2월 지원 대상에서 조선학교가 제외되는 법령이 확정됐습니다.

이에 반발해 조선학교 측은 오사카를 비롯해 도쿄(東京), 나고야(名古屋), 히로시마(廣島), 후쿠오카(福岡) 등 일본 전역 5곳에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들은 “외교와 정치 문제를 빌미로 학생들의 배울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명백한 위헌이자, 재일 조선인 사회에 대한 차별”이라고 강조했지만, 일본 재판부는 ‘국가 재량권의 범위’라는 판단을 잇달아 내놓고 있습니다.

일본 후쿠오카 고등재판소가 지난해 10월 30일 고교 무상화 대상에서 조선학교를 제외한 것이 위법하지 않다는 판결을 내리자 원고 측이 ‘부당판결’ 문구가 적힌 펼침막을 들어 보이고 있다. 〈교도통신〉일본 후쿠오카 고등재판소가 지난해 10월 30일 고교 무상화 대상에서 조선학교를 제외한 것이 위법하지 않다는 판결을 내리자 원고 측이 ‘부당판결’ 문구가 적힌 펼침막을 들어 보이고 있다. 〈교도통신〉


日 정부의 ‘편 가르기’

‘조선학교’는 조국의 말과 정신을 잊지 않고 이어가기 위해 애쓰는, 몇 남지 않은 일본 내 학교들입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조선학교만 따로 떼어내는 식으로 편을 갈랐습니다.

럭비에는 ‘노 사이드(No Side) 정신’이란 게 있습니다. 치열하고 폭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경기가 끝나면 심판은 반드시 ‘노 사이드’를 선언합니다. 그 순간부터는 ‘네 편, 내 편’ 구분이 없어집니다. 함께 교류하고 더불어 즐기는 것입니다.

차별과 억압 속에서 기적 같은 성적을 이어가고 있는 오사카 조고 럭비부 선수들. 다음 대회에선 반드시 ‘사명’을 이뤄 진정한 ‘노사이드’ 정신을 보여주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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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60만 교포 울린 아이들…日 조선학교의 ‘트라이’
    • 입력 2021-01-09 07:00:56
    특파원 리포트
1월 5일 오후, 일본 고교 럭비의 성지로 불리는 하나조노(花園) 경기장.

제100회 일본 전국고교럭비대회 준결승전이 열렸습니다. 오사카(大阪)를 대표한 조선고급학교와 가나가와(神奈川)현 도인가쿠엔(桐蔭学園)의 맞대결이었습니다. 전반 종료 점수는 12대 12.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후반 들어 오사카 조고(조선고급학교) 선수들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단 한 점도 보태지 못했습니다. 반면 상대 팀은 그라운드 끝단에 공을 꽂아 넣는 ‘트라이’(Try)를 연거푸 낚았습니다.

최종 점수는 12대 40. 황소 같던 아이들은 한동안 운동장을 떠나지 못한 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경기는 TV와 온라인 생중계 됐습니다. 울먹이는 아이들 모습에 60만 재일교포들도 함께 울었습니다.

1월 5일 일본 전국고교럭비대회 준결승에서 패한 뒤 눈물을 흘리고 있는 오사카 조고 선수들 〈일본 닛칸스포츠〉
39명이 만든 기적

오사카 조선학교 전교생은 210명입니다. 이 중 여학생이 절반쯤 됩니다. 학생 수가 적으니 체력 조건이 뛰어난 학생을 골라 럭비팀을 꾸리기 쉽지 않죠. 입학 후 처음으로 공을 만진 ‘초보 선수’도 많습니다. 이번 대회에는 고작 39명이 출전했습니다.

준결승 상대인 도인가쿠엔은 너무 벅찬 상대였습니다. 이전 대회 우승팀입니다. 럭비부원 102명 가운데 정예를 추려 대회 2연패를 노렸습니다. 선수단 평균 체중만 따져도 오사카 조고에 비해 9kg을 웃돕니다. 쉽게 넘을 수 없는 벽이란 걸 오사카 조고 선수들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럭비 경기가 대단히 인기 있는 일본에는 전국 고교 럭비부가 8백여 개나 됩니다. 또 다른 4강 팀인 교토세이쇼(京都成章)고교의 럭비부원은 123명, 준결승에서 패한 히가시후쿠오카(東福岡)고교는 135명입니다. 오사카 조고에게는 ‘다윗’과 ‘골리앗’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지난해 11월 1일 지역 예선을 통과해 전국고교럭비대회 출전을 결정한 뒤 기뻐하는 오사카 조고 럭비단 선수들 〈마이니치신문〉
대회 참가 구호 ‘사명’

오사카 조고가 ‘4강’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89회(2009년), 90회(2010년) 대회에 이어 10년 만에 세 번째 ‘4강 재진입’입니다. 공교롭게도 준결승전 상대는 세 차례 모두 도인가쿠엔이었고, 이번에도 그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런 오사카 조고 선수들에게 이번 대회가 유독 특별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주장 김용철 등 3학년생 21명이 졸업하면 남은 선수는 18명(2학년 7명·1학년 11명)이 됩니다. 경기에 15명이 뛰어야 하니 부상자라도 생기면 대회 출전조차 장담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선수들이 이번 대회에 ‘사명’(使命)이란 구호를 내건 것도 이 때문입니다. ‘닛폰이치’(日本一), 즉 일본 전국을 반드시 제패해야 한다는 목표였습니다. 권정수 럭비팀 감독은 KBS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는 4월에 신입생이 입학해도 신체가 미성숙하기 때문에 규정에 따라 6월까지 대회 출전을 못 합니다. 그러니 춘계 대회는 18명으로 싸워야 합니다. 당연히 고정 포지션도 없습니다. (웃음) 아이들에게 이번 대회 우승이 더욱 간절했던 이유입니다. 신입생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 더 많은 아이들이 럭비를 하고 싶도록 만들어야 했거든요.”

오사카 조고의 이금수 선수가 1월 5일 전국고교럭비대회 준결승전에서 트라이에 성공하고 있다. 〈마이니치신문〉
출전에만 20여 년 걸려

오사카 조고에 럭비부가 생긴 건 1972년입니다. 이 학교 졸업생이자 신임 교사였던 김현익(71) 씨가 창단했습니다. 김 씨는 도쿄 조선대 럭비부 1기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오사카 조고는 한동안 전국 대회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일본 학교교육법상 조선학교는 ‘각종 학교’로 취급돼 공식전에 초청받지 못했던 겁니다. 이후 ‘문호 개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창단 21년 만인 1994년부터 출전이 가능해졌습니다. 대회가 열리는 하나조노 경기장은 학교에서 걸어서 불과 15분 거리입니다.

경기장에 입성한 뒤로도 시련은 이어졌습니다. 이번엔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를 고교 무상화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습니다. 권정수 감독의 말을 더 들어봤습니다.

“많은 학부모가 경제적 이유로 자녀의 조선학교 진학을 포기합니다. 아예 유치원 때부터 일본 학교로 보내는 거죠. 아이들 뿐만 아닙니다. 일본 전국의 조선학교 수입은 점차 줄어 교직원들도 퇴직할 수밖에 없는 거죠. 전쟁으로 따지면 성을 봉쇄하고 식량 공급을 끊은 셈입니다.”

2016년 3월 일본 도쿄 도심에서 재일 조선학교 보조금 중단 등을 요구하는 시위대(오른쪽)가 행진하고 있고,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왼쪽)이 피켓을 들어 항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선학교, 무상화 적용 예외

일본의 고교 무상화 정책은 옛 민주당 정권 때인 2010년 4월 도입됐습니다.

처음에는 조선학교 학생들도 심사 대상이었지만, 2010년 11월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을 계기로 간 나오토(菅直人) 당시 총리가 지시해 조선학교는 적용이 보류됐습니다. 이어 제2차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 출범 후인 2013년 2월 지원 대상에서 조선학교가 제외되는 법령이 확정됐습니다.

이에 반발해 조선학교 측은 오사카를 비롯해 도쿄(東京), 나고야(名古屋), 히로시마(廣島), 후쿠오카(福岡) 등 일본 전역 5곳에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들은 “외교와 정치 문제를 빌미로 학생들의 배울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명백한 위헌이자, 재일 조선인 사회에 대한 차별”이라고 강조했지만, 일본 재판부는 ‘국가 재량권의 범위’라는 판단을 잇달아 내놓고 있습니다.

일본 후쿠오카 고등재판소가 지난해 10월 30일 고교 무상화 대상에서 조선학교를 제외한 것이 위법하지 않다는 판결을 내리자 원고 측이 ‘부당판결’ 문구가 적힌 펼침막을 들어 보이고 있다. 〈교도통신〉

日 정부의 ‘편 가르기’

‘조선학교’는 조국의 말과 정신을 잊지 않고 이어가기 위해 애쓰는, 몇 남지 않은 일본 내 학교들입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조선학교만 따로 떼어내는 식으로 편을 갈랐습니다.

럭비에는 ‘노 사이드(No Side) 정신’이란 게 있습니다. 치열하고 폭력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경기가 끝나면 심판은 반드시 ‘노 사이드’를 선언합니다. 그 순간부터는 ‘네 편, 내 편’ 구분이 없어집니다. 함께 교류하고 더불어 즐기는 것입니다.

차별과 억압 속에서 기적 같은 성적을 이어가고 있는 오사카 조고 럭비부 선수들. 다음 대회에선 반드시 ‘사명’을 이뤄 진정한 ‘노사이드’ 정신을 보여주길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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