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생 매주 2천 원 주는 초등학교…몸으로 배우는 ‘나눔 경제’

입력 2021.03.17 (07:00) 수정 2021.03.17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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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생에게 매주 2천 원씩 ‘매점 화폐’를 지급하고 있는 충북 보은 판동초등학교.전교생에게 매주 2천 원씩 ‘매점 화폐’를 지급하고 있는 충북 보은 판동초등학교.

■ 매주 월요일에 누구나 2천 원씩…초등학생들의 '기본 소득' 실험

모두가 피하고 싶어하는 월요일. 그런데 충북에는 매주 월요일만 기다리는 초등학생들이 있습니다. 전교생이 40여 명 남짓 되는 충북 보은 판동초등학교 학생들인데요.

학기 중이든, 방학이든 이 학교에선 매주 월요일마다 모든 학생에게 '매점 화폐'를 2천 원어치씩 나눠주고 있습니다.

학교 매점에서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2천 원을 모두 똑같이 받는 겁니다.

근처에 편의점이나 마트를 찾기 힘든 이 농촌 학교의 '매점 화폐' 나눔은 한 교사의 제안으로 시작됐습니다.
이 학교는 2019년 말, 학생들이 질 좋은 간식과 학용품을 쉽게 구매할 수 있도록 매점을 열었습니다.

매점이 생기자, 용돈을 꾸준히 받아 쉽게 이용하는 학생과 형편이 여의치 않아 갈 수 없는 학생으로 나뉘었습니다.

용돈이 부족해 매점을 가지 못하는 친구들은 아쉬워하거나 눈치를 봤고, 매점에 가는 친구들도 미안함을 느끼면서 서로 불편한 상황이 생긴 겁니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 속에서 아이들이 몸소 '불평등'을 겪게 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후 학교에서는 모두가 매점을 자유롭게 이용할 방법이 없을지 고민했고, 지난해 10월, '매점 화폐'를 도입했다고 합니다. 당시 학교에 들어온 기탁금을 활용했습니다.

전교생에게 2천 원씩, 처음 석 달 동안, 모두 100여만 원을 투입했습니다. 농촌 학교의 특별한 취지에 공감하는 이들과 시민사회단체의 기탁금이 답지해 현재까지 큰 어려움 없이 사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주기 때문에 교사들은 학생 가정의 경제적인 형편, 소득 수준 등을 일일이 살펴봐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구분 짓기로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해 하는 아이들도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용돈'이라는 용어 대신, '어린이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어른이 아이에게 수직적으로 주는 돈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본인의 몫을 받고, 소비와 복지의 주체가 되도록 하자는 취지에서입니다.

 충북 보은 판동초등학교, 쉬는 시간  충북 보은 판동초등학교, 쉬는 시간

"배고플 때나 학용품을 살 때 학교 매점에 가요. 원래 같이 못 가던 친구들도 같이 가서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더 친해지는 것 같아요." - 정성현, 충북 보은 판동초등학교 5학년

■ "친구들과 같이 갈 수 있어요"…더 돈독해지는 학생들

쉬는 시간이 되자 학생들이 우르르 매점에 달려옵니다. 일과 중 2번, 쉬는 시간 30분 동안 매점 문이 열리는데요.

그때마다 매점은 간식이나 학용품을 사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친구들로 북적입니다. 전교생이 매주, 같은 금액의 화폐를 받게 되자 매점을 이용하는 학생도 자연스럽게 늘었습니다.

다양한 친구들이 함께 오면서 매점은 학생들의 자유로운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데요. 친구들과 더 돈독해지고, 학교에 오는 게 더 즐거워졌다는 게 학생들이 꼽은 가장 큰 장점입니다.

잔돈이 모자란 친구들을 위한 기부함, ‘잔돈샘’.잔돈이 모자란 친구들을 위한 기부함, ‘잔돈샘’.

■ "꼭 필요하면 내가 사줄까?", "잔돈은 기부할게요."

여유가 생긴 아이들은 매점 화폐를 사용하면서 친구들과 관계 맺는 법까지 배우고 있습니다.

서로 사주고, 나눠 먹기도 하면서 우정도 훨씬 깊어졌다고 합니다. 이제는 학교 안 매점을 '누구나 가서 쉴 수 있는 곳' 으로 편안하게 생각하게 됐다고 하는데요.

매점 화폐를 지급한 지 5개월이 되자, 자발적인 기부 문화도 생겨났습니다.

계산하고 남은, 단돈 200~300원 안팎의 거스름돈을 다른 친구들을 위해 기부하게 된 겁니다. 물건을 사러 왔는데 잔돈 몇백 원이 모자란 또 다른 학생들은 '누구나 쓸 수 있는 잔돈샘'에서 나머지 돈을 꺼내 씁니다.

'나보다 부족한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모이고 모여, 잔돈샘에는 매일 기부 동전이 끊이지 않습니다. 단돈 2천 원으로 아이들은 '평등'을 넘어 '나눔'까지 배우고 있습니다.


■ 모든 학생이 '주체적 소비'…화폐 경제 교육까지

"사고 싶은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서 좋아요."
매점 전용 화폐를 지급한 지 3주차에 벌인 설문 조사에서 전체 학생들의 78%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부모님께 용돈을 받지 않거나, 덜 받아도 괜찮아서 좋다'는 답도 88%나 됐습니다.

매점 화폐를 바로 다 쓰지 않고, 많게는 1~2만 원 단위까지 모으는 학생들도 있다고 합니다. 신중하고 알뜰한 소비, 미래를 생각하는 저축을 배워가면서 어엿한 경제 주체가 되어가고 있는 겁니다.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들의 만족도도 높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부터 직접 '돈 관리'를 해볼 수 있어서라고 하는데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은 매점 화폐를 스스로 목적에 맞게 이용하고, 알뜰하게 저축하는 모습을 대견해하고 있습니다.

작은 농촌 학교의 '매점 화폐' 실험이 학생들에게 '경제 교육'과 '복지', 그리고 '나눔'이라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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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교생 매주 2천 원 주는 초등학교…몸으로 배우는 ‘나눔 경제’
    • 입력 2021-03-17 07:00:54
    • 수정2021-03-17 11:49:50
    취재K
전교생에게 매주 2천 원씩 ‘매점 화폐’를 지급하고 있는 충북 보은 판동초등학교.
■ 매주 월요일에 누구나 2천 원씩…초등학생들의 '기본 소득' 실험

모두가 피하고 싶어하는 월요일. 그런데 충북에는 매주 월요일만 기다리는 초등학생들이 있습니다. 전교생이 40여 명 남짓 되는 충북 보은 판동초등학교 학생들인데요.

학기 중이든, 방학이든 이 학교에선 매주 월요일마다 모든 학생에게 '매점 화폐'를 2천 원어치씩 나눠주고 있습니다.

학교 매점에서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2천 원을 모두 똑같이 받는 겁니다.

근처에 편의점이나 마트를 찾기 힘든 이 농촌 학교의 '매점 화폐' 나눔은 한 교사의 제안으로 시작됐습니다.
이 학교는 2019년 말, 학생들이 질 좋은 간식과 학용품을 쉽게 구매할 수 있도록 매점을 열었습니다.

매점이 생기자, 용돈을 꾸준히 받아 쉽게 이용하는 학생과 형편이 여의치 않아 갈 수 없는 학생으로 나뉘었습니다.

용돈이 부족해 매점을 가지 못하는 친구들은 아쉬워하거나 눈치를 봤고, 매점에 가는 친구들도 미안함을 느끼면서 서로 불편한 상황이 생긴 겁니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 속에서 아이들이 몸소 '불평등'을 겪게 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후 학교에서는 모두가 매점을 자유롭게 이용할 방법이 없을지 고민했고, 지난해 10월, '매점 화폐'를 도입했다고 합니다. 당시 학교에 들어온 기탁금을 활용했습니다.

전교생에게 2천 원씩, 처음 석 달 동안, 모두 100여만 원을 투입했습니다. 농촌 학교의 특별한 취지에 공감하는 이들과 시민사회단체의 기탁금이 답지해 현재까지 큰 어려움 없이 사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주기 때문에 교사들은 학생 가정의 경제적인 형편, 소득 수준 등을 일일이 살펴봐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구분 짓기로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해 하는 아이들도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용돈'이라는 용어 대신, '어린이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어른이 아이에게 수직적으로 주는 돈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본인의 몫을 받고, 소비와 복지의 주체가 되도록 하자는 취지에서입니다.

 충북 보은 판동초등학교, 쉬는 시간
"배고플 때나 학용품을 살 때 학교 매점에 가요. 원래 같이 못 가던 친구들도 같이 가서 먹을 수 있어서 좋아요. 더 친해지는 것 같아요." - 정성현, 충북 보은 판동초등학교 5학년

■ "친구들과 같이 갈 수 있어요"…더 돈독해지는 학생들

쉬는 시간이 되자 학생들이 우르르 매점에 달려옵니다. 일과 중 2번, 쉬는 시간 30분 동안 매점 문이 열리는데요.

그때마다 매점은 간식이나 학용품을 사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친구들로 북적입니다. 전교생이 매주, 같은 금액의 화폐를 받게 되자 매점을 이용하는 학생도 자연스럽게 늘었습니다.

다양한 친구들이 함께 오면서 매점은 학생들의 자유로운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데요. 친구들과 더 돈독해지고, 학교에 오는 게 더 즐거워졌다는 게 학생들이 꼽은 가장 큰 장점입니다.

잔돈이 모자란 친구들을 위한 기부함, ‘잔돈샘’.
■ "꼭 필요하면 내가 사줄까?", "잔돈은 기부할게요."

여유가 생긴 아이들은 매점 화폐를 사용하면서 친구들과 관계 맺는 법까지 배우고 있습니다.

서로 사주고, 나눠 먹기도 하면서 우정도 훨씬 깊어졌다고 합니다. 이제는 학교 안 매점을 '누구나 가서 쉴 수 있는 곳' 으로 편안하게 생각하게 됐다고 하는데요.

매점 화폐를 지급한 지 5개월이 되자, 자발적인 기부 문화도 생겨났습니다.

계산하고 남은, 단돈 200~300원 안팎의 거스름돈을 다른 친구들을 위해 기부하게 된 겁니다. 물건을 사러 왔는데 잔돈 몇백 원이 모자란 또 다른 학생들은 '누구나 쓸 수 있는 잔돈샘'에서 나머지 돈을 꺼내 씁니다.

'나보다 부족한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모이고 모여, 잔돈샘에는 매일 기부 동전이 끊이지 않습니다. 단돈 2천 원으로 아이들은 '평등'을 넘어 '나눔'까지 배우고 있습니다.


■ 모든 학생이 '주체적 소비'…화폐 경제 교육까지

"사고 싶은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서 좋아요."
매점 전용 화폐를 지급한 지 3주차에 벌인 설문 조사에서 전체 학생들의 78%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부모님께 용돈을 받지 않거나, 덜 받아도 괜찮아서 좋다'는 답도 88%나 됐습니다.

매점 화폐를 바로 다 쓰지 않고, 많게는 1~2만 원 단위까지 모으는 학생들도 있다고 합니다. 신중하고 알뜰한 소비, 미래를 생각하는 저축을 배워가면서 어엿한 경제 주체가 되어가고 있는 겁니다.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들의 만족도도 높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부터 직접 '돈 관리'를 해볼 수 있어서라고 하는데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은 매점 화폐를 스스로 목적에 맞게 이용하고, 알뜰하게 저축하는 모습을 대견해하고 있습니다.

작은 농촌 학교의 '매점 화폐' 실험이 학생들에게 '경제 교육'과 '복지', 그리고 '나눔'이라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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