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5월 8일 ‘나치 패망의 날’…아직도 떠도는 나치의 망령

입력 2021.05.08 (07:07) 수정 2021.05.08 (16:15)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5월 8일은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일입니다. 연합국에는 승전일, 독일에는 패전일이자 '나치 패망일'입니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유럽에서만 5천만 명 가깝게 목숨을 잃었고, 이 중 70% 정도가 민간인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로 알려진 600만 명의 유대인 대학살이 자행되기도 했습니다.

이 전쟁은 1945년 4월 30일 나치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 일주일 후 독일이 서방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 무릎 꿇은 독일 총리…기회 닿을 때마다 '반성'

전쟁의 결과로 독일은 분단됐고 서독은 자본주의 진영에 편입돼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며 세계 경제를 이끄는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전범국의 멍에는 쉽게 벗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독일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킨 사람은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였습니다. 동방정책으로 독일 통일의 기틀을 다졌다고 평가받는 브란트 총리는 1970년 12월 폴란드를 방문해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전 세계에 타전된 이 모습은 독일이 진정한 반성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이후 독일의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반성했습니다. 2019년 9월 1일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폴란드 비엘룬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80주년 행사에 참석해 폴란드 국민 앞에서 독일어와 폴란드어로 사과했습니다. 비엘룬은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곳이었습니다.

지난해 나치 패망일 70주년을 맞아 베를린은 5월 8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네오 나치 조직 NSU 조직원 베아테 채페. 자살한 남성 공범 두 명과 10명을 살해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네오 나치 조직 NSU 조직원 베아테 채페. 자살한 남성 공범 두 명과 10명을 살해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 다시 고개 든 나치 망령

이런 독일이 21세기 들어 극우, 이른바 '네오 나치' 세력에 의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2000년부터 2007년 사이 NSU라는 조직이 터키계 이민자 8명을 포함해 10명을 살해했습니다. NSU는 '국가 사회주의 지하당' (Nationalsozialistischer Untergrund), 혹은 '나치 지하당(Nazi Untergrund)'으로 불리는 신나치 테러 조직인데 쾰른 폭탄 테러와 15건의 무장 은행강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난민 문제로 몸살을 앓던 2015년엔 네오 나치 조직이 독일 내 시리아 난민 수용소를 공격해 경찰과 충돌했습니다.

2019년 6월엔 극우 성향의 40대 남성이 독일 집권당 CDU 정치인 발터 뤼프케를 총으로 살해했습니다. 뤼프케는 친난민 정책을 옹호하며 "우리의 가치에 동의하지 않으면 나라를 떠나는 것은 자유”라고 말해 극우의 표적이 돼왔습니다.

같은 해 10월엔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20대 남성이 유대 교회당에 총격을 퍼부어 2명이 숨졌습니다.

지난해 2월 독일 헤센주 하나우에선 43살 남성이 물담배 바 두 곳에서 잇따라 총을 발사해 9명을 살해했습니다. 사망자들의 대부분은 터키계와 쿠르드계였고, 용의자는 "독일이 추방하지 못하고 있는 특정 민족들을 제거한다"는 편지를 남겼습니다.

같은 달 독일 사법당국은 6곳의 이슬람 사원을 목표물로 삼고 기도가 이뤄지는 시간대에 무차별 총기 난사 테러를 모의한 극우 테러리스트 12명을 체포했습니다. 이 중 한 명은 현직 경찰관이었습니다.

2015년 반난민 정서를 등에 업고 등장한 극우 정당 AfD(독일을 위한 대안)는 2017년 총선에서 무려 94명을 연방 하원에 입성시켰습니다. 지난 7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AfD는 11%의 지지율을 보였습니다. 이는 '녹색당'(25%), 현 집권 '기민·기사 연합'(14%) 다음으로 높습니다.

지난해 8월 코로나 방역 반대 시위 당시 연방의회를 공격한 시위대. 이 시위에서 독일제국 깃발이 등장해 충격을 줬다.지난해 8월 코로나 방역 반대 시위 당시 연방의회를 공격한 시위대. 이 시위에서 독일제국 깃발이 등장해 충격을 줬다.

■ 위기를 먹고 자라는 극우…코로나 대유행 이후는?

극단적 세력은 사회의 위기와 혼란 속에 목소리를 키웁니다. 독일에서 극우파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계기가 2015년 난민 사태였듯이 최근엔 코로나 대유행 속에 세력을 확장하는 듯합니다.

지난해 독일이 방역조치를 강화하자 기본권 제한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극우 세력이 주동이 돼 독일 연방의회 앞으로 몰려가 일부는 계단을 점거하기까지 했는데요, 이때 독일제국기가 등장했습니다. 독일이 1914년 1차대전 발발 때부터 나치 정권 초기였던 1935년까지 사용하던 국기입니다.

현재 독일은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 사용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극우파나 네오나치들은 독일제국기를 대신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깃발이 민주주의의 상징인 독일 연방의회 앞에 등장한 겁니다. 독일 사회는 충격을 받았고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우리 심장에 견딜 수 없는 공격을 가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코로나 사태는 아직 진행중이고, 이들은 국가가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는 음모론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위기가 가라앉으면 극우, 네오 나치도 사라질까요? 일정 정도 영향을 주며 주변부에 머물 것이라는 전망도 있지만, 상자 속의 썩은 과일은 곧 주변의 다른 과일까지 썩게 합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특파원 리포트] 5월 8일 ‘나치 패망의 날’…아직도 떠도는 나치의 망령
    • 입력 2021-05-08 07:07:27
    • 수정2021-05-08 16:15:31
    특파원 리포트
5월 8일은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일입니다. 연합국에는 승전일, 독일에는 패전일이자 '나치 패망일'입니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유럽에서만 5천만 명 가깝게 목숨을 잃었고, 이 중 70% 정도가 민간인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로 알려진 600만 명의 유대인 대학살이 자행되기도 했습니다.

이 전쟁은 1945년 4월 30일 나치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 일주일 후 독일이 서방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 무릎 꿇은 독일 총리…기회 닿을 때마다 '반성'

전쟁의 결과로 독일은 분단됐고 서독은 자본주의 진영에 편입돼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며 세계 경제를 이끄는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전범국의 멍에는 쉽게 벗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독일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킨 사람은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였습니다. 동방정책으로 독일 통일의 기틀을 다졌다고 평가받는 브란트 총리는 1970년 12월 폴란드를 방문해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전 세계에 타전된 이 모습은 독일이 진정한 반성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이후 독일의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반성했습니다. 2019년 9월 1일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폴란드 비엘룬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80주년 행사에 참석해 폴란드 국민 앞에서 독일어와 폴란드어로 사과했습니다. 비엘룬은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곳이었습니다.

지난해 나치 패망일 70주년을 맞아 베를린은 5월 8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네오 나치 조직 NSU 조직원 베아테 채페. 자살한 남성 공범 두 명과 10명을 살해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 다시 고개 든 나치 망령

이런 독일이 21세기 들어 극우, 이른바 '네오 나치' 세력에 의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2000년부터 2007년 사이 NSU라는 조직이 터키계 이민자 8명을 포함해 10명을 살해했습니다. NSU는 '국가 사회주의 지하당' (Nationalsozialistischer Untergrund), 혹은 '나치 지하당(Nazi Untergrund)'으로 불리는 신나치 테러 조직인데 쾰른 폭탄 테러와 15건의 무장 은행강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난민 문제로 몸살을 앓던 2015년엔 네오 나치 조직이 독일 내 시리아 난민 수용소를 공격해 경찰과 충돌했습니다.

2019년 6월엔 극우 성향의 40대 남성이 독일 집권당 CDU 정치인 발터 뤼프케를 총으로 살해했습니다. 뤼프케는 친난민 정책을 옹호하며 "우리의 가치에 동의하지 않으면 나라를 떠나는 것은 자유”라고 말해 극우의 표적이 돼왔습니다.

같은 해 10월엔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20대 남성이 유대 교회당에 총격을 퍼부어 2명이 숨졌습니다.

지난해 2월 독일 헤센주 하나우에선 43살 남성이 물담배 바 두 곳에서 잇따라 총을 발사해 9명을 살해했습니다. 사망자들의 대부분은 터키계와 쿠르드계였고, 용의자는 "독일이 추방하지 못하고 있는 특정 민족들을 제거한다"는 편지를 남겼습니다.

같은 달 독일 사법당국은 6곳의 이슬람 사원을 목표물로 삼고 기도가 이뤄지는 시간대에 무차별 총기 난사 테러를 모의한 극우 테러리스트 12명을 체포했습니다. 이 중 한 명은 현직 경찰관이었습니다.

2015년 반난민 정서를 등에 업고 등장한 극우 정당 AfD(독일을 위한 대안)는 2017년 총선에서 무려 94명을 연방 하원에 입성시켰습니다. 지난 7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AfD는 11%의 지지율을 보였습니다. 이는 '녹색당'(25%), 현 집권 '기민·기사 연합'(14%) 다음으로 높습니다.

지난해 8월 코로나 방역 반대 시위 당시 연방의회를 공격한 시위대. 이 시위에서 독일제국 깃발이 등장해 충격을 줬다.
■ 위기를 먹고 자라는 극우…코로나 대유행 이후는?

극단적 세력은 사회의 위기와 혼란 속에 목소리를 키웁니다. 독일에서 극우파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계기가 2015년 난민 사태였듯이 최근엔 코로나 대유행 속에 세력을 확장하는 듯합니다.

지난해 독일이 방역조치를 강화하자 기본권 제한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극우 세력이 주동이 돼 독일 연방의회 앞으로 몰려가 일부는 계단을 점거하기까지 했는데요, 이때 독일제국기가 등장했습니다. 독일이 1914년 1차대전 발발 때부터 나치 정권 초기였던 1935년까지 사용하던 국기입니다.

현재 독일은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 사용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극우파나 네오나치들은 독일제국기를 대신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깃발이 민주주의의 상징인 독일 연방의회 앞에 등장한 겁니다. 독일 사회는 충격을 받았고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우리 심장에 견딜 수 없는 공격을 가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코로나 사태는 아직 진행중이고, 이들은 국가가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는 음모론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위기가 가라앉으면 극우, 네오 나치도 사라질까요? 일정 정도 영향을 주며 주변부에 머물 것이라는 전망도 있지만, 상자 속의 썩은 과일은 곧 주변의 다른 과일까지 썩게 합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