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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형제·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5.18 가두방송 전옥주 씨 별세
입력 2021.02.17 (19:16) 수정 2021.02.17 (21:09) 취재K
 제38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당시 전옥주 씨. 제38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당시 전옥주 씨.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우리 형제 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집에서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도청으로 나오셔서 우리 형제 자매들을 살려주십시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차에 올라타 목놓아 외치던 여성의 모습을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텐데요.

이 거리방송을 주도했던 전옥주 씨가 어제(16) 향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인은 당시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계엄군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고문 후유증에도 전 씨는 청문회에 참석하는 등 5.18을 알리는 데 앞장서왔는데요.

고인의 발자취를 되짚어봤습니다.

■'주머니에 있던 '7만 원'으로 스피커 구해…. 거리방송 주도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공개한 5.18 미공개 영상 속 전옥주씨. 시민과 계엄군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시민을 향해 열변을 토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공개한 5.18 미공개 영상 속 전옥주씨. 시민과 계엄군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시민을 향해 열변을 토하고 있다.

전옥주 씨는 전남 보성이 고향입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는 한국무용을 전공한 평범한 30대 여성이었습니다.

전씨는 친구와 약속이 있어 금남로에 나갔다가 5.18의 참상을 목격했습니다. 시민들은 잔혹하게 폭행을 당했고 학생들은 군인들의 손짓에 맞춰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했습니다.

전옥주 씨는 곧장 남학생 2명을 데리고 광주 학운동 동사무소로 갔습니다. 스피커와 앰프를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줄 수 없다"고 막아서는 공무원에게 주머니에 있는 돈 7만 원을 쥐어주고 강제로 들고 나왔습니다. 트럭 위에 스피커를 싣고 거리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밤낮없이 광주 시내 거리를 돌며 호소하기 시작한 겁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 중 영화 <화려한 휴가> 중

방송을 시작하고 곳곳을 누비면서 처참한 죽음을 맞닥뜨렸습니다. 얼굴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신원미상의 시신, 가슴에 피가 가득 고인 채로 누워있던 여학생, 택시를 타려 뛰어오다 계엄군 대검에 찔린 청년까지. 그때마다 전옥주씨는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 눈으로 목격한 사실 그대로를 또박또박 전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잃었습니다." "가슴을 난자해 죽였습니다." "모든 시민은 도청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1980년 광주를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배우 이요원씨가 광주 시내 거리를 돌며 확성기로 시민참여를 호소한 장면은 전옥주 씨를 모델로 삼은 겁니다. 전 씨는 지난 2018년 열린 제38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 당시 상황을 재현하기도 했습니다.

■ 고문 후유증 시달렸지만…. 5.18 알리기에 앞장서

 경기도 시흥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 5.18 부상자회 경기지부 제공. 경기도 시흥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 5.18 부상자회 경기지부 제공.

전옥주 씨는 간첩 누명을 쓰고 계엄군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총구로 머리며 허리를 맞기 일쑤였고, 송곳으로 무릎을 찔리는 잔인한 고문이었습니다.

15년 형을 선고받았을 땐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듬해 사면조치로 풀려났지만, 고문 후유증과 트라우마에 평생 시달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전옥주 씨는 누구보다 5.18의 진실을 알리는 데 앞장서왔습니다. 1989년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 5.18 당시 참상을 알렸습니다. 이후엔 5.18여성 동지회를 조직하는 등 활발히 활동해왔습니다.

■ "광주 시민들 이어준 연대의 매개체"

"근데 그렇잖아요, 내가 아무리 죽을죄를 졌어도, 나 그 죄책감 있어요. 나는 유족들을 보면 그래요,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정말로 내가 방송을 안 했다면, 시민의 죽음이 줄어들었을 것이고, 정말 계엄군 말처럼 이렇게 크게 확대되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죄인입니다. 죽을때까지...'그래 나는 죄인이지. 왜 내가 방송을 했을까 해요.'"

광주전남여성단체 연합 기획, <광주, 여성>, 이정우 편집, 후마니타스, 2012

전옥주 씨는 5.18 당시를 돌아보는 구술록에서 '왜 내가 방송을 했을까?' 하는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5.18 기념재단 등 5.18 관계자들은 전옥주 씨야 말로 광주 시민을 이어줬던 연대의 매개체라고 입을 모읍니다.

전 씨의 거리방송이 광주 시민들을 일깨웠고, 함께 항쟁에 나설 수 있게 동기부여를 해줬다는 것이지요. 전옥주씨는 늘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고백했지만 광주시민들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옥주 씨를 꼭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전옥주 씨는 구술록에서 "상대의 말이 듣기 싫어도 마지막까지 경청해 줄 수 있는 게 민주화"라고 밝혔는데요. 전 씨의 빈소는 가족들이 있는 경기도 시흥시 시화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습니다.

전 씨는 오는 19일 국립 5·18민주 묘지에 안장돼, 민주열사들과 나란히 영면에 들게 됐습니다.
  • “지금 우리 형제·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5.18 가두방송 전옥주 씨 별세
    • 입력 2021-02-17 19:16:52
    • 수정2021-02-17 21:09:54
    취재K
 제38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당시 전옥주 씨. 제38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 당시 전옥주 씨.

"광주 시민 여러분. 지금 우리 형제 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집에서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도청으로 나오셔서 우리 형제 자매들을 살려주십시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차에 올라타 목놓아 외치던 여성의 모습을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텐데요.

이 거리방송을 주도했던 전옥주 씨가 어제(16) 향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인은 당시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계엄군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고문 후유증에도 전 씨는 청문회에 참석하는 등 5.18을 알리는 데 앞장서왔는데요.

고인의 발자취를 되짚어봤습니다.

■'주머니에 있던 '7만 원'으로 스피커 구해…. 거리방송 주도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공개한 5.18 미공개 영상 속 전옥주씨. 시민과 계엄군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시민을 향해 열변을 토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공개한 5.18 미공개 영상 속 전옥주씨. 시민과 계엄군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시민을 향해 열변을 토하고 있다.

전옥주 씨는 전남 보성이 고향입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에는 한국무용을 전공한 평범한 30대 여성이었습니다.

전씨는 친구와 약속이 있어 금남로에 나갔다가 5.18의 참상을 목격했습니다. 시민들은 잔혹하게 폭행을 당했고 학생들은 군인들의 손짓에 맞춰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했습니다.

전옥주 씨는 곧장 남학생 2명을 데리고 광주 학운동 동사무소로 갔습니다. 스피커와 앰프를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줄 수 없다"고 막아서는 공무원에게 주머니에 있는 돈 7만 원을 쥐어주고 강제로 들고 나왔습니다. 트럭 위에 스피커를 싣고 거리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밤낮없이 광주 시내 거리를 돌며 호소하기 시작한 겁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 중 영화 <화려한 휴가> 중

방송을 시작하고 곳곳을 누비면서 처참한 죽음을 맞닥뜨렸습니다. 얼굴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신원미상의 시신, 가슴에 피가 가득 고인 채로 누워있던 여학생, 택시를 타려 뛰어오다 계엄군 대검에 찔린 청년까지. 그때마다 전옥주씨는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 눈으로 목격한 사실 그대로를 또박또박 전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잃었습니다." "가슴을 난자해 죽였습니다." "모든 시민은 도청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1980년 광주를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배우 이요원씨가 광주 시내 거리를 돌며 확성기로 시민참여를 호소한 장면은 전옥주 씨를 모델로 삼은 겁니다. 전 씨는 지난 2018년 열린 제38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 당시 상황을 재현하기도 했습니다.

■ 고문 후유증 시달렸지만…. 5.18 알리기에 앞장서

 경기도 시흥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 5.18 부상자회 경기지부 제공. 경기도 시흥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 5.18 부상자회 경기지부 제공.

전옥주 씨는 간첩 누명을 쓰고 계엄군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총구로 머리며 허리를 맞기 일쑤였고, 송곳으로 무릎을 찔리는 잔인한 고문이었습니다.

15년 형을 선고받았을 땐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듬해 사면조치로 풀려났지만, 고문 후유증과 트라우마에 평생 시달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전옥주 씨는 누구보다 5.18의 진실을 알리는 데 앞장서왔습니다. 1989년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 5.18 당시 참상을 알렸습니다. 이후엔 5.18여성 동지회를 조직하는 등 활발히 활동해왔습니다.

■ "광주 시민들 이어준 연대의 매개체"

"근데 그렇잖아요, 내가 아무리 죽을죄를 졌어도, 나 그 죄책감 있어요. 나는 유족들을 보면 그래요,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정말로 내가 방송을 안 했다면, 시민의 죽음이 줄어들었을 것이고, 정말 계엄군 말처럼 이렇게 크게 확대되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죄인입니다. 죽을때까지...'그래 나는 죄인이지. 왜 내가 방송을 했을까 해요.'"

광주전남여성단체 연합 기획, <광주, 여성>, 이정우 편집, 후마니타스, 2012

전옥주 씨는 5.18 당시를 돌아보는 구술록에서 '왜 내가 방송을 했을까?' 하는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5.18 기념재단 등 5.18 관계자들은 전옥주 씨야 말로 광주 시민을 이어줬던 연대의 매개체라고 입을 모읍니다.

전 씨의 거리방송이 광주 시민들을 일깨웠고, 함께 항쟁에 나설 수 있게 동기부여를 해줬다는 것이지요. 전옥주씨는 늘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고백했지만 광주시민들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옥주 씨를 꼭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전옥주 씨는 구술록에서 "상대의 말이 듣기 싫어도 마지막까지 경청해 줄 수 있는 게 민주화"라고 밝혔는데요. 전 씨의 빈소는 가족들이 있는 경기도 시흥시 시화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습니다.

전 씨는 오는 19일 국립 5·18민주 묘지에 안장돼, 민주열사들과 나란히 영면에 들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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