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100주년 맞은 그 청년의 의거

입력 2021.05.11 (09:01) 수정 2021.05.1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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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성지곡 어린이대공원에 설치된 박재혁 의사 동상부산 성지곡 어린이대공원에 설치된 박재혁 의사 동상

“어제 나가사키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거래가 뜻대로 잘 되니 이것이 모두 여러분의 염려 덕택인가 합니다”

“많은 이득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당신 모습을 다시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 中 의거 전 의열단원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일제의 서슬 퍼런 통치하에 있던 1920년 9월 14일, 중국 고서적을 판매하는 상인이 당시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를 찾아옵니다.

하시모토가 평소 고서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는 그 상인은 한 짐이나 되는 책 보따리를 가지고 경찰서를 찾아 보자기에서 고서적을 꺼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돌연, 그 상인은 갑자기 유창한 일본어로 서장을 꾸짖기 시작합니다.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는 것이다!”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둔 둘의 거리는 60cm 남짓. 상인은 보자기 속에 숨겨둔 폭탄을 꺼내 들어 서장을 향해 던집니다. 폭탄으로 치명상을 입은 하시모토 서장은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고, 상인은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게 됐습니다.

그 상인은 바로 의열단원 박재혁 의사였습니다.

■ 박재혁 의사, 27살 젊은 나이로 순국

부산에서 태어나 지금의 개성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재혁 의사는 상해와 싱가포르, 부산을 오가며 무역업을 하다 1920년 상해에서 무장 항일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당시 의열단은 일본 고위 관리 암살 등을 목표로 ‘제1차 국내 기관 총공격’을 계획했지만, 폭탄 반입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 단원 대부분이 검거된 뒤였습니다. 의열단의 신입 단원이었던 그에게 의열단장인 김원봉은 그해 8월 부산경찰서 단독 의거를 지시했습니다.

박재혁 의사가 벌인 이 의거는 ‘의열단 최초의 성공한 거사’로 기록됐습니다.

하지만 박재혁 의사는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 이듬해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 이후 대구 감옥에서 복역 중 단식으로, 사형 집행 전날 27살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했습니다.


■ 3·1 운동 후 침체된 독립운동의 도화선 역할

당시 박재혁 의사의 의거를 모의한 혐의로 10명이 부산경찰서 구치소에 체포됐습니다.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박재혁 의사는 최천택 등 체포된 단원들에게 ‘이 사건을 모른다’고 말하라고 부탁했습니다.

단독 거사임을 끝까지 주장한 그의 용기 덕분에, 단원들은 풀려났고, 이후 독립운동의 주춧돌 역할을 하게 됩니다.

특히 박재혁 의사의 의거는 3.1 독립만세 이후 침체됐던 독립운동에 다시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습니다.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요.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박재혁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 박재혁 의사 의거 100주년…추념회 등 행사 잇따라

하지만 박재혁 의사를 기리는 일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순국해 직계유족이 없다 보니 여동생인 박명진 여사의 손녀가 이 일을 대신 맡아야 했습니다.

이후 부산 동구 좌천동 일원에 박재혁 의사 생가터 표지판을 설치하고, 중구에는 당시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과 관련한 안내판 등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2012년에는 박재혁 의사의 이름을 딴 ‘박재혁 거리’를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박재혁 의사의 동상도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거사 장소와 동떨어진 부산 어린이대공원에 위치해 시민들이 동상의 의미를 되새기기 힘들다는 반응이 나왔는데요, 기념사업회는 부산보훈처와 동구청과 협의해 시민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동구 좌천동 일원으로 옮기는 방안을 추진 중입니다.

또 의거 100주년을 맞아 오늘(11일) 부산 어린이대공원에서 추념식을 하고, 내일(12일)은 박재혁 의사의 의거에 대한 의미와 학술적 의미를 되새기는 회의도 개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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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5-11 09:01:38
    • 수정2021-05-11 17:27:18
    취재K
부산 성지곡 어린이대공원에 설치된 박재혁 의사 동상
“어제 나가사키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거래가 뜻대로 잘 되니 이것이 모두 여러분의 염려 덕택인가 합니다”

“많은 이득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당신 모습을 다시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 中 의거 전 의열단원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일제의 서슬 퍼런 통치하에 있던 1920년 9월 14일, 중국 고서적을 판매하는 상인이 당시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를 찾아옵니다.

하시모토가 평소 고서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다는 그 상인은 한 짐이나 되는 책 보따리를 가지고 경찰서를 찾아 보자기에서 고서적을 꺼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돌연, 그 상인은 갑자기 유창한 일본어로 서장을 꾸짖기 시작합니다.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는 것이다!”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둔 둘의 거리는 60cm 남짓. 상인은 보자기 속에 숨겨둔 폭탄을 꺼내 들어 서장을 향해 던집니다. 폭탄으로 치명상을 입은 하시모토 서장은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고, 상인은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게 됐습니다.

그 상인은 바로 의열단원 박재혁 의사였습니다.

■ 박재혁 의사, 27살 젊은 나이로 순국

부산에서 태어나 지금의 개성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재혁 의사는 상해와 싱가포르, 부산을 오가며 무역업을 하다 1920년 상해에서 무장 항일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습니다.

당시 의열단은 일본 고위 관리 암살 등을 목표로 ‘제1차 국내 기관 총공격’을 계획했지만, 폭탄 반입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 단원 대부분이 검거된 뒤였습니다. 의열단의 신입 단원이었던 그에게 의열단장인 김원봉은 그해 8월 부산경찰서 단독 의거를 지시했습니다.

박재혁 의사가 벌인 이 의거는 ‘의열단 최초의 성공한 거사’로 기록됐습니다.

하지만 박재혁 의사는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 이듬해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 이후 대구 감옥에서 복역 중 단식으로, 사형 집행 전날 27살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했습니다.


■ 3·1 운동 후 침체된 독립운동의 도화선 역할

당시 박재혁 의사의 의거를 모의한 혐의로 10명이 부산경찰서 구치소에 체포됐습니다.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박재혁 의사는 최천택 등 체포된 단원들에게 ‘이 사건을 모른다’고 말하라고 부탁했습니다.

단독 거사임을 끝까지 주장한 그의 용기 덕분에, 단원들은 풀려났고, 이후 독립운동의 주춧돌 역할을 하게 됩니다.

특히 박재혁 의사의 의거는 3.1 독립만세 이후 침체됐던 독립운동에 다시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습니다.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는데요.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박재혁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 박재혁 의사 의거 100주년…추념회 등 행사 잇따라

하지만 박재혁 의사를 기리는 일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순국해 직계유족이 없다 보니 여동생인 박명진 여사의 손녀가 이 일을 대신 맡아야 했습니다.

이후 부산 동구 좌천동 일원에 박재혁 의사 생가터 표지판을 설치하고, 중구에는 당시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과 관련한 안내판 등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2012년에는 박재혁 의사의 이름을 딴 ‘박재혁 거리’를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박재혁 의사의 동상도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거사 장소와 동떨어진 부산 어린이대공원에 위치해 시민들이 동상의 의미를 되새기기 힘들다는 반응이 나왔는데요, 기념사업회는 부산보훈처와 동구청과 협의해 시민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동구 좌천동 일원으로 옮기는 방안을 추진 중입니다.

또 의거 100주년을 맞아 오늘(11일) 부산 어린이대공원에서 추념식을 하고, 내일(12일)은 박재혁 의사의 의거에 대한 의미와 학술적 의미를 되새기는 회의도 개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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