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사라진 ‘내 집’…허술한 부정청약 대책

입력 2021.01.1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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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해운대구 마린시티의 한 아파트를 장만한 A씨. 은행 대출을 더 해 마련한 돈 10억 원을 주고 산 집은 바다가 보이는 1군 건설사 브랜드 아파트입니다. 물론 5억 원이던 80㎡짜리 아파트 분양가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이마저 하나 남은 매물이었죠.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곳에 내 집을 마련했다는 기쁨도 잠시. ‘웃돈’(프리미엄)이 붙어 배보다 배꼽이 컸던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몰렸습니다.

원분양자의 부정청약이 발견됐다며 시행사가 공급 계약 취소를 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분양가 정도만 돌려줄 테니 집을 빼라는 이 요구를 받은 건 A 씨뿐만이 아닙니다. 이 아파트 250여 가구 중 41가구가 같은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른바 '영끌'한 젊은 신혼부부는 유산이라는 아픔까지 겪어야 했고, 평생 일하고 은퇴한 뒤 받은 노후 자금도 순식간에 날아갈 위기입니다.

국토교통부와 구청이 나서 이들 세대 중 대부분이 원 분양자의 부정청약 사실을 모른 채 집을 산 이른바 ‘선의의 피해자’라고 중재에 나섰지만, 시행사는 계약 철회 방침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연관기사] 해운대 고급 아파트 ‘시끌’...“나갈” vs “못 나가”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087685

■시행사 입맛에 따라 일방적 취소 가능한 구조

시행사는 공급 계약을 철회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은 거절했다. 시행사는 공급 계약을 철회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은 거절했다.
시행사는 일방적인 공급계약 철회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왜냐면 법이 그렇거든요.

‘공급질서 교란 금지’를 규정하는 주택법 제65조는 국토교통부 장관 또는 사업주체(시행사)가 부정청약 등이 발견할 때 공급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정부부처인 국토부와 사기업인 시행사의 법적 권한이 같은 겁니다. 문제의 시행사는 직원 5명 규모인데 대부분의 시행사의 규모가 이와 비슷합니다. 사실상 대표 1인 체제인 구조인데, 대표의 뜻이 법이 됩니다.

이는 국내 부동산 시장의 특수성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따지는 건설사는 그저 시공만 맡을 뿐 대부분 법적 관계는 영세한 규모의 시행사가 지게 됩니다. 외국의 경우 이 시행사가 막대한 자금력을 갖고 체계적인 시스템도 구축한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부동산 재벌로 불리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운영한 트럼프 그룹입니다. 그야말로 남의 나라 이야기죠.

전문가들도 이 왜곡된 시장에 우려를 표시합니다. 서성수 영산대학교 부동산학과장은 "시행사에 계약을 취소하고 재분양으로 분양가를 높여 차액을 일부 가져갈 길이 열려 있으니 이런 문제는 언제든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입주민들 역시 "만약 아파트가 미분양이 됐고, 거래가격이 분양가보다 낮은 수준이라면 시행사가 이런 식으로 나오겠나"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야 시작한 입법 논의… 통과 여부 불투명


더 큰 문제는 내 집이 내 집이 아니게 만들 수 있는 권한은 시행사에 있는데 견제나 구제 장치는 없다는 겁니다. 부정청약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공익과 시행사의 권한은 또 보장해야 한다는 사익에 몰두한 나머지 정작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당연한 부작용을 법이 놓친 까닭입니다.

정부는 부정청약을 근절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지난해 국토부가 21개 단지만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 190여 건의 부정청약 의심사례가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매수자가 부정청약 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부정청약 공시제도'는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며 도입을 철회했습니다.

부정청약 사실을 주택 구매자가 사전에 인지하기도 어려운 구조인 셈입니다. 뒤늦게 국토부가 계약 철회를 하지 말아 달라고 시행사에 요청했지만 시행사가 이를 따르지 않으면 그만인 상황입니다.

논란이 불거지고 나서야 국회에서는 부정청약으로 인한 선의의 피해자를 막겠다는 취지의 주택법 개정안이 발의됐습니다. 입법이란 게 늘 그렇듯 언제 통과할지, 설사 통과해도 소급적용이 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그 사이 얼마나 유사한 사례가 더 나올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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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식간에 사라진 ‘내 집’…허술한 부정청약 대책
    • 입력 2021-01-13 15:42:32
    취재K

부산 해운대구 마린시티의 한 아파트를 장만한 A씨. 은행 대출을 더 해 마련한 돈 10억 원을 주고 산 집은 바다가 보이는 1군 건설사 브랜드 아파트입니다. 물론 5억 원이던 80㎡짜리 아파트 분양가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이마저 하나 남은 매물이었죠.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곳에 내 집을 마련했다는 기쁨도 잠시. ‘웃돈’(프리미엄)이 붙어 배보다 배꼽이 컸던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몰렸습니다.

원분양자의 부정청약이 발견됐다며 시행사가 공급 계약 취소를 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분양가 정도만 돌려줄 테니 집을 빼라는 이 요구를 받은 건 A 씨뿐만이 아닙니다. 이 아파트 250여 가구 중 41가구가 같은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른바 '영끌'한 젊은 신혼부부는 유산이라는 아픔까지 겪어야 했고, 평생 일하고 은퇴한 뒤 받은 노후 자금도 순식간에 날아갈 위기입니다.

국토교통부와 구청이 나서 이들 세대 중 대부분이 원 분양자의 부정청약 사실을 모른 채 집을 산 이른바 ‘선의의 피해자’라고 중재에 나섰지만, 시행사는 계약 철회 방침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연관기사] 해운대 고급 아파트 ‘시끌’...“나갈” vs “못 나가”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087685

■시행사 입맛에 따라 일방적 취소 가능한 구조

시행사는 공급 계약을 철회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은 거절했다. 시행사는 일방적인 공급계약 철회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왜냐면 법이 그렇거든요.

‘공급질서 교란 금지’를 규정하는 주택법 제65조는 국토교통부 장관 또는 사업주체(시행사)가 부정청약 등이 발견할 때 공급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정부부처인 국토부와 사기업인 시행사의 법적 권한이 같은 겁니다. 문제의 시행사는 직원 5명 규모인데 대부분의 시행사의 규모가 이와 비슷합니다. 사실상 대표 1인 체제인 구조인데, 대표의 뜻이 법이 됩니다.

이는 국내 부동산 시장의 특수성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따지는 건설사는 그저 시공만 맡을 뿐 대부분 법적 관계는 영세한 규모의 시행사가 지게 됩니다. 외국의 경우 이 시행사가 막대한 자금력을 갖고 체계적인 시스템도 구축한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부동산 재벌로 불리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운영한 트럼프 그룹입니다. 그야말로 남의 나라 이야기죠.

전문가들도 이 왜곡된 시장에 우려를 표시합니다. 서성수 영산대학교 부동산학과장은 "시행사에 계약을 취소하고 재분양으로 분양가를 높여 차액을 일부 가져갈 길이 열려 있으니 이런 문제는 언제든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입주민들 역시 "만약 아파트가 미분양이 됐고, 거래가격이 분양가보다 낮은 수준이라면 시행사가 이런 식으로 나오겠나"라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야 시작한 입법 논의… 통과 여부 불투명


더 큰 문제는 내 집이 내 집이 아니게 만들 수 있는 권한은 시행사에 있는데 견제나 구제 장치는 없다는 겁니다. 부정청약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공익과 시행사의 권한은 또 보장해야 한다는 사익에 몰두한 나머지 정작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당연한 부작용을 법이 놓친 까닭입니다.

정부는 부정청약을 근절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지난해 국토부가 21개 단지만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 190여 건의 부정청약 의심사례가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매수자가 부정청약 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부정청약 공시제도'는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며 도입을 철회했습니다.

부정청약 사실을 주택 구매자가 사전에 인지하기도 어려운 구조인 셈입니다. 뒤늦게 국토부가 계약 철회를 하지 말아 달라고 시행사에 요청했지만 시행사가 이를 따르지 않으면 그만인 상황입니다.

논란이 불거지고 나서야 국회에서는 부정청약으로 인한 선의의 피해자를 막겠다는 취지의 주택법 개정안이 발의됐습니다. 입법이란 게 늘 그렇듯 언제 통과할지, 설사 통과해도 소급적용이 될지는 장담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그 사이 얼마나 유사한 사례가 더 나올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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