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쥐날 때까지 서명만…” 끔찍한 중고차 사기에 극단선택

입력 2021.05.12 (07:00) 수정 2021.05.12 (15:46)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지난 2월 24일. 충북 제천의 한 마을에서 60대 남성 A 씨가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단순 변사로 끝맺을 것 같았던 이 사건은 이내 다른 국면을 맞았습니다. A 씨의 유품인 휴대전화에서 유서가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유서에는 중고차를 사려다가 사기를 당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형사님들!
나는 사기, 폭력으로 인해 죽음을 당합니다, 나의 금융 사정을 철저히 조사하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1년 2월 5일 아침 인천터미널 가는 11시 버스로 갔는데 점심도 못 먹고 오후 8시까지 붙잡혀 있었습니다.


1톤 트럭 다 썩은 거 강제로 대출받아 산 겁니다, 강제로 말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에도 싸인을 많이 했습니다. 아마 싸인을 백번 이상 한 것 같습니다.
손가락에 쥐가 왔으니까요.
(중략)

온몸에 문신을 한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싸인을 하라 해서 여기저기 엄청나게 싸인을 했습니다.
(후략)

-60대 피해자 A 씨의 유서 중에서

가족들은 A 씨가 평소 중고차 사기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A 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건 분명 중고차 사기 때문일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형편이 어렵고 마땅한 거처가 없어 마을 공동시설에 세 들어 살았지만, 동생들과 홀어머니를 부양할 정도로 성실했다는 겁니다. A 씨의 사촌 동생 B 씨는 "일을 하기 위해 그 차가 필요해서 사러 간 건데 그렇게 돈을 강탈당하고 엉뚱한 차를 강매 당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조사 결과 A 씨의 주장은 대부분 사실이었습니다.

판매업체는 차를 싸게 판다고 A 씨를 속인 뒤 시가 200만 원짜리 차를 700만 원에 팔았습니다. A 씨가 돈이 없다고 하자 8시간 동안 감금하고 강제로 대출까지 받게 했습니다.

청주에 사는 50대 B 씨도 지난달 이 업체에서 시세의 2배 값에 차를 샀습니다. 중고차 판매상이 '팔려던 차가 갑자기 고장났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차가 급발진 하는 영상까지 보여줬다고 말합니다.

"사무실 바로 앞 교차로를 찍은 영상이었어요. 운전자가 '이 차 왜 이래? 이 차 왜 이래?' 이러더니만 (기둥에) 꽝 박는 (영상을) 보여주더라고요. 급제동 하고 급출발 하는데 그걸 어떻게 가져와요. 가족들이 타야 하는데…."

-50대 피해자 B씨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A 씨가 휴대전화에 남긴 연락처와 통화기록 등을 토대로 중고차 판매상을 역추적했습니다. 결국 지난 4월 인천의 사무실과 콜센터 등 5곳을 압수수색한 끝에 20대 총책 등 4명을 구속하고, 중고차 판매상 등 22명을 불구속 입건했습니다.


경찰이 밝혀낸 범행 수법은 이렇습니다.

1. 온라인 사이트에 저렴한 가격의 상태 좋은 중고차 매물을 올려 구매자가 전화로 문의하도록 유도한다.
2. 구매자가 전화하면 콜센터 직원은 구매자를 인천으로 오도록 유도하고, 허위 중고차 딜러에게 배정한다.
3. 구매자가 경로를 이탈하지 않도록 버스표나 기차표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도록 하고 인근에 도착하면 차에 태워 데려온다.
4. 온라인에서 본 매물은 출고를 위해 점검 중이라고 말하고, 인근 중고차 매매상에서 해당 매물과 같은 기종의 차량을 보여준다.
5. 구매자에게 차량 출고비용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받고, 대출 실행 서류를 작성하도록 한다.
6. 구매자가 사려고 했던 차에 문제가 생겨서 출고가 불가능하거나 출고하더라도 매달 수백만 원의 점검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말한다.
7. 원 계약을 해제하려고 하면 약관을 이유로 출고비용 환불은 물론 대출 취소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8. 원래 구매하려 했던 차보다 성능이 좋지 않은 차량을 시세보다 더 비싼 가격에 제시한다.
9. 구매자가 따지면 문신을 보여주거나 차에 태워 내려주지 않는 등의 방식으로 위협한다.
10. 구매자가 지쳐 구매 의사를 밝히면 새로운 대출 서류를 작성하도록 하고 차를 출고해 돌려보낸다.



일반적인 중고차 사기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수법이지만, 경찰은 이번 중고차 사기가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총책과 전화상담원, 허위 딜러, 손님 위협 등으로 역할을 분담해 범행했다는 겁니다.

지난해 대법원은 조직적으로 허위매물 사기를 저지른 중고차 판매조직은 '범죄집단'이라는 대법원 판결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당시 대법원은 조직의 외부사무실에 근무한 직원들의 수, 직책 및 역할 분담, 범행수법, 수익분배 구조 등에 비추어 볼 때 형법상 '범죄를 목적으로 한 집단'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경찰은 이밖에 이 사건에 연루된 할부 대행사도 피해를 키운 만큼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습니다. 차 매매대금을 할부로 바꿔주는 대출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할부 대행사가 사기를 방조했다는 판단입니다.

경찰은 현재까지 피해자 50명에 6억여 원의 피해가 밝혀졌지만, 추가 피해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손에 쥐날 때까지 서명만…” 끔찍한 중고차 사기에 극단선택
    • 입력 2021-05-12 07:00:38
    • 수정2021-05-12 15:46:51
    취재K

지난 2월 24일. 충북 제천의 한 마을에서 60대 남성 A 씨가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단순 변사로 끝맺을 것 같았던 이 사건은 이내 다른 국면을 맞았습니다. A 씨의 유품인 휴대전화에서 유서가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유서에는 중고차를 사려다가 사기를 당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형사님들!
나는 사기, 폭력으로 인해 죽음을 당합니다, 나의 금융 사정을 철저히 조사하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1년 2월 5일 아침 인천터미널 가는 11시 버스로 갔는데 점심도 못 먹고 오후 8시까지 붙잡혀 있었습니다.


1톤 트럭 다 썩은 거 강제로 대출받아 산 겁니다, 강제로 말입니다.


그리고 다른 것에도 싸인을 많이 했습니다. 아마 싸인을 백번 이상 한 것 같습니다.
손가락에 쥐가 왔으니까요.
(중략)

온몸에 문신을 한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싸인을 하라 해서 여기저기 엄청나게 싸인을 했습니다.
(후략)

-60대 피해자 A 씨의 유서 중에서

가족들은 A 씨가 평소 중고차 사기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A 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건 분명 중고차 사기 때문일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형편이 어렵고 마땅한 거처가 없어 마을 공동시설에 세 들어 살았지만, 동생들과 홀어머니를 부양할 정도로 성실했다는 겁니다. A 씨의 사촌 동생 B 씨는 "일을 하기 위해 그 차가 필요해서 사러 간 건데 그렇게 돈을 강탈당하고 엉뚱한 차를 강매 당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조사 결과 A 씨의 주장은 대부분 사실이었습니다.

판매업체는 차를 싸게 판다고 A 씨를 속인 뒤 시가 200만 원짜리 차를 700만 원에 팔았습니다. A 씨가 돈이 없다고 하자 8시간 동안 감금하고 강제로 대출까지 받게 했습니다.

청주에 사는 50대 B 씨도 지난달 이 업체에서 시세의 2배 값에 차를 샀습니다. 중고차 판매상이 '팔려던 차가 갑자기 고장났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차가 급발진 하는 영상까지 보여줬다고 말합니다.

"사무실 바로 앞 교차로를 찍은 영상이었어요. 운전자가 '이 차 왜 이래? 이 차 왜 이래?' 이러더니만 (기둥에) 꽝 박는 (영상을) 보여주더라고요. 급제동 하고 급출발 하는데 그걸 어떻게 가져와요. 가족들이 타야 하는데…."

-50대 피해자 B씨

수사에 착수한 경찰은 A 씨가 휴대전화에 남긴 연락처와 통화기록 등을 토대로 중고차 판매상을 역추적했습니다. 결국 지난 4월 인천의 사무실과 콜센터 등 5곳을 압수수색한 끝에 20대 총책 등 4명을 구속하고, 중고차 판매상 등 22명을 불구속 입건했습니다.


경찰이 밝혀낸 범행 수법은 이렇습니다.

1. 온라인 사이트에 저렴한 가격의 상태 좋은 중고차 매물을 올려 구매자가 전화로 문의하도록 유도한다.
2. 구매자가 전화하면 콜센터 직원은 구매자를 인천으로 오도록 유도하고, 허위 중고차 딜러에게 배정한다.
3. 구매자가 경로를 이탈하지 않도록 버스표나 기차표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도록 하고 인근에 도착하면 차에 태워 데려온다.
4. 온라인에서 본 매물은 출고를 위해 점검 중이라고 말하고, 인근 중고차 매매상에서 해당 매물과 같은 기종의 차량을 보여준다.
5. 구매자에게 차량 출고비용 명목으로 일정 금액을 받고, 대출 실행 서류를 작성하도록 한다.
6. 구매자가 사려고 했던 차에 문제가 생겨서 출고가 불가능하거나 출고하더라도 매달 수백만 원의 점검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말한다.
7. 원 계약을 해제하려고 하면 약관을 이유로 출고비용 환불은 물론 대출 취소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8. 원래 구매하려 했던 차보다 성능이 좋지 않은 차량을 시세보다 더 비싼 가격에 제시한다.
9. 구매자가 따지면 문신을 보여주거나 차에 태워 내려주지 않는 등의 방식으로 위협한다.
10. 구매자가 지쳐 구매 의사를 밝히면 새로운 대출 서류를 작성하도록 하고 차를 출고해 돌려보낸다.



일반적인 중고차 사기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수법이지만, 경찰은 이번 중고차 사기가 조직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총책과 전화상담원, 허위 딜러, 손님 위협 등으로 역할을 분담해 범행했다는 겁니다.

지난해 대법원은 조직적으로 허위매물 사기를 저지른 중고차 판매조직은 '범죄집단'이라는 대법원 판결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당시 대법원은 조직의 외부사무실에 근무한 직원들의 수, 직책 및 역할 분담, 범행수법, 수익분배 구조 등에 비추어 볼 때 형법상 '범죄를 목적으로 한 집단'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경찰은 이밖에 이 사건에 연루된 할부 대행사도 피해를 키운 만큼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습니다. 차 매매대금을 할부로 바꿔주는 대출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할부 대행사가 사기를 방조했다는 판단입니다.

경찰은 현재까지 피해자 50명에 6억여 원의 피해가 밝혀졌지만, 추가 피해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