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광고로 41년 만에 연락 닿은 두 사람…그 때 무슨 일이?

입력 2021.05.20 (09:02) 수정 2021.05.2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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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_2021.05.17.(좌)와 2021.05.18(우)한겨레_2021.05.17.(좌)와 2021.05.18(우)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의 감성이 남아 있는 신문 지면에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를 낸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41년 전 대여섯 시간을 함께 보냈던 사람을 찾겠다는 겁니다. 이제 찾으려는 사람 얼굴도 이름도 학교도 기억나지 않지만 뜻을 함께 했던 동료를 찾고 싶은 마음은 간절해 보입니다. 이 광고는 SNS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화제를 불러왔습니다.

■ 41년 만에… "한 남자의 안부를 묻고 찾습니다"

광고는 5.18 민주화운동 41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17일, 한겨레신문 8면 하단 생활광고면에 실렸습니다. 이 광고는 5.18 민주화운동 41주년인 지난 18일에도 같은 신문 같은 자리에 다시 실렸는데 내용은 조금 더 구체적입니다.

광고주와 광고주가 찾는 사람, 어떤 인물일까요? <한 남자의 안부를 묻고 찾습니다>라는 제목의 광고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당신과 나는 1980년 5월 16~17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열린 전국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 중이었습니다"

둘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우선 1980년 5월 당시의 상황부터 알 필요가 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부터 1980년 5월 17일까지 정치적 과도기를 '서울의 봄' 이라 부릅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 학생들과 시민들은 신군부의 계엄 철폐와 조속한 민주화를 촉구하며 10만 명 넘게 모였다.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 학생들과 시민들은 신군부의 계엄 철폐와 조속한 민주화를 촉구하며 10만 명 넘게 모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시해되면서 유신 체제가 종지부를 찍습니다 (10.26 사건). 이후 최규하 내각은 개헌 추진을 선언하고 긴급 조치를 해제합니다. 재야인사들이 복권됐고 민주화가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도 커졌지만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축이 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합니다 (12.12 쿠데타). 대학가에서는 1980년 3월, 개학에 맞춰 본격적으로 군부 규탄 시위를 벌입니다. 대학생들은 교내에서 시위를 이어가다가 5월 들어 한꺼번에 거리로 뛰쳐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5월 15일, 서울역 앞에서 30여 개 대학 대학생과 시민 등 10만 명 이상이 모여 계엄 철폐를 외치며 민주화 일정 제시를 요구합니다. 시위 지도부는 격론 끝에 충돌이 나서 군 투입의 빌미를 주면 안 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일단 집회를 해산하기로 결정합니다 (서울역 회군). 다음 날인 5월 16일, 전국 55개 대학생 대표 95명은 수습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이화여대에 모입니다 (제1회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 마라톤 회의는 5월 17일 오후까지 이어졌고 5월 22일까지 비상계엄해제’, ‘연내 정권 이양을 위한 정치일정의 조속한 천명’ 등을 요구하고 이러한 요구들이 관철되지 않을 때는 행동을 취하기로 결의합니다.

광고주와 광고주가 찾는 사람은 바로 이 회의에 참석한 대학생 대표들 가운데 하나로 추정됩니다.

■ 학생운동 무력화 위한 무더기 연행 당시 함께 탈출

광고를 보면 두 사람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함께 겪었습니다.

"17시 30분경 우리 둘은 회의장으로 난입한 공수부대의 체포를 피해 23:50경까지 동 대학 교정 내 어느 건물(현재 수영장이 설치된) 지하보일러실 귀퉁이의 좁고 추운 공간에 갇혀 지독한 공포에 시달리다 5월 18일 0시 직전에 천운으로 탈출한 경험을 공유한 사이입니다"

두 사람은 어떤 연유로 이런 상황을 함께 맞닥뜨리게 됐을까요?

회의가 이어지던 5월 17일 오후 5시 30분 전후, 이화여대에는 군인들이 들이닥치며 대학생 대표들을 검거에 나섭니다. 토끼몰이식 체포 작전에 대학생 대표들 대다수는 연행되고 일부만 군인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에 대한 체포가 마무리되던 바로 그 날 밤 24시, 즉 18일 0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 확대가 선포됩니다. 그리고 광주에서는 18일부터 유혈 사태가 벌어지며 5.18민주화운동이 시작됩니다.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고 대학에 휴교령을 내린다는 내용을 담은 경향신문 호외_1980.05.18.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고 대학에 휴교령을 내린다는 내용을 담은 경향신문 호외_1980.05.18.
신군부는 비상계엄 확대 직전 대학생들의 활동을 사전에 무력화하기 위해 대학생 대표들에 대한 일망타진 작전을 벌였던 겁니다.

광고주와 광고주가 찾는 사람은 군인들의 체포를 피해 아래 사진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피해 숨어있다가 아슬아슬하게 탈출에 성공합니다.

두 사람이 숨어 있던 보일러실이 있던  장소로 추정되는 이화여대  생활과학관(출처: 네이버 지도 캡처)두 사람이 숨어 있던 보일러실이 있던 장소로 추정되는 이화여대 생활과학관(출처: 네이버 지도 캡처)

■ "두 사람, 광고 나간 뒤 연락돼…찾는 사람 맞다"

광고가 나간 뒤 광고가 나간 뒤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는 광고를 찍은 사진과 함께 광고주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글들이 잇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 뭉클한 사연이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두 분이 꼭 연락이 됐으면 한다" 등의 반응들이 쏟아졌는데 어떻게 됐을까요?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두 사람, 모두 생존해 있고 광고 덕분에 서로 연락이 닿았다고 합니다.

광고주가 누군지 수소문하다가 광고주의 지인이라는 분들과 각각 취재가 됐습니다. 광고주의 지인들은 광고주가 60대 남자이며 지난 18일 늦은 밤 한 남자에게서 이메일을 받고서 지난 19일 직접 통화해 찾으려고 했던 사람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전했습니다.

광고주가 굳이 41년이나 지나고서야 긴박했던 사람을 찾겠다고 나선 이유는 뭘까요? 아쉽게도 당사자는 취재에 응할 수 없다고 전해와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본인의 SNS가 아니라 신문광고를 통해 사람 찾기에 나선 것으로 보아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는 곤란한 사연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긴박했던 순간은 41년이 흘러 역사의 한 장면이 됐습니다. 당시 이화여대에서 군인들에게 연행됐던 대학생 대표들 가운데는 정치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광고를 본 다수의 사람들은 두 사람의 사연을 가슴 뭉클한 감동적인 이야기라고들 생각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입니다. 둘의 만남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은 채 수십 년을 보낸 이가 묵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사람이 직접 만났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후속 보도를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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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문광고로 41년 만에 연락 닿은 두 사람…그 때 무슨 일이?
    • 입력 2021-05-20 09:02:10
    • 수정2021-05-20 16:38:20
    취재K
한겨레_2021.05.17.(좌)와 2021.05.18(우)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의 감성이 남아 있는 신문 지면에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를 낸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도 41년 전 대여섯 시간을 함께 보냈던 사람을 찾겠다는 겁니다. 이제 찾으려는 사람 얼굴도 이름도 학교도 기억나지 않지만 뜻을 함께 했던 동료를 찾고 싶은 마음은 간절해 보입니다. 이 광고는 SNS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며 화제를 불러왔습니다.

■ 41년 만에… "한 남자의 안부를 묻고 찾습니다"

광고는 5.18 민주화운동 41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17일, 한겨레신문 8면 하단 생활광고면에 실렸습니다. 이 광고는 5.18 민주화운동 41주년인 지난 18일에도 같은 신문 같은 자리에 다시 실렸는데 내용은 조금 더 구체적입니다.

광고주와 광고주가 찾는 사람, 어떤 인물일까요? <한 남자의 안부를 묻고 찾습니다>라는 제목의 광고는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당신과 나는 1980년 5월 16~17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열린 전국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 중이었습니다"

둘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우선 1980년 5월 당시의 상황부터 알 필요가 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부터 1980년 5월 17일까지 정치적 과도기를 '서울의 봄' 이라 부릅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앞. 학생들과 시민들은 신군부의 계엄 철폐와 조속한 민주화를 촉구하며 10만 명 넘게 모였다.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시해되면서 유신 체제가 종지부를 찍습니다 (10.26 사건). 이후 최규하 내각은 개헌 추진을 선언하고 긴급 조치를 해제합니다. 재야인사들이 복권됐고 민주화가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도 커졌지만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축이 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합니다 (12.12 쿠데타). 대학가에서는 1980년 3월, 개학에 맞춰 본격적으로 군부 규탄 시위를 벌입니다. 대학생들은 교내에서 시위를 이어가다가 5월 들어 한꺼번에 거리로 뛰쳐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5월 15일, 서울역 앞에서 30여 개 대학 대학생과 시민 등 10만 명 이상이 모여 계엄 철폐를 외치며 민주화 일정 제시를 요구합니다. 시위 지도부는 격론 끝에 충돌이 나서 군 투입의 빌미를 주면 안 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일단 집회를 해산하기로 결정합니다 (서울역 회군). 다음 날인 5월 16일, 전국 55개 대학생 대표 95명은 수습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이화여대에 모입니다 (제1회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 마라톤 회의는 5월 17일 오후까지 이어졌고 5월 22일까지 비상계엄해제’, ‘연내 정권 이양을 위한 정치일정의 조속한 천명’ 등을 요구하고 이러한 요구들이 관철되지 않을 때는 행동을 취하기로 결의합니다.

광고주와 광고주가 찾는 사람은 바로 이 회의에 참석한 대학생 대표들 가운데 하나로 추정됩니다.

■ 학생운동 무력화 위한 무더기 연행 당시 함께 탈출

광고를 보면 두 사람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함께 겪었습니다.

"17시 30분경 우리 둘은 회의장으로 난입한 공수부대의 체포를 피해 23:50경까지 동 대학 교정 내 어느 건물(현재 수영장이 설치된) 지하보일러실 귀퉁이의 좁고 추운 공간에 갇혀 지독한 공포에 시달리다 5월 18일 0시 직전에 천운으로 탈출한 경험을 공유한 사이입니다"

두 사람은 어떤 연유로 이런 상황을 함께 맞닥뜨리게 됐을까요?

회의가 이어지던 5월 17일 오후 5시 30분 전후, 이화여대에는 군인들이 들이닥치며 대학생 대표들을 검거에 나섭니다. 토끼몰이식 체포 작전에 대학생 대표들 대다수는 연행되고 일부만 군인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에 대한 체포가 마무리되던 바로 그 날 밤 24시, 즉 18일 0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 확대가 선포됩니다. 그리고 광주에서는 18일부터 유혈 사태가 벌어지며 5.18민주화운동이 시작됩니다.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고 대학에 휴교령을 내린다는 내용을 담은 경향신문 호외_1980.05.18.신군부는 비상계엄 확대 직전 대학생들의 활동을 사전에 무력화하기 위해 대학생 대표들에 대한 일망타진 작전을 벌였던 겁니다.

광고주와 광고주가 찾는 사람은 군인들의 체포를 피해 아래 사진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피해 숨어있다가 아슬아슬하게 탈출에 성공합니다.

두 사람이 숨어 있던 보일러실이 있던  장소로 추정되는 이화여대  생활과학관(출처: 네이버 지도 캡처)
■ "두 사람, 광고 나간 뒤 연락돼…찾는 사람 맞다"

광고가 나간 뒤 광고가 나간 뒤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는 광고를 찍은 사진과 함께 광고주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글들이 잇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슴 뭉클한 사연이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두 분이 꼭 연락이 됐으면 한다" 등의 반응들이 쏟아졌는데 어떻게 됐을까요?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두 사람, 모두 생존해 있고 광고 덕분에 서로 연락이 닿았다고 합니다.

광고주가 누군지 수소문하다가 광고주의 지인이라는 분들과 각각 취재가 됐습니다. 광고주의 지인들은 광고주가 60대 남자이며 지난 18일 늦은 밤 한 남자에게서 이메일을 받고서 지난 19일 직접 통화해 찾으려고 했던 사람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전했습니다.

광고주가 굳이 41년이나 지나고서야 긴박했던 사람을 찾겠다고 나선 이유는 뭘까요? 아쉽게도 당사자는 취재에 응할 수 없다고 전해와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본인의 SNS가 아니라 신문광고를 통해 사람 찾기에 나선 것으로 보아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는 곤란한 사연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긴박했던 순간은 41년이 흘러 역사의 한 장면이 됐습니다. 당시 이화여대에서 군인들에게 연행됐던 대학생 대표들 가운데는 정치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광고를 본 다수의 사람들은 두 사람의 사연을 가슴 뭉클한 감동적인 이야기라고들 생각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입니다. 둘의 만남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맞닥뜨려야 했던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은 채 수십 년을 보낸 이가 묵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사람이 직접 만났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후속 보도를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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