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의 취미생활 ‘차명’으로 숨겨야 했던 까닭은?
입력 2021.02.09 (07:00)
수정 2021.02.0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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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진 KCC 회장(자료: KCC 홈페이지)
정몽진 KCC 회장은 재벌가에서도 소문난 오디오광입니다. 지금은 생산이 중단된 오래전에 만들어진 진공관 앰프, 스피커 등을 모으는데 국내에서는 수집가들 사이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미국 웨스턴일렉트릭(Western Electric) 제품을 가장 많이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코로나19 이전까지 독일 뮌헨에서 매년 열리던 최고급 오디오쇼에 자신의 오디오를 가져가 직접 시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 회장, 이 취미 때문에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됐습니다. 2007년 오디오를 제작하는 회사를 아예 설립하면서 지인의 명의를 빌려 차명으로 회사를 보유했던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오디오 애호가들이 선망하던 '성공한 덕후'에서 공정거래법 위반 사범으로 전락할 처지입니다.
■'성공한 덕후'에서 위장계열사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는 어제(8일) KCC가 ㈜실바톤어쿠스틱스 등 10개 계열사를 대기업집단 신고에서 누락한 혐의로 최종 책임자인 정몽진 회장을 검찰에 고발했다고 밝혔습니다. 흔히 말하는 '위장계열사' 혐의입니다.
공정위는 매년 5월 공시대상기업집단(5조 원 이상)과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10조 원 이상)을 지정해 발표합니다. 삼성, 현대차, SK, LG 이런 식으로 그룹별 자산 순위가 매겨지는 것도 이 자료에 근거한 것입니다.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 상호출자, 순환출자 제한 등 지배구조 규제가 적용되고, 공시대상기업집단은 주요사항 공시의무, 총수일가 일감 몰아주기(사익편취) 규제 등이 부과됩니다. 이 때문에 계열사 신고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 규제를 모두 피하는 효과가 있어 공정거래법은 신고의무를 위반하면 바로 총수를 고발하고 2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실바톤어쿠스틱스의 진공관 앰프와 오디오
정 회장은 지난 2007년 실바톤어쿠스틱스를 설립했습니다. '하이엔드 오디오'라 불리는 초고가 오디오를 제작하는 업체를 손수 차린 것입니다. 자본금 전부를 본인이 냈지만, 장부상 대주주는 지인 2명의 이름을 빌렸습니다.
그런데 지난 2017년 12월 국세청의 세무조사에서 이 차명주식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KCC는 이듬해 공정위 기업집단 신고에서 슬그머니 실바톤어쿠스틱스를 계열사 명단에 끼워 넣었습니다.
KCC 측은 공정위 심의과정에서 취미 생활을 위해 만든 회사이고, 다른 계열사와 거래는 전혀 없다고 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위장계열사 혐의에서 고발 기준이 되는 '중대성'과 '고의성' 가운데 중대성이 낮다는 항변을 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판단할 여지는 많습니다. 그런데 10조 원이 넘는 회사를 거느리는 총수가 자산 4억 원에 자본잠식 상태인 회사를 왜 숨겼을까? 이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익명의 재계 관계자는 "'취미를 위해 회사를 세웠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차명회사보다 더 지독한 친인척 위장계열사‥내부거래도 '활발'
실바톤어쿠스틱스를 총수의 '양심' 문제라면 KCC의 다른 위장계열사는 그룹과 총수일가 전체의 도덕성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KCC는 2018년 신고에서 친인척이 보유한 9개 계열사 자료도 함께 제출했는데 일부 회사는 매출의 절반 이상을 KCC 관계사와의 내부거래로 올린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KCC 친인척 위장계열사의 내부거래 구조
㈜동주는 정 회장의 외삼촌인 조모 씨와 그 가족이 보유한 개인회사입니다. 골판지로 종이상자를 만드는 데 ㈜KCC와 코리아오토글라스㈜ 등 KCC 계열사에 지난 몇 년 동안 100억 원어치 이상 납품했습니다. 계열사와 내부거래한 비중이 2015~2016년에는 95%를 넘었고, 이후에도 70% 안팎을 유지했습니다.
조 씨 가족이 보유한 세우실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회사는 실리콘 실란트용 플라스틱 케이스, 고무제품 등을 생산하는데 매출 절반 이상은 KCC 계열사로부터 올렸습니다.
정 회장의 이종사촌들이 보유한 '티앤케이정보'의 거래구조는 더 단순합니다. 이 회사는 PC와 소프트웨어 등을 납품하는데 KCC 계열사와 거래한 비중이 99%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PC를 조립하거나 생산하는 회사가 아니어서 이른바 '통행세 거래' 정황도 있습니다.
이들 친족회사의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은 영세업체이며 KCC 계열사로 신고한 이후 오히려 영업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KCC 계열사들이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종이상자나 플라스틱 제품을 사준 것은 아닙니다.
KCC 측은 이번 사건에 대해 "실무자들이 관련 절차와 기준을 파악하지 못해 벌어지게 된 일"이라며 "앞으로 내부 시스템을 개선하도록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실수였을 뿐 고의는 아니었다고 해명했습니다.
■중소기업 생존 기반 빼앗아‥"지배구조 개선 나서야"
문제는 이들의 사업이 중소기업 고유의 영역과 겹친다는 점입니다. 성경제 공정위 기업집단정책과장은 "1990년대 후반부터 거래를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며 "대기업집단 총수일가가 친인척에 일감을 주면서 중소기업의 생존 기반을 뺏은 셈"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제 공정위 기업집단정책과장
한편에서는 부당한 내부거래 혐의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오랜 기간 거래를 이어왔기 때문에 그만큼 친인척 회사를 부당하게 지원해 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들 회사가 만들어 납품한 제품 단가가 소액이고 시중 가격과 차이를 갖기 힘들어 승산이 없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더 좋은 삶을 위한 가치창조' KCC가 내세우는 경영이념입니다. 지난달 세상을 떠난 정상영 명예회장은 해외에 의존하던 화학·소재 기술을 국산화하면서 국민의 더 좋은 삶에 기여했습니다. 정몽진 회장이 이끄는 KCC도 친인척이나 오디오 애호가가 아닌 우리 사회를 위한 가치 창조를 고민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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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1-02-09 07:00:26
- 수정2021-02-09 11:27:18
정몽진 KCC 회장(자료: KCC 홈페이지)
정몽진 KCC 회장은 재벌가에서도 소문난 오디오광입니다. 지금은 생산이 중단된 오래전에 만들어진 진공관 앰프, 스피커 등을 모으는데 국내에서는 수집가들 사이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미국 웨스턴일렉트릭(Western Electric) 제품을 가장 많이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코로나19 이전까지 독일 뮌헨에서 매년 열리던 최고급 오디오쇼에 자신의 오디오를 가져가 직접 시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 회장, 이 취미 때문에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됐습니다. 2007년 오디오를 제작하는 회사를 아예 설립하면서 지인의 명의를 빌려 차명으로 회사를 보유했던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오디오 애호가들이 선망하던 '성공한 덕후'에서 공정거래법 위반 사범으로 전락할 처지입니다.
■'성공한 덕후'에서 위장계열사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는 어제(8일) KCC가 ㈜실바톤어쿠스틱스 등 10개 계열사를 대기업집단 신고에서 누락한 혐의로 최종 책임자인 정몽진 회장을 검찰에 고발했다고 밝혔습니다. 흔히 말하는 '위장계열사' 혐의입니다.
공정위는 매년 5월 공시대상기업집단(5조 원 이상)과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10조 원 이상)을 지정해 발표합니다. 삼성, 현대차, SK, LG 이런 식으로 그룹별 자산 순위가 매겨지는 것도 이 자료에 근거한 것입니다.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 상호출자, 순환출자 제한 등 지배구조 규제가 적용되고, 공시대상기업집단은 주요사항 공시의무, 총수일가 일감 몰아주기(사익편취) 규제 등이 부과됩니다. 이 때문에 계열사 신고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 규제를 모두 피하는 효과가 있어 공정거래법은 신고의무를 위반하면 바로 총수를 고발하고 2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정 회장은 지난 2007년 실바톤어쿠스틱스를 설립했습니다. '하이엔드 오디오'라 불리는 초고가 오디오를 제작하는 업체를 손수 차린 것입니다. 자본금 전부를 본인이 냈지만, 장부상 대주주는 지인 2명의 이름을 빌렸습니다.
그런데 지난 2017년 12월 국세청의 세무조사에서 이 차명주식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KCC는 이듬해 공정위 기업집단 신고에서 슬그머니 실바톤어쿠스틱스를 계열사 명단에 끼워 넣었습니다.
KCC 측은 공정위 심의과정에서 취미 생활을 위해 만든 회사이고, 다른 계열사와 거래는 전혀 없다고 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위장계열사 혐의에서 고발 기준이 되는 '중대성'과 '고의성' 가운데 중대성이 낮다는 항변을 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판단할 여지는 많습니다. 그런데 10조 원이 넘는 회사를 거느리는 총수가 자산 4억 원에 자본잠식 상태인 회사를 왜 숨겼을까? 이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익명의 재계 관계자는 "'취미를 위해 회사를 세웠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부담스러웠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차명회사보다 더 지독한 친인척 위장계열사‥내부거래도 '활발'
실바톤어쿠스틱스를 총수의 '양심' 문제라면 KCC의 다른 위장계열사는 그룹과 총수일가 전체의 도덕성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KCC는 2018년 신고에서 친인척이 보유한 9개 계열사 자료도 함께 제출했는데 일부 회사는 매출의 절반 이상을 KCC 관계사와의 내부거래로 올린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동주는 정 회장의 외삼촌인 조모 씨와 그 가족이 보유한 개인회사입니다. 골판지로 종이상자를 만드는 데 ㈜KCC와 코리아오토글라스㈜ 등 KCC 계열사에 지난 몇 년 동안 100억 원어치 이상 납품했습니다. 계열사와 내부거래한 비중이 2015~2016년에는 95%를 넘었고, 이후에도 70% 안팎을 유지했습니다.
조 씨 가족이 보유한 세우실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회사는 실리콘 실란트용 플라스틱 케이스, 고무제품 등을 생산하는데 매출 절반 이상은 KCC 계열사로부터 올렸습니다.
정 회장의 이종사촌들이 보유한 '티앤케이정보'의 거래구조는 더 단순합니다. 이 회사는 PC와 소프트웨어 등을 납품하는데 KCC 계열사와 거래한 비중이 99%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PC를 조립하거나 생산하는 회사가 아니어서 이른바 '통행세 거래' 정황도 있습니다.
이들 친족회사의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은 영세업체이며 KCC 계열사로 신고한 이후 오히려 영업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KCC 계열사들이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종이상자나 플라스틱 제품을 사준 것은 아닙니다.
KCC 측은 이번 사건에 대해 "실무자들이 관련 절차와 기준을 파악하지 못해 벌어지게 된 일"이라며 "앞으로 내부 시스템을 개선하도록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실수였을 뿐 고의는 아니었다고 해명했습니다.
■중소기업 생존 기반 빼앗아‥"지배구조 개선 나서야"
문제는 이들의 사업이 중소기업 고유의 영역과 겹친다는 점입니다. 성경제 공정위 기업집단정책과장은 "1990년대 후반부터 거래를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며 "대기업집단 총수일가가 친인척에 일감을 주면서 중소기업의 생존 기반을 뺏은 셈"이라고 했습니다.
한편에서는 부당한 내부거래 혐의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오랜 기간 거래를 이어왔기 때문에 그만큼 친인척 회사를 부당하게 지원해 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들 회사가 만들어 납품한 제품 단가가 소액이고 시중 가격과 차이를 갖기 힘들어 승산이 없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더 좋은 삶을 위한 가치창조' KCC가 내세우는 경영이념입니다. 지난달 세상을 떠난 정상영 명예회장은 해외에 의존하던 화학·소재 기술을 국산화하면서 국민의 더 좋은 삶에 기여했습니다. 정몽진 회장이 이끄는 KCC도 친인척이나 오디오 애호가가 아닌 우리 사회를 위한 가치 창조를 고민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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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민수 기자 m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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