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처럼 통곡”…北이 방송한 사진 속 ‘만삭 위안부’의 증언

입력 2021.03.02 (16:14) 수정 2021.03.02 (21:32)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북한 중앙계급교양관에 전시된 고 박영심 할머니의 사진. 조선중앙TV 화면.북한 중앙계급교양관에 전시된 고 박영심 할머니의 사진. 조선중앙TV 화면.

삼일절이었던 어제(1일), 북한 조선중앙TV가 다큐멘터리 한 편을 방송했습니다.

<사진 속의 진상을 파헤치다>라는 제목이 붙은 48분 정도 길이의 이 다큐멘터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박영심 할머니(1921~2006)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저 사진 속에서 만삭의 몸으로 반쯤 기대선 분이 바로 박영심 할머니입니다.

얼마 전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가 위안부가 자발적 성매매를 했다고 논문을 써 우리 언론이 관심을 가졌는데, 북한도 오늘(2일) 대외선전매체를 통해 이 교수를 '친일분자'라고 비판했습니다.

일본군에게 끌려갔던 박 할머니 증언이 담긴 어제 다큐멘터리는 그 비판의 근거가 되는 셈입니다.

박영심 할머니는 해방 후 북한에 살다 2006년 세상을 떠났는데, 다큐멘터리에서는 사진 속 임부가 박 할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연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2000년 5월 일본의 한 민간단체가 북한의 '조선 일본군 성노예 및 강제 연행 피해자 문제 대책위원회'(조대위)에 연락을 했고, 사진 속 여성이 박영심 할머니라고 증언하는 옛 일본군 병사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잘 알려진 위안부 피해자 사진 속 주인공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2000년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에 참석한 뒤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하는 고 박영심 할머니의 모습. 조선중앙TV 화면.2000년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에 참석한 뒤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하는 고 박영심 할머니의 모습. 조선중앙TV 화면.

"할머니가 18살이던 1939년 여름, 할머니가 일하던 양복점에 찾아온 일본 순사가 돈을 벌러 가자고 했다. 이유를 묻는 할머니에게 순사가 욕을 하며 따라오라고 했다."

방송은 할머니가 위안부로 끌려간 과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생전의 할머니를 만났던 북한의 '조대위' 관계자는 할머니에게 피해 사실을 이렇게 물어봤다고 했습니다.

"할머니, 바다 구경은 언제 처음 하셨어요?"

"그게 아마 내가 일본놈들에게 끌려가서 싱가포르 거쳐 미얀마로 갈 때야. 그때 배로 갔으니까 그때 바다 처음 봤어."


그러고 나서 할머니에게 잘 알려진 '만삭의 위안부' 사진을 건네자, 당시 팔순에 가까웠던 할머니가 "난 아니야. 이 사진 속에는 내가 없어. 누가, 어느 놈이 그렇게 말했어."라는 말과 함께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는 겁니다.

50년 넘게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피해 사실을 사진으로 접하는 순간 박 할머니는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방송은 할머니가 고향 평안남도 남포로 돌아와 살면서 남편과 이웃 누구에게도 피해 사실을 말한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사진을 외면했던 할머니의 마음을 바꾼 것은 납치와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였습니다.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할머니는 2003년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던 중국 난징을 직접 찾았습니다. 방송은, 할머니가 옛 모습이 남은 위안소 건물에서 자신의 방을 찾고서는, "바닥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통곡을 했다."고 전했습니다.

2003년 중국의 옛 일본군 위안소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는 박영심 할머니의 모습. 조선중앙TV 화면.2003년 중국의 옛 일본군 위안소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는 박영심 할머니의 모습. 조선중앙TV 화면.

"왜놈 군대가 방에 들어오더니 미친 듯이 달려드는 것이었다. 내가 몸부림치며 반항하자 그자는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마구 때리고 치다가 나중에는 군도를 목에 대고 죽여버리겠다고 날뛰었다. 그 바람에 군도에 베여 목에서 선지피가 흘러 온몸을 적시었다."

북한이 채록한 박영심 할머니의 이 증언이 그때 그 통곡의 이유였을 것입니다. 할머니는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고 방송은 전합니다.

다큐멘터리의 제작자들이 미국의 어느 교수의 논문 때문에 방송을 애써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다른 학자가 전문가인 양 하며 강제 동원이 없었다는 주장을 한다면 박영심 할머니의 증언이 반박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큐멘터리는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으로 끝을 맺습니다.

"나는 죽더라도 증명할 것입니다. 역사가 증명하고 내가 증명합니다. 이 역사를 지워버려서는 안 됩니다."

[연관 기사] [단독/앵커의 눈] 연합군에 구출된 위안부 “만세! 만세!”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457442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아이처럼 통곡”…北이 방송한 사진 속 ‘만삭 위안부’의 증언
    • 입력 2021-03-02 16:14:40
    • 수정2021-03-02 21:32:02
    취재K
북한 중앙계급교양관에 전시된 고 박영심 할머니의 사진. 조선중앙TV 화면.
삼일절이었던 어제(1일), 북한 조선중앙TV가 다큐멘터리 한 편을 방송했습니다.

<사진 속의 진상을 파헤치다>라는 제목이 붙은 48분 정도 길이의 이 다큐멘터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박영심 할머니(1921~2006)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저 사진 속에서 만삭의 몸으로 반쯤 기대선 분이 바로 박영심 할머니입니다.

얼마 전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가 위안부가 자발적 성매매를 했다고 논문을 써 우리 언론이 관심을 가졌는데, 북한도 오늘(2일) 대외선전매체를 통해 이 교수를 '친일분자'라고 비판했습니다.

일본군에게 끌려갔던 박 할머니 증언이 담긴 어제 다큐멘터리는 그 비판의 근거가 되는 셈입니다.

박영심 할머니는 해방 후 북한에 살다 2006년 세상을 떠났는데, 다큐멘터리에서는 사진 속 임부가 박 할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연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2000년 5월 일본의 한 민간단체가 북한의 '조선 일본군 성노예 및 강제 연행 피해자 문제 대책위원회'(조대위)에 연락을 했고, 사진 속 여성이 박영심 할머니라고 증언하는 옛 일본군 병사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잘 알려진 위안부 피해자 사진 속 주인공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2000년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에 참석한 뒤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하는 고 박영심 할머니의 모습. 조선중앙TV 화면.
"할머니가 18살이던 1939년 여름, 할머니가 일하던 양복점에 찾아온 일본 순사가 돈을 벌러 가자고 했다. 이유를 묻는 할머니에게 순사가 욕을 하며 따라오라고 했다."

방송은 할머니가 위안부로 끌려간 과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생전의 할머니를 만났던 북한의 '조대위' 관계자는 할머니에게 피해 사실을 이렇게 물어봤다고 했습니다.

"할머니, 바다 구경은 언제 처음 하셨어요?"

"그게 아마 내가 일본놈들에게 끌려가서 싱가포르 거쳐 미얀마로 갈 때야. 그때 배로 갔으니까 그때 바다 처음 봤어."


그러고 나서 할머니에게 잘 알려진 '만삭의 위안부' 사진을 건네자, 당시 팔순에 가까웠던 할머니가 "난 아니야. 이 사진 속에는 내가 없어. 누가, 어느 놈이 그렇게 말했어."라는 말과 함께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는 겁니다.

50년 넘게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피해 사실을 사진으로 접하는 순간 박 할머니는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방송은 할머니가 고향 평안남도 남포로 돌아와 살면서 남편과 이웃 누구에게도 피해 사실을 말한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사진을 외면했던 할머니의 마음을 바꾼 것은 납치와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일본 정부의 태도였습니다.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할머니는 2003년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던 중국 난징을 직접 찾았습니다. 방송은, 할머니가 옛 모습이 남은 위안소 건물에서 자신의 방을 찾고서는, "바닥에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통곡을 했다."고 전했습니다.

2003년 중국의 옛 일본군 위안소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는 박영심 할머니의 모습. 조선중앙TV 화면.
"왜놈 군대가 방에 들어오더니 미친 듯이 달려드는 것이었다. 내가 몸부림치며 반항하자 그자는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며 마구 때리고 치다가 나중에는 군도를 목에 대고 죽여버리겠다고 날뛰었다. 그 바람에 군도에 베여 목에서 선지피가 흘러 온몸을 적시었다."

북한이 채록한 박영심 할머니의 이 증언이 그때 그 통곡의 이유였을 것입니다. 할머니는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고 방송은 전합니다.

다큐멘터리의 제작자들이 미국의 어느 교수의 논문 때문에 방송을 애써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다른 학자가 전문가인 양 하며 강제 동원이 없었다는 주장을 한다면 박영심 할머니의 증언이 반박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큐멘터리는 또 다른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으로 끝을 맺습니다.

"나는 죽더라도 증명할 것입니다. 역사가 증명하고 내가 증명합니다. 이 역사를 지워버려서는 안 됩니다."

[연관 기사] [단독/앵커의 눈] 연합군에 구출된 위안부 “만세! 만세!”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457442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