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국가배상까지, 풀어야 할 과제 세 가지

입력 2021.05.21 (07:00) 수정 2021.05.21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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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75년 내무부장관은 '부랑인'의 단속·수용·보호를 목적으로 '부랑인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지침(내무부 훈령 제410 호)'을 발령합니다.

훈령의 내용은 지자체장이 경찰과 합동으로 부랑인 단속반을 편성해 부랑인을 단속하고, 단속된 부랑인 중 연고가 불확실한 사람을 시도 단위로 설치된 부랑인수용시설에 위탁 수용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복지원은 이 훈령에 근거해 1975년 부산시장과 '부랑인선도(수용보호)위탁계약'을 체결하고 국고보조금을 지급받으면서, 단속된 부랑인을 복지원에 수용했습니다.

단속기관에서 인계되는 부랑인의 수가 늘어나자, 형제복지원은 1985년 말 경남 울주군 일대 토지에 새 수용시설과 복지원 수용자들의 직업 보도(輔導)시설인 자동차운전교습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형제복지원은 그 일대에 출입문과 창문에 철창시설을 한 숙소시설, 이른바 '울주작업장'을 마련해 수용자들을 토지의 평탄화 작업과 석축 공사 등에 투입했습니다.

낮에는 피해자들 중 일부를 경비원으로 임명해 목봉과 감시견 10여 마리를 사용해 다른 피해자들을 감시하게 했고, 야간에는 철창이 갖춰진 숙소시설에 가두고 자물쇠로 출입문을 잠갔습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1987년 한 검사가 우연히 시설을 발견하면서 드러난 복지원의 실상은 인권을 유린한 범죄의 현장이었습니다.

1987년 조사에 따르면 수용자의 71.8%가 연고지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길 가던 10대 학생을 포함해 일반 시민들까지 강제로 잡혀와 감금돼 강제 노역과 학대에 시달렸습니다. 공식 집계된 사망자만 513명에 이릅니다.

한국판 '아우슈비츠'로까지 불렸지만 가해자 중 누구 하나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국가가 국민의 인권을 침해한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된 사건입니다.

■ 형제복지원 피해자들, 첫 국가배상소송 제기

형제복지원 피해자들 13명은 오늘(20일) 서울중앙지법에 총 80억원의 국가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습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낸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피해자들은 "형제복지원은 개인의 불법행위가 아닌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중대 인권침해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피해자들은 우선 "형제복지원이 부랑인들을 수용할 수 있었던 근거는 내무부 훈령인데, 이는 신체의 자유를 직접 침해하는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법률에 근거하지 않았고, 부랑인의 정의마저 불명확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부랑인 단속 조치가 대통령의 지시로 이루어져 1986년 수용자 3900여명 중 약 84%가 경찰과 공무원에 의해 복지원에 인계됐다며,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부당 강제수용이라고도 주장했습니다. 아울러 수십억 원씩의 국가보조금이 지급된 시설임에도 국가와 부산시가 이를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고도 주장했습니다.

■ 국가배상까지 남은 과제들

현행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은 '공무원 또는 공무를 위탁받은 사인(이하 “공무원”이라 한다)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 국가가 그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과제 ① 국가 직무 집행 과정에서 고의·과실에 의한 법령 위반인지 여부

따라서, 우선 국가가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과실로 법령을 위반한 것인지 여부가 문제되는데, 다행히 경찰관 등 국가공무원이 형제복지원에 무고한 시민들을 수용하거나,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진 가혹행위와 노역을 시킨 사실 등 기초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사법부의 결론이 확정지어진 상태입니다.

대법원은 지난 3월 형제복지원장에 대해 제기된 비상상고심에서,

"국가는 복지국가를 내세우면서도 아동·장애인을 포함해 의지할 곳 없이 빈곤이나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을 부랑인으로 구분해 '단속'이라는 명목으로 사회에서 격리하고, 피고인이 운영하는 형제복지원을 사회복지기관으로 인가해 '보호'라는 이름 아래 단속한 부랑인들의 수용을 위탁하고는 피고인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부랑인들을 감금해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고, 강제노역을 통해 노동력을 착취하도록 묵인·비호했다"며 국가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대법원은 이어 "이 사건이 갖는 문제의 심각성의 핵심은 단순히 ‘신체의 자유’가 침해되었다는 점보다 헌법의 최고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되었다는 점"이라고도 강조했습니다.

과제 ② 34년 전 '손해' 증명 가능할까?

다음으로 '타인의 손해' 부분이 문제되는데, 이 부분의 증명이 이번 소송에서 가장 첨예한 쟁점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한 피해자들은 이번 소송에서 약 3억 3000만 원에서 최대 9억 2000만 원의 피해액수를 청구했는데, 이 손해가 어떻게 산정되었는지를 증명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당시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시점에 국가가 개개인에게 어떠한 손해를 입혔는지를 증명해야 하는데, 이번에 소송을 낸 피해자 13명은 '입소카드' 등으로 자신이 수용됐다는 것이 증명이 가능한 상황이라고 하나, 그 안에서 자신이 어떠한 인권침해를 당했는지까지 증명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가장 최근이라고 해도 1987년, 무려 34년 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 과제 ③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

아울러 손해배상 청구권이 남아있는지도 과제입니다. 민법은 불법행위가 벌어진 날로부터 10년이 지나면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없어졌다고 보는 '소멸시효' 제도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용자들이 풀려난 날로부터 10년이 훌쩍 넘은 2021년 현재는 청구권이 없다고 보는 것이 원칙입니다.

다만 최근 사법부는 과거사 대상 국가배상소송에서 국가에 책임이 있는 상황이라면 가해자인 국가가 소멸시효 주장을 펴는 것 자체가 신의성실의 원칙 위반이고 권리 남용에 해당한다는 법리로 소멸시효를 극복하고 있어, 이번 사건에서도 유사한 법리가 적용될 여지가 있습니다.

■과거사위원회 통한 '투 트랙 회복' 가능할까

국가배상소송을 낸 피해자들도 있지만, 다른 일부 피해자들은 소송이 아닌 다른 경로로 피해 회복이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 중입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1호 사건으로 접수해 진상규명이 진행 중인데, 이러한 과정에서 피해회복이 이뤄질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겁니다. 다만 과거사위 조사가 언제 마무리될지, 이를 기반으로 피해 회복이 언제 가능할지는 미지수입니다.

대법원은 형제복지원 사건이,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인간 존엄성의 침해"라며 "건강한 사회 공동체라면 이러한 인권침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공적 담론을 거쳐 피해자들에 대한 치유와 회복을 위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여야 마땅하다"면서,

"이 사건의 성격과 발생 원인 및 그로 인한 피해자들의 기본권 침해의 내용과 정도를 고려할 때, 피해자나 유가족에 대한 피해 회복은 특별한 권리를 창설․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보장되었어야 할 권리를 돌려주는 것"이라며 피해 회복 필요성을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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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제복지원 국가배상까지, 풀어야 할 과제 세 가지
    • 입력 2021-05-21 07:00:46
    • 수정2021-05-21 20:59:33
    취재K

지난 1975년 내무부장관은 '부랑인'의 단속·수용·보호를 목적으로 '부랑인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지침(내무부 훈령 제410 호)'을 발령합니다.

훈령의 내용은 지자체장이 경찰과 합동으로 부랑인 단속반을 편성해 부랑인을 단속하고, 단속된 부랑인 중 연고가 불확실한 사람을 시도 단위로 설치된 부랑인수용시설에 위탁 수용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복지원은 이 훈령에 근거해 1975년 부산시장과 '부랑인선도(수용보호)위탁계약'을 체결하고 국고보조금을 지급받으면서, 단속된 부랑인을 복지원에 수용했습니다.

단속기관에서 인계되는 부랑인의 수가 늘어나자, 형제복지원은 1985년 말 경남 울주군 일대 토지에 새 수용시설과 복지원 수용자들의 직업 보도(輔導)시설인 자동차운전교습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형제복지원은 그 일대에 출입문과 창문에 철창시설을 한 숙소시설, 이른바 '울주작업장'을 마련해 수용자들을 토지의 평탄화 작업과 석축 공사 등에 투입했습니다.

낮에는 피해자들 중 일부를 경비원으로 임명해 목봉과 감시견 10여 마리를 사용해 다른 피해자들을 감시하게 했고, 야간에는 철창이 갖춰진 숙소시설에 가두고 자물쇠로 출입문을 잠갔습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1987년 한 검사가 우연히 시설을 발견하면서 드러난 복지원의 실상은 인권을 유린한 범죄의 현장이었습니다.

1987년 조사에 따르면 수용자의 71.8%가 연고지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길 가던 10대 학생을 포함해 일반 시민들까지 강제로 잡혀와 감금돼 강제 노역과 학대에 시달렸습니다. 공식 집계된 사망자만 513명에 이릅니다.

한국판 '아우슈비츠'로까지 불렸지만 가해자 중 누구 하나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국가가 국민의 인권을 침해한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된 사건입니다.

■ 형제복지원 피해자들, 첫 국가배상소송 제기

형제복지원 피해자들 13명은 오늘(20일) 서울중앙지법에 총 80억원의 국가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습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낸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피해자들은 "형제복지원은 개인의 불법행위가 아닌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중대 인권침해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피해자들은 우선 "형제복지원이 부랑인들을 수용할 수 있었던 근거는 내무부 훈령인데, 이는 신체의 자유를 직접 침해하는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법률에 근거하지 않았고, 부랑인의 정의마저 불명확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부랑인 단속 조치가 대통령의 지시로 이루어져 1986년 수용자 3900여명 중 약 84%가 경찰과 공무원에 의해 복지원에 인계됐다며,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부당 강제수용이라고도 주장했습니다. 아울러 수십억 원씩의 국가보조금이 지급된 시설임에도 국가와 부산시가 이를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고도 주장했습니다.

■ 국가배상까지 남은 과제들

현행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은 '공무원 또는 공무를 위탁받은 사인(이하 “공무원”이라 한다)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 국가가 그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과제 ① 국가 직무 집행 과정에서 고의·과실에 의한 법령 위반인지 여부

따라서, 우선 국가가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과실로 법령을 위반한 것인지 여부가 문제되는데, 다행히 경찰관 등 국가공무원이 형제복지원에 무고한 시민들을 수용하거나, 형제복지원에서 벌어진 가혹행위와 노역을 시킨 사실 등 기초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사법부의 결론이 확정지어진 상태입니다.

대법원은 지난 3월 형제복지원장에 대해 제기된 비상상고심에서,

"국가는 복지국가를 내세우면서도 아동·장애인을 포함해 의지할 곳 없이 빈곤이나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을 부랑인으로 구분해 '단속'이라는 명목으로 사회에서 격리하고, 피고인이 운영하는 형제복지원을 사회복지기관으로 인가해 '보호'라는 이름 아래 단속한 부랑인들의 수용을 위탁하고는 피고인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부랑인들을 감금해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고, 강제노역을 통해 노동력을 착취하도록 묵인·비호했다"며 국가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대법원은 이어 "이 사건이 갖는 문제의 심각성의 핵심은 단순히 ‘신체의 자유’가 침해되었다는 점보다 헌법의 최고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되었다는 점"이라고도 강조했습니다.

과제 ② 34년 전 '손해' 증명 가능할까?

다음으로 '타인의 손해' 부분이 문제되는데, 이 부분의 증명이 이번 소송에서 가장 첨예한 쟁점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한 피해자들은 이번 소송에서 약 3억 3000만 원에서 최대 9억 2000만 원의 피해액수를 청구했는데, 이 손해가 어떻게 산정되었는지를 증명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당시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시점에 국가가 개개인에게 어떠한 손해를 입혔는지를 증명해야 하는데, 이번에 소송을 낸 피해자 13명은 '입소카드' 등으로 자신이 수용됐다는 것이 증명이 가능한 상황이라고 하나, 그 안에서 자신이 어떠한 인권침해를 당했는지까지 증명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가장 최근이라고 해도 1987년, 무려 34년 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 과제 ③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

아울러 손해배상 청구권이 남아있는지도 과제입니다. 민법은 불법행위가 벌어진 날로부터 10년이 지나면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없어졌다고 보는 '소멸시효' 제도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용자들이 풀려난 날로부터 10년이 훌쩍 넘은 2021년 현재는 청구권이 없다고 보는 것이 원칙입니다.

다만 최근 사법부는 과거사 대상 국가배상소송에서 국가에 책임이 있는 상황이라면 가해자인 국가가 소멸시효 주장을 펴는 것 자체가 신의성실의 원칙 위반이고 권리 남용에 해당한다는 법리로 소멸시효를 극복하고 있어, 이번 사건에서도 유사한 법리가 적용될 여지가 있습니다.

■과거사위원회 통한 '투 트랙 회복' 가능할까

국가배상소송을 낸 피해자들도 있지만, 다른 일부 피해자들은 소송이 아닌 다른 경로로 피해 회복이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 중입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1호 사건으로 접수해 진상규명이 진행 중인데, 이러한 과정에서 피해회복이 이뤄질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겁니다. 다만 과거사위 조사가 언제 마무리될지, 이를 기반으로 피해 회복이 언제 가능할지는 미지수입니다.

대법원은 형제복지원 사건이,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인간 존엄성의 침해"라며 "건강한 사회 공동체라면 이러한 인권침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공적 담론을 거쳐 피해자들에 대한 치유와 회복을 위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여야 마땅하다"면서,

"이 사건의 성격과 발생 원인 및 그로 인한 피해자들의 기본권 침해의 내용과 정도를 고려할 때, 피해자나 유가족에 대한 피해 회복은 특별한 권리를 창설․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보장되었어야 할 권리를 돌려주는 것"이라며 피해 회복 필요성을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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