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클러 시정 명령 하루 만에 불…옆 건물 번져 피해 키워

입력 2021.05.04 (15:12) 수정 2021.05.04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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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부산 동구의 한 견본주택에서 불이 났습니다. 불은 삽시간에 건물 전체를 집어삼켰고, 바람을 타고 바로 옆에 있던 창고로 번졌는데요. 창고의 고가 의료 장비들이 모두 불에 탔고, 주차장에 있던 차량도 전소했습니다.

퇴근 후에 불이 나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바로 옆에는 아파트 단지와 상가가 밀집해 수십 명의 주민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소방당국이 추산한 재산 피해는 10억 원. 견본주택의 특성상 합판과 목재가 많아 불은 쉽사리 잡히지 않았는데요. 소화기와 스프링클러 등 소방 설비가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 화재 설비 시정 명령 하루 만에 전소…"스프링클러에 문제"

견본주택은 주택법상 가설건물로 스프링클러, 자동화재감지 설비, 소화기 등을 설치하게 돼 있습니다. 불이 난 건물에도 이런 설비들이 갖춰져 있었는데요, 왜 화재를 막지 못했을까요?

불은 1층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곳에 설치된 스프링클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견본주택과 같은 특수목적대상물은 1년에 두 번씩 소방시설 정기점검을 받습니다. 점검 업체가 방문해 점검하고 나면 결과를 소방서에 보고하고, 시정 조치를 받는 방식으로 이뤄지는데요. 이 건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지난달 6일 정밀점검을 받았는데, 스프링클러에 물을 퍼올리는 펌프 시설에서 문제점이 발견됐습니다. 주 펌프의 배터리가 불량이었고, 보조펌프에서는 누수도 확인됐습니다.

점검 결과를 받아본 소방당국이 지난달 29일 시정 조치 명령을 내렸는데 손 쓸 새도 없이 불과 하루 만에 불이 났습니다.

견본주택에서 난 불이 바로 옆 창고로 옮겨붙은 모습견본주택에서 난 불이 바로 옆 창고로 옮겨붙은 모습
■ 건물 간 '거리 규정' 실효성 떨어져…대형 피해 우려

건물 간 거리 규정도 문제가 됐습니다. 현행법에는 견본주택의 경우 인근 건물과 대지 경계선을 기준으로 3m가량 거리를 띄워 짓도록 하고 있습니다. 내연성 소재를 사용하거나 주변에 공터가 있다면 1.5m 정도로 기준이 완화됩니다. 견본주택은 가설건물이기 때문에 규정을 지킬 경우 준공 등 절차를 밟지 않고 담당 구청에 신고만 하면 됩니다.

해당 견본주택도 지난 2013년 1.5m 거리를 유지하도록 한 규정에 맞춰 담당 구청에 신고 절차를 마쳤습니다. 바로 옆에 아파트와 상가가 밀집했지만, 규정상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화재 상황에서 규정은 유명무실했습니다. 바람이 불자 불길이 거세지면서 바로 옆 아파트와 창고로 번질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은 악화됐습니다.

소방당국도 화재 당시 주변 건물로 불이 옮겨붙는 것을 막기 위한 작업에 주력했다고 하는데요. 불에 잘 타는 소재들이 많은 견본주택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규정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 가설건물 피해 보상도 막막…피해 업체 "망연자실"

피해 보상도 막막합니다. 견본주택과 불이 옮겨붙은 창고 등 모두 가설건물로 보험 가입이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보험사에서도 손실이 더 크다고 보고 보험 가입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입 의료기기 판매를 하던 피해 업체도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MRI와 CT 장비 등이 모두 불에 타 큰 손실을 입었는데요. 업체 대표는 "보험가입을 수차례 시도했지만 어렵다는 답변만 받았다.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갑갑한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 '추가 붕괴 우려'에 철거 계획…추가 대책 마련 필요
불이난 자리에는 현재 건물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있습니다. 관할 구청인 동구청은 추가 피해를 우려해 합동감식이 끝나는 대로 건물 철거 등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는데요. 하지만 건물이 전소해 정확한 화재 원인을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당장 건물 폐쇄 등 조치도 쉽지 않은 실정입니다.

건축 전문가들은 "화재 확산을 막기 위해 도입한 법의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며 "특히 번화가 등 인구 밀집도가 높은 지역의 경우 견본주택과 건물 사이 거리를 늘리는 등 추가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화면 제공: 부산소방재난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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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5-04 15:12:07
    • 수정2021-05-04 15:16:22
    취재K

지난달 30일, 부산 동구의 한 견본주택에서 불이 났습니다. 불은 삽시간에 건물 전체를 집어삼켰고, 바람을 타고 바로 옆에 있던 창고로 번졌는데요. 창고의 고가 의료 장비들이 모두 불에 탔고, 주차장에 있던 차량도 전소했습니다.

퇴근 후에 불이 나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바로 옆에는 아파트 단지와 상가가 밀집해 수십 명의 주민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소방당국이 추산한 재산 피해는 10억 원. 견본주택의 특성상 합판과 목재가 많아 불은 쉽사리 잡히지 않았는데요. 소화기와 스프링클러 등 소방 설비가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 화재 설비 시정 명령 하루 만에 전소…"스프링클러에 문제"

견본주택은 주택법상 가설건물로 스프링클러, 자동화재감지 설비, 소화기 등을 설치하게 돼 있습니다. 불이 난 건물에도 이런 설비들이 갖춰져 있었는데요, 왜 화재를 막지 못했을까요?

불은 1층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곳에 설치된 스프링클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견본주택과 같은 특수목적대상물은 1년에 두 번씩 소방시설 정기점검을 받습니다. 점검 업체가 방문해 점검하고 나면 결과를 소방서에 보고하고, 시정 조치를 받는 방식으로 이뤄지는데요. 이 건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지난달 6일 정밀점검을 받았는데, 스프링클러에 물을 퍼올리는 펌프 시설에서 문제점이 발견됐습니다. 주 펌프의 배터리가 불량이었고, 보조펌프에서는 누수도 확인됐습니다.

점검 결과를 받아본 소방당국이 지난달 29일 시정 조치 명령을 내렸는데 손 쓸 새도 없이 불과 하루 만에 불이 났습니다.

견본주택에서 난 불이 바로 옆 창고로 옮겨붙은 모습 ■ 건물 간 '거리 규정' 실효성 떨어져…대형 피해 우려

건물 간 거리 규정도 문제가 됐습니다. 현행법에는 견본주택의 경우 인근 건물과 대지 경계선을 기준으로 3m가량 거리를 띄워 짓도록 하고 있습니다. 내연성 소재를 사용하거나 주변에 공터가 있다면 1.5m 정도로 기준이 완화됩니다. 견본주택은 가설건물이기 때문에 규정을 지킬 경우 준공 등 절차를 밟지 않고 담당 구청에 신고만 하면 됩니다.

해당 견본주택도 지난 2013년 1.5m 거리를 유지하도록 한 규정에 맞춰 담당 구청에 신고 절차를 마쳤습니다. 바로 옆에 아파트와 상가가 밀집했지만, 규정상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화재 상황에서 규정은 유명무실했습니다. 바람이 불자 불길이 거세지면서 바로 옆 아파트와 창고로 번질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은 악화됐습니다.

소방당국도 화재 당시 주변 건물로 불이 옮겨붙는 것을 막기 위한 작업에 주력했다고 하는데요. 불에 잘 타는 소재들이 많은 견본주택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규정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 가설건물 피해 보상도 막막…피해 업체 "망연자실"

피해 보상도 막막합니다. 견본주택과 불이 옮겨붙은 창고 등 모두 가설건물로 보험 가입이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보험사에서도 손실이 더 크다고 보고 보험 가입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입 의료기기 판매를 하던 피해 업체도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MRI와 CT 장비 등이 모두 불에 타 큰 손실을 입었는데요. 업체 대표는 "보험가입을 수차례 시도했지만 어렵다는 답변만 받았다.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갑갑한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 '추가 붕괴 우려'에 철거 계획…추가 대책 마련 필요
불이난 자리에는 현재 건물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있습니다. 관할 구청인 동구청은 추가 피해를 우려해 합동감식이 끝나는 대로 건물 철거 등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는데요. 하지만 건물이 전소해 정확한 화재 원인을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당장 건물 폐쇄 등 조치도 쉽지 않은 실정입니다.

건축 전문가들은 "화재 확산을 막기 위해 도입한 법의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며 "특히 번화가 등 인구 밀집도가 높은 지역의 경우 견본주택과 건물 사이 거리를 늘리는 등 추가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화면 제공: 부산소방재난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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