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춤꾼 이애주, 그리고 백기완, 이한열

입력 2021.05.11 (09:06) 수정 2021.05.11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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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백기완 선생 (가운데)이애주 교수 (우)이한열 열사(좌)백기완 선생 (가운데)이애주 교수 (우)이한열 열사
■ 이애주 교수와 백기완 선생의 인연

1987년 12월 3일 KBS 스튜디오 부조정실에서 제13대 대통령 선거연설 방송 녹화가 진행됐습니다. 스튜디오에는 노란색 한복 상의에 파란색 치마를 입은 여성이 나와 있었습니다. 무소속 백기완 후보 지지 연설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연설원은 바로 서울대 사범대 체육학과 교수인 춤꾼 이애주(1947~2021)였습니다. 이 연설은 1987년 12월 4일 밤 10시 50분 KBS2TV를 통해 방송됐습니다.

1987년 12월 3일 KBS스튜디오에서 이애주 교수가 무소속 대통령 후보 백기완 선생 지지연설을 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 ⓒ KBS

이애주 교수와 백기완 선생의 인연은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1987년 11월 23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후보 등록 마감일, 백기완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이 무소속으로 대통령 후보 등록을 합니다. 마감 시한인 오후 5시에 맞춰 후보자 대리인 자격으로 중앙선관위에 등록을 하러 온 사람도 이애주 교수였습니다. 이 교수는 백기완 선생 대통령 후보 임시추대위원회 위원장이었습니다.

한겨레신문, 1988년 5월 15일한겨레신문, 1988년 5월 15일
이애주 교수와 백기완 선생은 이후 한겨레신문 창간호인 1988년 5월 15일자에 함께 펴낸 책 광고도 실었습니다. 22면에 실린 <가자, 민중의 시대로>라는 책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올해 들어, 백기완 선생이 2월 15일, 이애주 교수가 5월 10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KBS뉴스9,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 영결식에서 춤을 추는 이애주 교수 ⓒ KBS

■ 이한열 열사 영결식 ·49재에 '거리춤' 선보여

이애주 교수 하면 더 유명한 건 이른바 '거리춤'입니다. 시국 현장마다 어김없이 등장해 이른바 '시국춤'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요,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이 열리던 1987년 7월 9일, 이 교수는 이 열사가 쓰러진 연세대 정문 앞에서 처절한 몸짓으로 젊은 영혼을 위로하는 춤을 추어 큰 감동을 줬습니다.

이 교수는 당시 어떤 심경이었을까요? 동아일보에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불행한 현장에서 조금이라도 한열이의 영혼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전 민중의 힘과 의지로 되살아남을 보이고자 며칠 밤을 꼬박 세우며 구상했어요."(동아일보, 1987년 7월 13일)

이 교수는 같은 해 8월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49재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한 춤사위를 선보였습니다. 백 마디 말보다 무언의 몸짓이 훨씬 강렬하다는 사실을 아래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87년 8월 22일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49재에서 '한판춤 바람맞이’ 공연을 펼치고 있는 이애주 교수 ⓒ KBS

평생 춤을 춰 온 이애주 교수는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됐습니다. 전통춤의 태두 한성준(1875~1941)과 그의 수제자 한영숙(1920~1989)으로 이어진 승무의 맥을 이어온 정통 '춤꾼' 입니다. 하지만 그냥 춤꾼만은 아니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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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5-11 09:06:28
    • 수정2021-05-11 17:2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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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백기완 선생 (가운데)이애주 교수 (우)이한열 열사 ■ 이애주 교수와 백기완 선생의 인연

1987년 12월 3일 KBS 스튜디오 부조정실에서 제13대 대통령 선거연설 방송 녹화가 진행됐습니다. 스튜디오에는 노란색 한복 상의에 파란색 치마를 입은 여성이 나와 있었습니다. 무소속 백기완 후보 지지 연설을 하기 위해서였는데 연설원은 바로 서울대 사범대 체육학과 교수인 춤꾼 이애주(1947~2021)였습니다. 이 연설은 1987년 12월 4일 밤 10시 50분 KBS2TV를 통해 방송됐습니다.

1987년 12월 3일 KBS스튜디오에서 이애주 교수가 무소속 대통령 후보 백기완 선생 지지연설을 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 ⓒ KBS

이애주 교수와 백기완 선생의 인연은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1987년 11월 23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후보 등록 마감일, 백기완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이 무소속으로 대통령 후보 등록을 합니다. 마감 시한인 오후 5시에 맞춰 후보자 대리인 자격으로 중앙선관위에 등록을 하러 온 사람도 이애주 교수였습니다. 이 교수는 백기완 선생 대통령 후보 임시추대위원회 위원장이었습니다.

한겨레신문, 1988년 5월 15일이애주 교수와 백기완 선생은 이후 한겨레신문 창간호인 1988년 5월 15일자에 함께 펴낸 책 광고도 실었습니다. 22면에 실린 <가자, 민중의 시대로>라는 책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올해 들어, 백기완 선생이 2월 15일, 이애주 교수가 5월 10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KBS뉴스9,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 영결식에서 춤을 추는 이애주 교수 ⓒ KBS

■ 이한열 열사 영결식 ·49재에 '거리춤' 선보여

이애주 교수 하면 더 유명한 건 이른바 '거리춤'입니다. 시국 현장마다 어김없이 등장해 이른바 '시국춤'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요,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이한열 열사의 영결식이 열리던 1987년 7월 9일, 이 교수는 이 열사가 쓰러진 연세대 정문 앞에서 처절한 몸짓으로 젊은 영혼을 위로하는 춤을 추어 큰 감동을 줬습니다.

이 교수는 당시 어떤 심경이었을까요? 동아일보에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불행한 현장에서 조금이라도 한열이의 영혼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전 민중의 힘과 의지로 되살아남을 보이고자 며칠 밤을 꼬박 세우며 구상했어요."(동아일보, 1987년 7월 13일)

이 교수는 같은 해 8월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49재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한 춤사위를 선보였습니다. 백 마디 말보다 무언의 몸짓이 훨씬 강렬하다는 사실을 아래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87년 8월 22일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49재에서 '한판춤 바람맞이’ 공연을 펼치고 있는 이애주 교수 ⓒ KBS

평생 춤을 춰 온 이애주 교수는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됐습니다. 전통춤의 태두 한성준(1875~1941)과 그의 수제자 한영숙(1920~1989)으로 이어진 승무의 맥을 이어온 정통 '춤꾼' 입니다. 하지만 그냥 춤꾼만은 아니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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