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장마는 잊어라”…더 길고 흉포해진 ‘장마의 변신’

입력 2021.05.1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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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오뉴월 장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음력으로 5, 6월, 그러니까 양력 6월과 7월에 우리나라는 장마철에 접어들고 많은 비가 내리는데요. 보통 6월 20일을 전후해 제주도부터 시작된 뒤 한 달 남짓 장맛비가 이어지곤 합니다.

장마는 정체전선의 영향으로 비가 자주 오는 시기를 의미하는데, 열대 지방의 '우기'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삼국사기나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역사서에도 장맛비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여름 장마와 가을장마로 민가가 떠내려가거나 압록강의 물이 넘쳐 병선이 표류했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장마에 대한 과거 기록들은 주로 음력 5, 6, 7월에 집중돼 있었는데, 이 시기에 찾아오는 장마가 그만큼 오랜 세월 동안 우리와 함께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랬던 장마가 요즘,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더 길고, 더 흉포해진 것이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무한 변신 중인 요즘 장마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 과거 장마 = 한 달 정도 내리는 '지루한 비'

먼저, 과거의 장마를 살펴봐야겠습니다.

"밭에서 완두를 거두어들이고 난 바로 그 이튿날부터 시작된 비가 며칠이고 계속해서 내렸다. 비는 분말처럼 몽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보꾹이라도 뚫고 쏟아져 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 장마(1973년, 윤흥길 作) 中

1970년대 대표적인 전후세대 작가였던 윤흥길의 소설 '장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맛비가 내립니다. 며칠이고 계속되는 비, 칠흑의 밤을 물걸레처럼 적시는 비는 6·25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 비극을 고조시킵니다. 결국, 모든 갈등이 마무리되고 극적인 화해가 이뤄지는 순간 소설 속 장마는 끝이 납니다.

장마의 일반적 정의는 '여름철 오랜 기간 지속되는 비'인데요. 과거의 장마는 소설 속 풍경처럼 비가 한 달 정도 지속됐습니다. 우리나라 북동쪽에는 오호츠크 해 고기압, 남동쪽에는 북태평양 고기압이 위치한 가운데 그 경계에 정체전선(장마전선)이 발달해 비를 몰고 왔습니다. 성질이 다른 두 공기 덩어리가 맞부딪치면 정체전선 상에 강한 비구름이 생성됩니다.


정체전선은 제주와 남부지방에 머물다가 중부지방까지 북상하는 등 보통 남북을 오르락내리락합니다. 또 어느 해에는 장마가 시작됐는데 중부지방에서는 비가 안 오는 '반쪽 장마'가 이어지기도 하는데요.

장마의 패턴은 해마다 조금씩 달라도 보통은 7월 20~25일 정도면 끝났습니다. 남쪽 북태평양 고기압이 한반도 전체로 확장하면서 정체전선이 북쪽으로 밀려나고 길었던 장마가 끝나는 것이 공식이었습니다.

■ 지난해 기록적인 장맛비, '변신 예고'


하지만 지난해 장마에 대한 모든 '공식'이 깨졌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의 경우, 6월 24일에 장마철에 접어들어 8월 16일까지 무려 54일 동안 계속된 장맛비가 그렇습니다. '지루한 장맛비'라는 과거 공식 대신 시간당 100mm 안팎의 '흉포한 폭우'를 몰고 왔습니다.

오늘(17일) 기상청은 지난여름 장마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우진규 기상청 예보분석관은 지난 장마철의 경우 남쪽에 확장한 북태평양 고기압은 과거와 변함이 없었지만, 이와 맞서는 북쪽의 '상대'가 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지난 장마 때 기록적인 비구름을 만든 주범은 전통적으로 알고 있던 '북쪽 오호츠크 해 고기압'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한반도를 통과한 '저기압'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 지난해 기록적인 '최장 장마', 원인은?

지난여름 장마철 기압 배치 /출처: 기상청지난여름 장마철 기압 배치 /출처: 기상청

지난해 장마 초반(6.23~7.28)의 기압계를 분석해보면 저기압이 우리나라를 지날 때마다 남쪽에 위치한 정체전선을 끌어올렸고, 엄청난 폭우를 몰고 왔습니다. 위 그림(왼쪽)을 보면 저기압이 동반된 정체전선 상에 한반도가 뒤덮일 만큼 거대한 구름대가 발달한 걸 확인할 수 있는데요.

저기압이 서쪽에서 건조한 공기를 몰고 오면서 남쪽 북태평양 고기압과 경계면에 폭우를 퍼부은 겁니다. 마치 도깨비처럼 비구름이 움직였고 경기와 충청, 남부, 강원 등지에 시간당 100mm를 넘나드는 집중호우가 쏟아졌습니다. 차고 더운 공기 사이의 '온도' 차이뿐만 아니라 '습도' 차이에 의해서도 강한 비구름이 발달하기 때문입니다.

저기압을 동반한 장마전선은 전통적인 장마처럼 비를 길게 뿌리지는 않았습니다. 저기압이 빠르게 동쪽으로 이동하며 폭발적으로 비를 쏟아부은 뒤 우리나라를 빠져나갔고 정체전선도 남하하는 형태를 보였는데, 장마철 초반에 이런 패턴이 반복됐습니다.


반면 지난 장마 중, 후반을 보면(위 그림 오른쪽) 전통적인 장마철에 발달한 비구름의 형태였습니다. 남쪽 북태평양 고기압과 북쪽 차고 건조한 공기 사이에 동서 방향 구름대가 발달했는데요. 장마철 전반의 길쭉하게 서 있는 비구름대가 아닌, 가로 방향의 구름대였습니다.

정리하자면, 장마는 초반과 중·후반, 그러니까 시기에 따라 얼굴을 달리하며 우리나라에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 '고차 방정식'만큼 어려워진 장마 예측

지난해 극한 장마는 말 그대로 양극화된 패턴을 보였습니다. 저기압과 '콜라보'한 남북 방향의 비구름대, 중부지방에 정체한 가운데 끝이 보이지 않게 비를 뿌리던 동서 방향의 비구름대 모두 위협적이었습니다. 우진규 예보분석관은 장마의 형태가 최근 들어 더욱 예측불허로 변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과거 장마가 북태평양 고기압과 오호츠크 해 고기압이라는 '2가지 변수'로 이뤄진 방정식이라면, 최근 장마는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는 '고차 방정식'입니다.

실제로 지난해, 건조한 공기를 몰고 오는 저기압뿐만 아니라, 티베트 고원에 발달하는 뜨겁고 건조한 대륙 고기압, 열대 몬순의 덥고 습한 공기, 여기에 북극까지 장마의 '정체성'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기상청의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장마 예측은 마치 '고차 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것처럼 어려워진 게 사실입니다. 매년 체감할 수 있지만, 마른장마에서, 역대 최장 장마로 롤러코스터를 타듯 변동성도 커졌습니다.

장마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면서 지난 주말부터 이어진 비가 장마 아니냐는 궁금증도 있지만, 기상청은 공식적으로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장마에 접어들면 비가 오랜 기간 이어지고 습도 때문에 불쾌지수도 높아지는데요. 이번처럼 저기압이 통과하며 내리는 비는 강수의 지속 시간이 짧고 비가 내릴 때 선선합니다.

평년대로라면 장마까지는 한 달 정도 남았습니다. 매일 밤잠 못 들게 하는 열대야도 머지않았습니다. 동시에 올여름 장마와 태풍, 폭염 등 재난에 대한 대비를 서둘러야겠습니다. 올해는 장마가 어떤 얼굴로 변신해 우리나라를 방문할지 모를 일이니까요.

[연관 기사] 마른장마, 지각 장마…‘돌연변이 장마’ 이유는?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4235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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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거 장마는 잊어라”…더 길고 흉포해진 ‘장마의 변신’
    • 입력 2021-05-17 16:45:15
    취재K

예로부터 '오뉴월 장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음력으로 5, 6월, 그러니까 양력 6월과 7월에 우리나라는 장마철에 접어들고 많은 비가 내리는데요. 보통 6월 20일을 전후해 제주도부터 시작된 뒤 한 달 남짓 장맛비가 이어지곤 합니다.

장마는 정체전선의 영향으로 비가 자주 오는 시기를 의미하는데, 열대 지방의 '우기'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삼국사기나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역사서에도 장맛비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여름 장마와 가을장마로 민가가 떠내려가거나 압록강의 물이 넘쳐 병선이 표류했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장마에 대한 과거 기록들은 주로 음력 5, 6, 7월에 집중돼 있었는데, 이 시기에 찾아오는 장마가 그만큼 오랜 세월 동안 우리와 함께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랬던 장마가 요즘, 달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더 길고, 더 흉포해진 것이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무한 변신 중인 요즘 장마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 과거 장마 = 한 달 정도 내리는 '지루한 비'

먼저, 과거의 장마를 살펴봐야겠습니다.

"밭에서 완두를 거두어들이고 난 바로 그 이튿날부터 시작된 비가 며칠이고 계속해서 내렸다. 비는 분말처럼 몽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보꾹이라도 뚫고 쏟아져 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 장마(1973년, 윤흥길 作) 中

1970년대 대표적인 전후세대 작가였던 윤흥길의 소설 '장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장맛비가 내립니다. 며칠이고 계속되는 비, 칠흑의 밤을 물걸레처럼 적시는 비는 6·25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불안과 공포, 비극을 고조시킵니다. 결국, 모든 갈등이 마무리되고 극적인 화해가 이뤄지는 순간 소설 속 장마는 끝이 납니다.

장마의 일반적 정의는 '여름철 오랜 기간 지속되는 비'인데요. 과거의 장마는 소설 속 풍경처럼 비가 한 달 정도 지속됐습니다. 우리나라 북동쪽에는 오호츠크 해 고기압, 남동쪽에는 북태평양 고기압이 위치한 가운데 그 경계에 정체전선(장마전선)이 발달해 비를 몰고 왔습니다. 성질이 다른 두 공기 덩어리가 맞부딪치면 정체전선 상에 강한 비구름이 생성됩니다.


정체전선은 제주와 남부지방에 머물다가 중부지방까지 북상하는 등 보통 남북을 오르락내리락합니다. 또 어느 해에는 장마가 시작됐는데 중부지방에서는 비가 안 오는 '반쪽 장마'가 이어지기도 하는데요.

장마의 패턴은 해마다 조금씩 달라도 보통은 7월 20~25일 정도면 끝났습니다. 남쪽 북태평양 고기압이 한반도 전체로 확장하면서 정체전선이 북쪽으로 밀려나고 길었던 장마가 끝나는 것이 공식이었습니다.

■ 지난해 기록적인 장맛비, '변신 예고'


하지만 지난해 장마에 대한 모든 '공식'이 깨졌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의 경우, 6월 24일에 장마철에 접어들어 8월 16일까지 무려 54일 동안 계속된 장맛비가 그렇습니다. '지루한 장맛비'라는 과거 공식 대신 시간당 100mm 안팎의 '흉포한 폭우'를 몰고 왔습니다.

오늘(17일) 기상청은 지난여름 장마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우진규 기상청 예보분석관은 지난 장마철의 경우 남쪽에 확장한 북태평양 고기압은 과거와 변함이 없었지만, 이와 맞서는 북쪽의 '상대'가 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지난 장마 때 기록적인 비구름을 만든 주범은 전통적으로 알고 있던 '북쪽 오호츠크 해 고기압'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한반도를 통과한 '저기압'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 지난해 기록적인 '최장 장마', 원인은?

지난여름 장마철 기압 배치 /출처: 기상청
지난해 장마 초반(6.23~7.28)의 기압계를 분석해보면 저기압이 우리나라를 지날 때마다 남쪽에 위치한 정체전선을 끌어올렸고, 엄청난 폭우를 몰고 왔습니다. 위 그림(왼쪽)을 보면 저기압이 동반된 정체전선 상에 한반도가 뒤덮일 만큼 거대한 구름대가 발달한 걸 확인할 수 있는데요.

저기압이 서쪽에서 건조한 공기를 몰고 오면서 남쪽 북태평양 고기압과 경계면에 폭우를 퍼부은 겁니다. 마치 도깨비처럼 비구름이 움직였고 경기와 충청, 남부, 강원 등지에 시간당 100mm를 넘나드는 집중호우가 쏟아졌습니다. 차고 더운 공기 사이의 '온도' 차이뿐만 아니라 '습도' 차이에 의해서도 강한 비구름이 발달하기 때문입니다.

저기압을 동반한 장마전선은 전통적인 장마처럼 비를 길게 뿌리지는 않았습니다. 저기압이 빠르게 동쪽으로 이동하며 폭발적으로 비를 쏟아부은 뒤 우리나라를 빠져나갔고 정체전선도 남하하는 형태를 보였는데, 장마철 초반에 이런 패턴이 반복됐습니다.


반면 지난 장마 중, 후반을 보면(위 그림 오른쪽) 전통적인 장마철에 발달한 비구름의 형태였습니다. 남쪽 북태평양 고기압과 북쪽 차고 건조한 공기 사이에 동서 방향 구름대가 발달했는데요. 장마철 전반의 길쭉하게 서 있는 비구름대가 아닌, 가로 방향의 구름대였습니다.

정리하자면, 장마는 초반과 중·후반, 그러니까 시기에 따라 얼굴을 달리하며 우리나라에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 '고차 방정식'만큼 어려워진 장마 예측

지난해 극한 장마는 말 그대로 양극화된 패턴을 보였습니다. 저기압과 '콜라보'한 남북 방향의 비구름대, 중부지방에 정체한 가운데 끝이 보이지 않게 비를 뿌리던 동서 방향의 비구름대 모두 위협적이었습니다. 우진규 예보분석관은 장마의 형태가 최근 들어 더욱 예측불허로 변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과거 장마가 북태평양 고기압과 오호츠크 해 고기압이라는 '2가지 변수'로 이뤄진 방정식이라면, 최근 장마는 '다양한 변수'가 작용하는 '고차 방정식'입니다.

실제로 지난해, 건조한 공기를 몰고 오는 저기압뿐만 아니라, 티베트 고원에 발달하는 뜨겁고 건조한 대륙 고기압, 열대 몬순의 덥고 습한 공기, 여기에 북극까지 장마의 '정체성'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기상청의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장마 예측은 마치 '고차 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것처럼 어려워진 게 사실입니다. 매년 체감할 수 있지만, 마른장마에서, 역대 최장 장마로 롤러코스터를 타듯 변동성도 커졌습니다.

장마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지면서 지난 주말부터 이어진 비가 장마 아니냐는 궁금증도 있지만, 기상청은 공식적으로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장마에 접어들면 비가 오랜 기간 이어지고 습도 때문에 불쾌지수도 높아지는데요. 이번처럼 저기압이 통과하며 내리는 비는 강수의 지속 시간이 짧고 비가 내릴 때 선선합니다.

평년대로라면 장마까지는 한 달 정도 남았습니다. 매일 밤잠 못 들게 하는 열대야도 머지않았습니다. 동시에 올여름 장마와 태풍, 폭염 등 재난에 대한 대비를 서둘러야겠습니다. 올해는 장마가 어떤 얼굴로 변신해 우리나라를 방문할지 모를 일이니까요.

[연관 기사] 마른장마, 지각 장마…‘돌연변이 장마’ 이유는?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4235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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