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100여년 전 나미비아 ‘인종 학살’…범죄 인정하고 사과하는 독일

입력 2021.05.19 (14:03) 수정 2021.05.19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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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비아의 수도 빈트후크에 있는 조각상. 20세기 초 독일군이 학살한 나미비아인이 7만 명이 넘는 것으로 전해진다.나미비아의 수도 빈트후크에 있는 조각상. 20세기 초 독일군이 학살한 나미비아인이 7만 명이 넘는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독일 언론들은 독일인들이 20세기 초 나미비아에서 자행했던 대량 학살 범죄와 관련해 독일 정부와 나미비아 정부가 벌인 협상이 거의 합의에 이르렀다고 보도했습니다.

우선 간단히 설명하자면 독일이 1904년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나미비아에서 저지른 집단 학살 행위를 '인종학살 (Genocide)'로 인정하고 공식 사과하기로 한 겁니다. 여기에 나미비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포함돼 있습니다.

조만간 최종 합의가 되면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나미비아를 방문해 의회에서 공식 사과를 한다고 합니다.

■사막에 몰아넣고…20세기 최초의 대량 학살 '헤레로-나마 사건'

2차 대전 이전의 국가 범죄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나치의 '홀로코스트' 범죄에 가려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또한, 힘이 지배했던 제국주의 시대의 만행에 대한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데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관련된 국제 규범이 갖춰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19세기 앞다퉈 식민지 경영에 나섰던 서구 열강, 주로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식민지에서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나미비아에서 독일의 대량 학살 범죄는 20세기 최초의 인종학살 범죄로 알려졌습니다.

독일 제국은 1884년부터 1915년까지 나미비아를 식민 통치했습니다. 여기서 독일 제국은 '제2 제국'이라 불리는,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그 나라입니다.

식민지 백성의 삶은 어디나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강제 수탈로 삶은 피폐해지고, 자기네 땅에서 2등 국민 취급을 받아야 하니까요.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1904년 나미비아의 헤레로족과 나마족이 무장봉기를 합니다. 헤레로족은 이 과정에서 독일인 120여 명을 죽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바로 반격에 나선 독일군의 현대적 무기 앞에선 중과부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마헤케 사막으로 밀려났고, 그곳에서 배고픔과 탈수 현상으로 죽어갔습니다.

이 사건으로 식민 통치 초기 8만 명이었던 헤레로족 중 6만 5,000명이, 나마족은 2만 명 중 1만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확한 통계가 잡히지 않아 10만 명 넘게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수용소로 보내져 노예 노동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독일제국에 맞서 싸우다 포로로 붙잡힌 헤레로족. 독일군의 대량 학살로 8만 명이던 헤레로족 중 6만5,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독일제국에 맞서 싸우다 포로로 붙잡힌 헤레로족. 독일군의 대량 학살로 8만 명이던 헤레로족 중 6만5,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UN 협약 이전 일인데"…비공식 사과까지 딱 100년
나미비아, 특히 헤레로족으로선 독일 정부의 인종학살 인정과 사과가 커다란 염원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난 세기 독일은 이 사건을 외면했습니다. 독일 정부는 1951년 '집단살해 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UN 협약'이 발효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라며 '인종 학살'이라는 표현을 거부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집단살해 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만행 때문에 만들어진 국제 협약이라는 겁니다.

처음 사과 비슷한 게 나온 건 헤레로-나마 인종학살 사건이 발생한 지 딱 100년 만인 2004년입니다. 하이데마리 비초렉초일 독일 개발원조부 장관이 학살 100주년 추모식에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을 인정한다"고 발언한 겁니다.

이때까지 독일 정부는, 나미비아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독립한(나미비아는 1915년 독일의 식민 지배를 벗어났지만 1920년부터 1990년까지 무려 70년이나 남아공의 위임통치를 받았습니다.) 1990년 이후 수억 유로에 달하는 원조를 했다며 공식 사과와 배상을 거부해왔습니다.

이런 독일의 모습은 확실히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태도와 달랐습니다. 프랑스, 이스라엘 등 강자에게만 사과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2016년 독일 연방 의회가 오스만 튀르크 제국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인종 학살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택하자,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나미비아 학살에 대해서나 얘기해 보라"고 맞받아쳤습니다. 참고로 오스만 튀르크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100만 명에서 150만 명에 이르는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했습니다.

■조만간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이 공식 사과

나미비아 문제는 독일에서도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국제 사회의 지적도 뼈아팠지만, 자국 내에서도 양심 있는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정부 차원의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촉구했습니다. 독일 정부는 2015년부터 나미비아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6년 협상 끝에 결실이 눈앞에 온 것 같습니다. 독일 언론들에 따르면 9차 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곧 양국이 서명할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협상의 정확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논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우선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나미비아 의회에서 '인종 학살'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를 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양국이 그동안 이견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배상과 관련해서는 그동안 서로 이견을 보였는데 '배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대신 나미비아에 꽤 큰 규모의 경제 원조를 하는 것으로 정리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정기적인 개발 원조와 함께 인프라 구축이 포함되고, 한 세기가 지나도록 여전히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피해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붉은 페인트로 훼손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 그가 자신의 ‘사유지’ 콩고를 지배한 20여 년 동안 콩고인 1,000만 명이 숨진 것으로 추산된다.붉은 페인트로 훼손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 그가 자신의 ‘사유지’ 콩고를 지배한 20여 년 동안 콩고인 1,000만 명이 숨진 것으로 추산된다.

■한 세기가 지나도 범죄는 범죄…다른 '제국'들은?
독일은 아픈 과거를 또 한 번 인정하고 앞으로 나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유럽이 아닌 나라,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일에 대한 공식 사과와 반성입니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은 '그땐 다 그랬다'고 생각하는지 지금까지 자신들의 만행을 공식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는 1885년부터 콩고를 사유지로 경영했는데, 그가 죽는 1908년까지 23년간 콩고 인구의 절반인 천만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기아와 질병, 그리고 벨기에의 학살이 주원인으로 꼽힙니다. 레오폴드 2세 지배 당시 콩고는 지옥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벨기에인들은 고무농장에서 할당량을 달성하지 못하거나 탈출하다 잡히는 콩고인들의 손을 잘랐습니다.

벨기에는 레오폴드 2세 사망 이후인 1908년부터 콩고를 직접 식민 지배했고, 콩고는 1960년에야 독립했습니다. 벨기에 정부는 레오폴드 2세가 저지른 대학살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사유지에서 개인이 저지른 일로 벨기에 정부와는 무관하다는 여론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의 만행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30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난징 대학살', 식민지 조선과 일본에서 벌였던 조선인 학살 등 아시아에서의 학살과 침략 행위를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미비아에 대한 독일의 사과는 한 세기라는 시간이 흘러도 잘못은 잘못이며, 가해자의 반성과 사과가 동반된 당사자들끼리의 해결이 중요하다는 걸 말해줍니다. 독일의 반성은 먼산만 바라보고 있는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의 암묵적인 카르텔을 깨뜨릴 수 있는 선례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 총리가 우리 국회나 중국 인민대회당 등 과거 식민지였던 나라나 침략했던 나라의 의회에서 사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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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 리포트] 100여년 전 나미비아 ‘인종 학살’…범죄 인정하고 사과하는 독일
    • 입력 2021-05-19 14:03:32
    • 수정2021-05-19 16:27:46
    특파원 리포트
나미비아의 수도 빈트후크에 있는 조각상. 20세기 초 독일군이 학살한 나미비아인이 7만 명이 넘는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독일 언론들은 독일인들이 20세기 초 나미비아에서 자행했던 대량 학살 범죄와 관련해 독일 정부와 나미비아 정부가 벌인 협상이 거의 합의에 이르렀다고 보도했습니다.

우선 간단히 설명하자면 독일이 1904년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나미비아에서 저지른 집단 학살 행위를 '인종학살 (Genocide)'로 인정하고 공식 사과하기로 한 겁니다. 여기에 나미비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포함돼 있습니다.

조만간 최종 합의가 되면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나미비아를 방문해 의회에서 공식 사과를 한다고 합니다.

■사막에 몰아넣고…20세기 최초의 대량 학살 '헤레로-나마 사건'

2차 대전 이전의 국가 범죄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나치의 '홀로코스트' 범죄에 가려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또한, 힘이 지배했던 제국주의 시대의 만행에 대한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데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관련된 국제 규범이 갖춰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19세기 앞다퉈 식민지 경영에 나섰던 서구 열강, 주로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식민지에서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나미비아에서 독일의 대량 학살 범죄는 20세기 최초의 인종학살 범죄로 알려졌습니다.

독일 제국은 1884년부터 1915년까지 나미비아를 식민 통치했습니다. 여기서 독일 제국은 '제2 제국'이라 불리는,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그 나라입니다.

식민지 백성의 삶은 어디나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강제 수탈로 삶은 피폐해지고, 자기네 땅에서 2등 국민 취급을 받아야 하니까요.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1904년 나미비아의 헤레로족과 나마족이 무장봉기를 합니다. 헤레로족은 이 과정에서 독일인 120여 명을 죽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바로 반격에 나선 독일군의 현대적 무기 앞에선 중과부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마헤케 사막으로 밀려났고, 그곳에서 배고픔과 탈수 현상으로 죽어갔습니다.

이 사건으로 식민 통치 초기 8만 명이었던 헤레로족 중 6만 5,000명이, 나마족은 2만 명 중 1만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확한 통계가 잡히지 않아 10만 명 넘게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수용소로 보내져 노예 노동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독일제국에 맞서 싸우다 포로로 붙잡힌 헤레로족. 독일군의 대량 학살로 8만 명이던 헤레로족 중 6만5,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UN 협약 이전 일인데"…비공식 사과까지 딱 100년
나미비아, 특히 헤레로족으로선 독일 정부의 인종학살 인정과 사과가 커다란 염원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난 세기 독일은 이 사건을 외면했습니다. 독일 정부는 1951년 '집단살해 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UN 협약'이 발효되기 전에 일어난 일이라며 '인종 학살'이라는 표현을 거부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집단살해 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은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만행 때문에 만들어진 국제 협약이라는 겁니다.

처음 사과 비슷한 게 나온 건 헤레로-나마 인종학살 사건이 발생한 지 딱 100년 만인 2004년입니다. 하이데마리 비초렉초일 독일 개발원조부 장관이 학살 100주년 추모식에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을 인정한다"고 발언한 겁니다.

이때까지 독일 정부는, 나미비아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독립한(나미비아는 1915년 독일의 식민 지배를 벗어났지만 1920년부터 1990년까지 무려 70년이나 남아공의 위임통치를 받았습니다.) 1990년 이후 수억 유로에 달하는 원조를 했다며 공식 사과와 배상을 거부해왔습니다.

이런 독일의 모습은 확실히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태도와 달랐습니다. 프랑스, 이스라엘 등 강자에게만 사과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2016년 독일 연방 의회가 오스만 튀르크 제국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인종 학살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택하자,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나미비아 학살에 대해서나 얘기해 보라"고 맞받아쳤습니다. 참고로 오스만 튀르크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100만 명에서 150만 명에 이르는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했습니다.

■조만간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이 공식 사과

나미비아 문제는 독일에서도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국제 사회의 지적도 뼈아팠지만, 자국 내에서도 양심 있는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정부 차원의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촉구했습니다. 독일 정부는 2015년부터 나미비아와 이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6년 협상 끝에 결실이 눈앞에 온 것 같습니다. 독일 언론들에 따르면 9차 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곧 양국이 서명할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협상의 정확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논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우선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이 나미비아 의회에서 '인종 학살'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를 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양국이 그동안 이견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배상과 관련해서는 그동안 서로 이견을 보였는데 '배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대신 나미비아에 꽤 큰 규모의 경제 원조를 하는 것으로 정리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정기적인 개발 원조와 함께 인프라 구축이 포함되고, 한 세기가 지나도록 여전히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피해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붉은 페인트로 훼손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 그가 자신의 ‘사유지’ 콩고를 지배한 20여 년 동안 콩고인 1,000만 명이 숨진 것으로 추산된다.
■한 세기가 지나도 범죄는 범죄…다른 '제국'들은?
독일은 아픈 과거를 또 한 번 인정하고 앞으로 나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유럽이 아닌 나라,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일에 대한 공식 사과와 반성입니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은 '그땐 다 그랬다'고 생각하는지 지금까지 자신들의 만행을 공식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는 1885년부터 콩고를 사유지로 경영했는데, 그가 죽는 1908년까지 23년간 콩고 인구의 절반인 천만 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기아와 질병, 그리고 벨기에의 학살이 주원인으로 꼽힙니다. 레오폴드 2세 지배 당시 콩고는 지옥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벨기에인들은 고무농장에서 할당량을 달성하지 못하거나 탈출하다 잡히는 콩고인들의 손을 잘랐습니다.

벨기에는 레오폴드 2세 사망 이후인 1908년부터 콩고를 직접 식민 지배했고, 콩고는 1960년에야 독립했습니다. 벨기에 정부는 레오폴드 2세가 저지른 대학살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사유지에서 개인이 저지른 일로 벨기에 정부와는 무관하다는 여론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아시아의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의 만행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30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난징 대학살', 식민지 조선과 일본에서 벌였던 조선인 학살 등 아시아에서의 학살과 침략 행위를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미비아에 대한 독일의 사과는 한 세기라는 시간이 흘러도 잘못은 잘못이며, 가해자의 반성과 사과가 동반된 당사자들끼리의 해결이 중요하다는 걸 말해줍니다. 독일의 반성은 먼산만 바라보고 있는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의 암묵적인 카르텔을 깨뜨릴 수 있는 선례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 총리가 우리 국회나 중국 인민대회당 등 과거 식민지였던 나라나 침략했던 나라의 의회에서 사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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