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산 바쳐 광복군 길러낸 독립운동가, 87년 만의 추모식

입력 2021.02.17 (07:45) 수정 2021.02.17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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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집안에서 서훈을 받은 독립 운동가만 14명에 이르는 조선의 명문가, 바로 이회영 선생의 가문인데요, 이회영 선생의 6형제가 독립운동에 쓴 돈은 현재 가치로 2조 원대로 추산됩니다.

이 돈의 대부분은 6형제 중 둘째인 이석영 선생의 재산이었는데요, 이석영 선생이 유명을 달리한 지 꼭 87년이 되던 어제 그가 오래 살았던 남양주에서 추모 행사가 열렸습니다.

선재희 기자가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새로 지어진 남양주의 도서관에 특별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석영 뉴미디어 도서관.

개관식은 꼭 87년 전 변변한 장례식도 없이 이국땅에 묻힌 이석영 선생을 기리는 추모 행사로 치러졌습니다.

[이종찬/이석영 선생 조카손자 : "이 분이 이제야 영혼의 안식을 찾게 되는구나 그런 감동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석영 선생은 우당 이회영의 둘째 형입니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이회영 6형제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기로 합니다.

당시 이석영 선생은 양아버지 이유원에게 남양주 일대의 막대한 땅을 상속받은 직후였습니다.

[황원섭/우당기념관 상임이사 : "(남양주에서) 한양까지 오는 데 80리인데 그 언저리의 전답이 다 이유원 대감(이석영 양아버지) 소유의 땅이었다. (일본) 몰래 정리하려니 헐값에 정리하죠."]

당시 40만 원은 현재 가치로 2조 원대, 그 돈으로 이석영 선생은 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합니다.

김원봉 등 3,500여 명의 항일 투사가 배출됐습니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의 박해는 극심해졌고,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상해 빈민가를 홀로 전전하며 콩비지로 연명하던 그는 끝내 아사합니다.

아들이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된 후였습니다.

[조광한/남양주시장 : "공동묘지에 묻히셨습니다, 그 묘지가 훼손되어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종이 잠든 홍유릉 앞은 이석영 광장으로 명명됐고, 그의 이름을 딴 독립운동 체험시설도 다음 달 개장합니다.

유해는 찾을 길 없고, 직계 후손도 사라졌지만, 이석영 선생이 추구한 가치는 다시 생명을 얻었습니다.

KBS 뉴스 선재희입니다.

촬영기자:김제원/영상편집:안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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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21-02-17 08: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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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집안에서 서훈을 받은 독립 운동가만 14명에 이르는 조선의 명문가, 바로 이회영 선생의 가문인데요, 이회영 선생의 6형제가 독립운동에 쓴 돈은 현재 가치로 2조 원대로 추산됩니다.

이 돈의 대부분은 6형제 중 둘째인 이석영 선생의 재산이었는데요, 이석영 선생이 유명을 달리한 지 꼭 87년이 되던 어제 그가 오래 살았던 남양주에서 추모 행사가 열렸습니다.

선재희 기자가 다녀왔습니다.

[리포트]

새로 지어진 남양주의 도서관에 특별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석영 뉴미디어 도서관.

개관식은 꼭 87년 전 변변한 장례식도 없이 이국땅에 묻힌 이석영 선생을 기리는 추모 행사로 치러졌습니다.

[이종찬/이석영 선생 조카손자 : "이 분이 이제야 영혼의 안식을 찾게 되는구나 그런 감동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석영 선생은 우당 이회영의 둘째 형입니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이회영 6형제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기로 합니다.

당시 이석영 선생은 양아버지 이유원에게 남양주 일대의 막대한 땅을 상속받은 직후였습니다.

[황원섭/우당기념관 상임이사 : "(남양주에서) 한양까지 오는 데 80리인데 그 언저리의 전답이 다 이유원 대감(이석영 양아버지) 소유의 땅이었다. (일본) 몰래 정리하려니 헐값에 정리하죠."]

당시 40만 원은 현재 가치로 2조 원대, 그 돈으로 이석영 선생은 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합니다.

김원봉 등 3,500여 명의 항일 투사가 배출됐습니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의 박해는 극심해졌고,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상해 빈민가를 홀로 전전하며 콩비지로 연명하던 그는 끝내 아사합니다.

아들이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된 후였습니다.

[조광한/남양주시장 : "공동묘지에 묻히셨습니다, 그 묘지가 훼손되어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종이 잠든 홍유릉 앞은 이석영 광장으로 명명됐고, 그의 이름을 딴 독립운동 체험시설도 다음 달 개장합니다.

유해는 찾을 길 없고, 직계 후손도 사라졌지만, 이석영 선생이 추구한 가치는 다시 생명을 얻었습니다.

KBS 뉴스 선재희입니다.

촬영기자:김제원/영상편집:안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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