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13년째 살포되는 ‘죽음의 파란 치킨’

입력 2021.05.05 (10:02) 수정 2021.05.05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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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은 식욕 감퇴에 효과적인 색깔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식욕 억제용’으로 떡볶이와 라면 등 음식에 파란색을 입힌 사진이 누리꾼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죠. 한 번 보시죠?

파란 떡볶이, 파란 라면, 파란 삼겹살... 식욕이 뚝 떨어집니다. 뿐만인가요.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습니다. 파란 치킨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그런데 파란 치킨이, 한 동네에서 10여 년 넘게 발견되고 있다면 어떨까요?


■‘죽음의 파란 치킨’ 행렬


2008년, 대전광역시 대덕구 신탄진 일대에서 파란 닭고기가 처음 발견됐습니다. 파란색 가루가 범벅된 닭고기였죠. 강산이 한 번 변하고 3년이 흐르는 동안 파란 닭고기는 하루도 빠짐없이 동네에서 등장했습니다. 많을 때는 하루에 30군데에서도 발견됐습니다. 형태는 다양했습니다. 파란 가루가 묻은 생닭이나 치킨이 그릇째 놓여지기도 하고 두세 조각씩 뿌려지기도 했습니다.

인간들은 파란색 닭고기를 보고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챕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다르죠. 파란 닭고기를 먹고 죽은 길고양이가 속출했습니다. 지난 달 13일 중성화된 길고양이 한 마리가 이빨 자국이 난 파란 닭고기와 함께 싸늘하게 죽은 채 발견됐습니다. 경찰이 농림축산검역본부에 닭고기와 고양이 사체 검사를 의뢰한 결과, 파란색 성분의 정체는 ‘쥐약’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렇게 죽은 채 발견된 고양이가 지난 달에는 두 마리, 3월에는 세 마리 발견됐습니다. 그 중 한 마리는 임신한 상태였죠. 동물단체는 임신한 어미의 새끼까지 고려하면 지금껏 1,000마리 넘는 길고양이가 파란 닭고기를 먹고 죽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파란 닭고기와 함께 죽은 채 발견된 길고양이들파란 닭고기와 함께 죽은 채 발견된 길고양이들

10여 년 새 끔찍한 일이 동네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범인은 쉽사리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2008년 당시, 동물보호단체는 한 남성이 차를 끌고 다니며 쥐약 묻힌 닭고기를 뿌리고 다니는 현장을 포착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짓 하지 말라”며 타일러 보고 화도 내 봤지만 남성은 개의치 않았다고 합니다. 3년 전에는 해당 남성을 경찰에 신고도 했지만 당시 문제의 닭고기를 먹고 죽은 고양이 사체를 바로 인근에서 찾지 못해 사건은 ‘혐의 없음’으로 종결됐는데요.

이 남성이 계속해서 이같은 짓을 벌이고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동물보호단체에서도 의심만 할 뿐입니다. 결국 지금은 쥐약을 뿌린 닭고기를 고양이들이 먹기 전에 재빠르게 치우는 것이 동네 주민과 동물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입니다.


■더 교묘해진 범행…“먹고 바로 죽으면 고통이 없다구요? (고통이) 한두 달도 가요.”

사람의 눈을 피해 범행은 더 교묘해졌습니다. 예전에는 닭고기를 그릇째 두는 경우가 잦았지만 지금은 두세 조각씩 뿌려 고양이들이 가져가도록 해 흔적을 찾기 어렵게 했습니다. 또 과거에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파란 닭고기를 살포했다면, 이제는 사람들이 쉽사리 찾을 수 없는 장소에 파란 닭고기를 숨깁니다. 그 가운데는 어린 아이 정도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비좁은 통로도 있었습니다.

기자가 취재할 때에는 오래된 아파트의 쓰레기 투입구에 쥐약 묻은 닭고기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기자가 취재할 때에는 오래된 아파트의 쓰레기 투입구에 쥐약 묻은 닭고기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파란 닭고기를 먹은 고양이가 즉사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요즘 쥐약은 사람이 실수로 먹었을 때 위험할까봐 독성을 낮췄기 때문입니다. “서서히 속이 타서 죽는 거예요. 피를 토하고, 몸을 막 떨어요. 먹고 바로 죽으면 고통이 없잖아요? 어떤 고양이들은 한두 달을 고통스러워하다 죽어요.” 취재 중 만난 동물단체 회원의 설명입니다. 몸이 아프면 숨는 고양이의 습성상, 쥐약을 먹은 고양이는 구석진 곳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고 했습니다. 고양이 사체를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경찰은 수사의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CCTV가 많지 않고, CCTV에는 찍힌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한 가지 단서는 파란색 가루, 쥐약인데요. 인근 다섯 군데 약국 중 한 곳에서 한 달 전 쯤 쥐약을 사간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현재는 약국 CCTV를 확보해 쥐약을 사간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사건 담당자는 밝혔습니다.

지난달 13일 죽은 채 발견된 고양이의 생전 모습지난달 13일 죽은 채 발견된 고양이의 생전 모습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하잖아요. 근데.. 범인을 못 잡을 것 같아요.” 지난달 13일 죽은 고양이를 발견한 주민은 수사 기관과 지자체의 안일한 태도로 10여 년 동안 범인을 잡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번만큼은 범인을 꼭 잡아 엄벌해야 한다며 청와대에 국민청원을 냈습니다.

13년 동안 영문도 모른채 파란 닭고기를 먹고 죽어가야 했던 수많은 고양이들.
과연 이번엔 ‘죽음의 파란 치킨’..고양이 연쇄 독살을 끝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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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13년째 살포되는 ‘죽음의 파란 치킨’
    • 입력 2021-05-05 10:02:39
    • 수정2021-05-05 10:07:13
    취재후·사건후

파란색은 식욕 감퇴에 효과적인 색깔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식욕 억제용’으로 떡볶이와 라면 등 음식에 파란색을 입힌 사진이 누리꾼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죠. 한 번 보시죠?

파란 떡볶이, 파란 라면, 파란 삼겹살... 식욕이 뚝 떨어집니다. 뿐만인가요.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습니다. 파란 치킨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그런데 파란 치킨이, 한 동네에서 10여 년 넘게 발견되고 있다면 어떨까요?


■‘죽음의 파란 치킨’ 행렬


2008년, 대전광역시 대덕구 신탄진 일대에서 파란 닭고기가 처음 발견됐습니다. 파란색 가루가 범벅된 닭고기였죠. 강산이 한 번 변하고 3년이 흐르는 동안 파란 닭고기는 하루도 빠짐없이 동네에서 등장했습니다. 많을 때는 하루에 30군데에서도 발견됐습니다. 형태는 다양했습니다. 파란 가루가 묻은 생닭이나 치킨이 그릇째 놓여지기도 하고 두세 조각씩 뿌려지기도 했습니다.

인간들은 파란색 닭고기를 보고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챕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다르죠. 파란 닭고기를 먹고 죽은 길고양이가 속출했습니다. 지난 달 13일 중성화된 길고양이 한 마리가 이빨 자국이 난 파란 닭고기와 함께 싸늘하게 죽은 채 발견됐습니다. 경찰이 농림축산검역본부에 닭고기와 고양이 사체 검사를 의뢰한 결과, 파란색 성분의 정체는 ‘쥐약’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렇게 죽은 채 발견된 고양이가 지난 달에는 두 마리, 3월에는 세 마리 발견됐습니다. 그 중 한 마리는 임신한 상태였죠. 동물단체는 임신한 어미의 새끼까지 고려하면 지금껏 1,000마리 넘는 길고양이가 파란 닭고기를 먹고 죽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파란 닭고기와 함께 죽은 채 발견된 길고양이들
10여 년 새 끔찍한 일이 동네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범인은 쉽사리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2008년 당시, 동물보호단체는 한 남성이 차를 끌고 다니며 쥐약 묻힌 닭고기를 뿌리고 다니는 현장을 포착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짓 하지 말라”며 타일러 보고 화도 내 봤지만 남성은 개의치 않았다고 합니다. 3년 전에는 해당 남성을 경찰에 신고도 했지만 당시 문제의 닭고기를 먹고 죽은 고양이 사체를 바로 인근에서 찾지 못해 사건은 ‘혐의 없음’으로 종결됐는데요.

이 남성이 계속해서 이같은 짓을 벌이고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동물보호단체에서도 의심만 할 뿐입니다. 결국 지금은 쥐약을 뿌린 닭고기를 고양이들이 먹기 전에 재빠르게 치우는 것이 동네 주민과 동물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입니다.


■더 교묘해진 범행…“먹고 바로 죽으면 고통이 없다구요? (고통이) 한두 달도 가요.”

사람의 눈을 피해 범행은 더 교묘해졌습니다. 예전에는 닭고기를 그릇째 두는 경우가 잦았지만 지금은 두세 조각씩 뿌려 고양이들이 가져가도록 해 흔적을 찾기 어렵게 했습니다. 또 과거에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파란 닭고기를 살포했다면, 이제는 사람들이 쉽사리 찾을 수 없는 장소에 파란 닭고기를 숨깁니다. 그 가운데는 어린 아이 정도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비좁은 통로도 있었습니다.

기자가 취재할 때에는 오래된 아파트의 쓰레기 투입구에 쥐약 묻은 닭고기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파란 닭고기를 먹은 고양이가 즉사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요즘 쥐약은 사람이 실수로 먹었을 때 위험할까봐 독성을 낮췄기 때문입니다. “서서히 속이 타서 죽는 거예요. 피를 토하고, 몸을 막 떨어요. 먹고 바로 죽으면 고통이 없잖아요? 어떤 고양이들은 한두 달을 고통스러워하다 죽어요.” 취재 중 만난 동물단체 회원의 설명입니다. 몸이 아프면 숨는 고양이의 습성상, 쥐약을 먹은 고양이는 구석진 곳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고 했습니다. 고양이 사체를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경찰은 수사의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CCTV가 많지 않고, CCTV에는 찍힌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한 가지 단서는 파란색 가루, 쥐약인데요. 인근 다섯 군데 약국 중 한 곳에서 한 달 전 쯤 쥐약을 사간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현재는 약국 CCTV를 확보해 쥐약을 사간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사건 담당자는 밝혔습니다.

지난달 13일 죽은 채 발견된 고양이의 생전 모습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하잖아요. 근데.. 범인을 못 잡을 것 같아요.” 지난달 13일 죽은 고양이를 발견한 주민은 수사 기관과 지자체의 안일한 태도로 10여 년 동안 범인을 잡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번만큼은 범인을 꼭 잡아 엄벌해야 한다며 청와대에 국민청원을 냈습니다.

13년 동안 영문도 모른채 파란 닭고기를 먹고 죽어가야 했던 수많은 고양이들.
과연 이번엔 ‘죽음의 파란 치킨’..고양이 연쇄 독살을 끝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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